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99년 스승 소크라테스가 사망하자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회상’이라는 저작을 남겼다. 여기서 크세노폰은 쾌락, 감정,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리더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림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 위키피디아

소크라테스는 아무나 제자로 받지 않았다. 그가 찾는 제자는 미래의 리더들이었다. 이때 리더의 조건은 절제였다. 이 가르침을 절실하게 체험한 제자가 크세노폰(Xenophon‧그리스 철학자, 군인)이다. 기원전 402년 크세노폰은 그리스 용병대와 함께 소아시아의 지역 우두머리 키로스가 그의 형인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대항해 일으킨 반란에 참여했다. 전투 능력은 키로스군이 우세했고, 병력은 페르시아군이 많았다.

즉 키로스가 이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키로스가 흥분해 전쟁을 망쳤다. 혼전 중 키로스는 적군 중앙으로 대담한 기습을 감행했다. 그러고는 거의 단신으로 왕을 공격하다가 경호원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크세노폰이 일생 동안 자신이 만난 사람 중에 최고의 리더였다고 극찬했던 키로스는 잠시 절제를 잊은 탓에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잔혹한 깨달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용주가 사라져 버린 그리스 용병대는 현재의 이라크 땅 한복판에 고립됐다.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무조건 지중해까지 나아가 항구를 찾아 고향으로 가는 배를 탈취하는 것뿐이었다. 길잡이도 없었고, 사방에 페르시아군 천지였으므로 그들은 왔던 길을 돌아가지 않고 무조건 북쪽을 향해 나갔다. 평원에서는 페르시아 기병이 절대 유리했으므로 산악 지형과 페르시아에 덜 우호적인 부족들의 땅을 통해 빠져나가려는 속셈이었다. 그들이 애타게 찾는 곳은 바다였지만, 크세노폰이 이 행군을 기록한 수기의 제목이 ‘높은 곳으로(Anabasis)’인 까닭이다.

이렇게 1년 3개월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그들이 행군한 거리는 6500㎞에 달했다. 산악 진로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페르시아군은 집요하게 추격해 오지 않았다. 그러나 험한 곳에는 보통 호전적인 종족이 살았다. 그들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싸워서 점령하거나 약탈, 협박으로 식량과 물자를 조달하며 행군해야 했다. 그들이 거쳐 간 마을이나 도시는 215군데였다. 강하게 저항하는 도시도 꽤 있었다. 그때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만1000명이 출발해서 살아남은 사람은 6000명이었다.

크세노폰은 이 부대의 지휘관이 됐다. 그렇다고 완전한 사령관은 아니었다. 용병대는 여러 지역 군대로 구성됐다. 지역갈등은 심했고, 그들은 수시로 이번에는 누구를 지휘관으로 뽑고, 누구의 지휘를 따를지를 토론하고 결정했다. 크세노폰이 나름 지지를 유지했던 데는 그가 아테네인이어서 막강 군벌인 스파르타군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크세노폰이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한 덕분이었다. 크세노폰이 쓴 책(높은 곳으로)이니 당연히 자신을 미화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잘못을 감춘 부분이 있다고 해도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상황마다 그가 제시하는 방안은 분명히 합리적이었다.

여기서 합리적이라는 것은 교묘한 전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장정 중에 그리스 용병대가 겪었던 제일 큰 고충은 ‘자제’였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떨기도 했지만, 부유한 도시에 도착하면 금세 약탈에 마음을 빼앗겼다. 황금의 유혹에 제멋대로 약탈을 나갔다가 전멸하는 경우도 있었다. 크세노폰은 살아남기 위해선 절대 쓸데없는 전투를 벌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쓸데없이 병력을 소진하다가는 전체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탐욕과 분노로 소부대가 이탈하는 경우는 빈번하게 발생했다. 병사 한 명이 살해되면 복수한다고 동료들이 뛰쳐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타오코이족의 지역에 도착했을 때, 주민들은 산 위의 요새로 피신하고 일체의 지원을 거절했다. 식량이 떨어진 그리스군은 위험한 전투를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오코이족은 높은 곳에서 돌을 던지며 그리스군을 괴롭혔다. 고전하던 그리스군은 기발한 작전을 생각해 낸다. 잠깐 몸을 노출했다가 적이 돌을 던지면 다시 엄폐물 뒤로 숨는 것이다.

이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타오코이족이 비축해 놓았던 돌멩이가 다 떨어졌다. 적의 돌이 소진되자 그리스군이 요새로 진입했고 성벽 위에 있던 주민들은 아이들을 집어 던지고 자신도 투신해서 자결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부자인 듯한 사람이 보이자, 그리스군의 유능한 장교 한 명이 얼른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 몸값을 뜯어내려는 욕심이었겠지만, 투신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도 딸려가 죽었다.


쾌락·감정·탐욕 절제 못하면 자격 없어

크세노폰이 이 에피소드를 기록한 이유는 이 행군을 통해서 올바른 결정을 방해하고, 자신뿐만 아니라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요인이 탐욕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았던 덕분이었다. 기원전 399년 스승 소크라테스가 사망하자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회상’이라는 저작을 남겼다. 지나치게 철학적인 플라톤의 저술과 달리 크세노폰은 인간 소크라테스를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소크라테스가 남긴 교훈에 대해서도 플라톤과는 궤를 달리한다. 크세노폰에게 각인된 교훈은 리더의 절제였다. 소크라테스는 쾌락, 감정,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리더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도 리더에겐 엄격한 잣대를 적용한다. 젊은 크세노폰이 항의하자 소크라테스는 이런 식의 비유를 든다. “와인 한잔을 마시고 싶다는 욕구는 별것 아닌 욕구다. 그러나 사령관이 와인 한잔을 마시고자 자리를 비우는 것은 다르다.”

인간은 탐욕과 쾌락에 사로잡히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된다. 크세노폰은 페르시아 전역에서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떠올리고 그의 혜안에 감탄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작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반면에 절제의 교훈은 아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리더라는 자리가 막중한 책임감 또는 권력 덕분에 절제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로 이해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갑질논란도 절제의 가치를 소홀히 한 탓이다. 소크라테스는 리더의 교육에서 제일 중요한 항목이 절제의 훈련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