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멜 장군은 최전선에서 부대를 이끄는 정열적인 지휘관이었다. 하지만 전투에서 공을 세우겠다는 욕심이 지나쳐 상부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나중에 독일군 전체에 커다란 부담이 돼서 돌아왔다. 사진 위키피디아
로멜 장군은 최전선에서 부대를 이끄는 정열적인 지휘관이었다. 하지만 전투에서 공을 세우겠다는 욕심이 지나쳐 상부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나중에 독일군 전체에 커다란 부담이 돼서 돌아왔다. 사진 위키피디아

제2차세계대전 당시 활약한 장군 중 생각나는 이를 떠올려보자. 대부분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조지 스미스 패튼,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등 승전국 장군들일 것이다. 이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데다 각종 매체를 통해 활약샹이 많이 알려져 있어서 그만큼 인지도가 높다. 대중에게 승장이 많이 알려져 있는 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패전국 장군 중에서도 인기를 누리는 인물이 있는데, 독일의 에르빈 로멜 장군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패전국인 독일 장군이지만 국내에서 전기를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만큼 잘 알려진 인물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 물어보면 정확히 아는 이가 그다지 많지는 않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해서 누구나 뛰어난 장군으로 여길 만큼 잘 싸웠다는 점만큼은 틀림없다.

로멜 장군은 1941~1942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활약하며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됐다. 이 당시 전투가 그를 신화의 반열에 올려놨다. 하지만 전쟁사나 전략, 전술을 연구하는 이들로부터는 생각보다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전쟁의 전체적인 판을 놓고 보면, 두고두고 곱씹어 볼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소련 침공을 결심한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1940년 후반부터 군비 대부분을 동부전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군과 동맹국군의 병력은 총 380만 명에 달했다. 바로 그때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식민지인 리비아 오른쪽에 있던 이집트를 욕심냈다. 이집트에는 영국 원정군 3만 명이 주둔 중이었다. 이탈리아가 이집트를 침공하는 것은 영국과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 본토는 잇달아 독일의 폭격을 받던 중이었다. 무솔리니는 영국 본토가 시달리고 있던 바로 그때가 이집트를 침공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영국 병력 규모인 3만 명보다 8배나 많은 24만 명의 병력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1940년 9월 13일 이집트 침공을 명령했다. 이탈리아군이 영국군을 손쉽게 무찌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의견이 우세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영국군이 반격에 나서면서 1개월 만에 900㎞를 돌파해 24만 명의 이탈리아군을 무너뜨린 것이다. 게다가 영국군은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 근처까지 진격해 왔다. 이 같은 상황이 이곳에 전혀 관심 없던 히틀러의 시선을 끌었다. 히틀러는 아프리카의 영국군을 응징하고, 이탈리아를 구원해 추축국(제2차세계대전 당시 연합국과 싸웠던 독일·이탈리아·일본 등이 형성한 국제 동맹) 사이에서 서열 관계를 확실히 하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히틀러는 1941년 1월 전격적으로 아프리카에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결정했다. 이때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군단장 로멜 장군에게 “패퇴 중인 이탈리아군을 도와 트리폴리만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은 소련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었기에 이 같은 소극적인 전략은 너무 당연한 결정이었다. 원정을 떠나는 병력 규모는 당시 독일군 전력의 1%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야심가였던 로멜 장군은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트리폴리에 도착한 직후인 3월 24일부터 공격에 나서 불과 2주 만에 영국군을 1000㎞나 밀어붙였다. 예상치 못한 놀라운 성과에 히틀러는 흥분했고, 독일 선전매체는 대대적으로 로멜 장군의 승리 소식을 알렸다. 하지만 로멜 장군의 행위는 방어에 전념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어긴 것이었다. 독일에 이 승리는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됐다. 


눈앞의 이익만 좇다 낭패

만일 로멜 장군이 전쟁 초반에 졌다면, 독일 최고사령부는 항명을 이유로 로멜 장군을 단죄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멜 장군은 이후에도 잇달아 승리했고, 독일 최고사령부는 이 승전보를 계속 선전 수단으로 이용해야 했다. 결국에는 최고사령부가 로멜 장군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로멜 장군의 끊임없는 돌격으로 북아프리카 전선이 애초 계획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나게 확대되자 최고사령부는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지원을 늘렸다.

군인이 전선에 나간 이상 승리는 당연한 의무다. 거기다가 약한 전력으로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상대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는 승리는 두고두고 칭송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아군 전체에 부담을 안겨주거나, 명령이나 지시를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벌인 전투라면 상당히 곤란한 것이 된다.

독일과 소련 전쟁이 점차 격화되는 와중에 로멜 장군의 보급품 요구는 갈수록 늘어났다. 결국 독일은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수 없게 됐고, 1943년 5월 9일 튀니지까지 밀려난 후 30만 명이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히면서 항복했다. 로멜 장군은 자신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독일은 전쟁에서 패했다.

만일 로멜 장군이 최고사령부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다면 전쟁사에 크게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로서는 분명히 좋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로멜 장군의 아프리카 군단은 3년간 1000㎞ 전진, 1000㎞ 후퇴, 1200㎞ 전진, 1800㎞ 후퇴를 시소처럼 반복했다. 로멜 장군의 부대는 전력과 자원을 엄청나게 소모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패했다.

2018년 7월 4일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기내식 대란 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박 회장이 외연 확대를 위해 무리하게 대한통운, 대우건설 인수를 추진해 그룹 전체를 위기에 빠지게 했던 것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불러온 원인으로 지목된다. 사진 김연정 조선일보 객원기자
2018년 7월 4일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기내식 대란 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박 회장이 외연 확대를 위해 무리하게 대한통운, 대우건설 인수를 추진해 그룹 전체를 위기에 빠지게 했던 것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불러온 원인으로 지목된다. 사진 김연정 조선일보 객원기자

경영에서는 이와 유사한 사례를 더 많이 살펴볼 수 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공격적으로 외연만 늘려가다가 낭패를 보는 사례는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국내에서 그로 인해 나타났던 문제점들의 총합이 1997년에 있었던 외환위기였고, 이를 기회로 많은 기업들이 뼈를 깎는 체질 개선에 나섰다.

이처럼 초유의 국난을 겪었음에도, 지금도 여전히 미시적인 성과에만 집착하다 내상을 입는 기업들이 여전히 많다. 욕심으로 인한 결과는 사용자뿐 아니라 노동자, 관련 기업을 넘어 국가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로멜 장군의 욕심과 이로 인해 눈덩이처럼 불어난 실패의 여파는 경영자라면 항상 반면교사 삼아야 할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