4월 20일 오전 서울 방배동의 한 가정에서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가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4월 20일 오전 서울 방배동의 한 가정에서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가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온라인 수업을 듣고 있다. 사진 조선일보 DB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엄청나다’는 표현이 진부할 정도로 거대한 사회적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물리적 격리와 사회적 격리가 동시에 일어나면서 기업들은 그동안 각종 우려로 선뜻 도입하기 어려웠던 재택근무를 도입했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대면을 고집하던 사회가 비대면(언택트·untact)을 선택하면서 어색하게 여겨진 화상 회의가 일상화됐다. 거래와 관계에 있어 스킨십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던 많은 이에게 비대면의 물성이 결코 차갑지 않다는 것을 인식시켜준 계기가 됐다. 아이들은 온라인 수업을 통해, 직장인들은 화상 회의를 통해 비대면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었다. 분명 기존과 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다만,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은 비대면 세상 자체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igital transformation·디지털 전환)이라고 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온라인이 디지털의 선봉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디지털 전환의 동의어는 아니다. 코로나19 이후 항공 업계가 위기를 맞이하고, 석유·자동차 업계가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은 이들이 디지털 혁신을 주저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질병의 창궐’이라는 특수 상황에 대한 결과일 뿐이다. 온라인 시장인 이커머스(전자상거래)는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주목받았을 뿐이다.

디지털은 공급자가 고객을 이해하고 고객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는 물리적 수단이다. 아날로그가 철저히 공급자 중심의 시장을 만드는 도구라 하면, 디지털은 고객을 중심에 둔다. 고객을 중심에 둔다는 표현이 진부하지만, 고객이 일반적으로 좋아하리라 판단하고 서비스하는 것과 개개인의 고객이 실제로 좋아하는 것에 맞추는 것의 차이가 바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간극이다.

과거로 돌아가 보자.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체험한 지금의 40~50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놓고 우위를 논하기도 했다. 아날로그 우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LP판의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일명 ‘아날로그 감성’으로 소개하고, 뭉개지는 소리 없이 깔끔한 CD 소리는 차갑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 소리가 뭉개지는 게 자연의 이치라 이야기하는 이에게 언제나 동일한 음질을 보장해주는 CD는 자연법칙을 무시하는 인위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음원 플랫폼 플로(FLO), 멜론, 스포티파이 등을 통해 음악을 스트리밍(재생)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디지털은 차갑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선호도의 차이일 뿐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의 가치를 내세우면서, 새로운 것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LP판을 주창하는 이들도 어느덧 CD를 찾기 시작했고, 그 CD가 이제는 스트리밍으로 넘어왔다. 이제는 LP, CD, 스트리밍 서비스 간의 우위를 논하는 것이 부질없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아날로그를 숭상했던 자연스러움은 공급자의 불성실을 드러낸다.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차단할 기술도, LP판의 크기를 줄일 방법도 없던 시절의 차선책이었을 뿐이다. LP판은 담을 수 있는 물리적 정보의 양이 제한되어 있었고, 조금만 잘못 보관하면 휘기도 했다. 반복 재생을 할수록 LP판이 닳아 음질은 변색되고 정성껏 관리하지 않으면 못 쓰게 됐다. 또 직사광선을 맞으면 안 되기에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 세워 보관해야 했고, LP판에 곰팡이가 생길 수 있어 음반 기름으로 닦아줘야 했다. 사실 아날로그 우위를 주장한 사람은 이 모든 불편함을 ‘아날로그의 가치’라며 덧칠했을 뿐이다.


2월 26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한 사무실. 코로나19로 직원 50%가 재택근무에 들어가 빈자리들이 보인다. 사진 조선일보 DB
2월 26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한 사무실. 코로나19로 직원 50%가 재택근무에 들어가 빈자리들이 보인다. 사진 조선일보 DB

디지털, 편리 욕구 충족

CD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특성이 섞인 과도기 상품이었다면 스트리밍은 디지털의 물성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상품이다. 디지털은 불편함과 군더더기를 싫어한다. 에두르는 말을 기피하고 가식을 떨쳐낸다. 싫은데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선택하지 않고,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다고 드러내는 것이 디지털이다. 디지털은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

내가 만든 재생리스트를 타인과 공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게 디지털이고 타인이 만든 재생리스트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게 디지털이다.

영상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나면 반복적으로 나오는 도입 부분을 잘라내고 본영상부터 볼 수 있게 한 것이 디지털이고, 귀찮게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내 취향에 맞춰 또 다른 영상을 재생시켜주는 게 디지털이다. 철저히 나라는 개인 고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바로 디지털이다. 아침 조리 시간을 단축시켜 주기 위해 새벽 배송을 선택하게 해 준 것도 디지털이다. 철저히 고객의 편의성을 최우선시 할 수 있는 도구인 셈이다. 시청자나 청취자라는 동글동글하고 식별 불가능한 단어를 사용하기보다 너와 나라는 구체적인 이용자를 지칭할 수 있는 것이 디지털이다.

예전에도 그랬다. 할머니가 동네 마실 다니면서 들르곤 했던 선술집 주인아줌마는 할머니의 동선과 할머니의 취향을 너무도 잘 알아 굳이 무엇을 달라고 요청하지 않아도 술 한잔과 안줏거리를 내주곤 했다. 선술집이 대형 주점으로 바뀌는 세상에서 더는 선술집 주인의 맞춤 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디지털은 이를 가능하게 해 준다. 내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주문했는지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가져다주는 것, 그것이 바로 글로벌을 지향하는 현시대의 디지털 전환이다.

디지털 전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은 고객 개개인에게 맞춰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기업이 디지털 전환을 선언한다면, 그것은 고객을 중심에 두고 사업하겠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