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후반의 김 대표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얼마 전까지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틀에 박힌 직장 생활에서 한계를 느낀 그는 최근 가깝게 지내는 선후배들과 함께 금융 관련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창업 초기 업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김 대표는 전문성도 키우고 해외에 있으며 소홀히 했던 한국 네트워크를 쌓기 위해 뒤늦게 학업을 시작했다. 창업에 공부까지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시간이 빠듯했다. 그는 남들보다 조금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잠 때문에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 같아 고민이라고 했다.


감정에 대한 기억은 잠으로 빨리 지워져

“하루에 3시간만 자도 정신을 멀쩡히 해 주는 약은 없나요?” 병원을 찾은 김 대표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답변은 ‘그런 약은 없다’는 것이다. 특별한 체질을 가진 경우에 하루 3시간 자면서 일을 잘할 수는 있어도 3시간 자면서 공부를 잘하기는 어렵다. 공부는 기억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잠을 자야 기억이 단단해진다.

잠은 꼭 필요하다. 에너지 비축과 효율적 사용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설명하지만 정말 잠이 필요한 이유는 뇌를 위해서다. 산화물질이나 노폐물을 제거하여 뇌를 보호하고 기억을 단단하게 저장하기 위해서는 잠이 꼭 필요하다.

잠은 크게 눈동자를 빨리 움직이면서 자는 렘수면(REM Sleep·Rapid Eye Movement Sleep)과 그렇지 않은 비렘수면으로 구분된다. 잠이 들면 I, II, III, IV단계의 비렘수면이 지나고 렘수면에 들어가며, 하나의 수면 주기는 약 90분에서 110분간 정도다. 자는 동안 이런 수면 주기가 4~5차례 지나간다.

수면 주기가 반복될수록 깊은 단계의 비렘수면이 줄어들고 렘수면이 길어진다. 렘수면에서 뇌파는 깨어 있으면서 쉬는 상태의 뇌파와 비슷한 모양을 나타내며 대부분의 꿈은 이 기간에 많이 꾸게 되고 이때 잠에서 깨면 생생하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기억 중에서도 본인이 경험한 사건에 대한 기억이나 의미를 가지는 기억은 의식이 있고 깨어 있는 동안 머리에 등록되고 정리되지만, 기억으로 저장되기 위해서는 기억의 경화라는, 기억을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 필요한데 주로 비렘수면 동안 일어난다. 반면에 수순이나 절차가 필요해 몸이 익혀야 하는 기억이나 원초적 반응에 관계되는 기억은 주로 렘수면 기간에 단단해지며 의식과 관계없이 반응한다.

공부는 의미를 기억해야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잠을 충분히 자야만 기억이 오래 간직된다. 의미를 기억하는 데는 반복이 필요하며 일단 기억되면 오래 유지된다. 사건에 대한 기억은 쉽게 하지만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잠으로 기억이 단단해지는 것과 달리 감정에 대한 기억은 잠으로 빨리 지워진다. 공부를 잘하려면 충분히 자야 하지만 발레나 운동을 익히기 위해서는 렘수면 기간이 길어야 기억이 단단해지므로 공부를 오래 하는 것보다 잠을 더 많이 자는 것이 좋다.


▒ 김철수
연세대 의대 졸업, 가정의학과 전문의, 경희대 한의학과 졸업, 한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