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속 풍경을 연상케하는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의 설경. <사진 : 이우석>
동화속 풍경을 연상케하는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의 설경. <사진 : 이우석>

중유럽 슬로베니아는 내게 원래 큰 존재감이 없었다. 일년에 한두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오해는 모르는 새 성장하기 마련. 발칸반도는 늘 위협이 도사린 분쟁지역, 그 중 슬로베니아는 작고 미미한 나라라는 인식이 있었다.

종전 60년 만에 강남 테헤란로에 온 한국전 참전용사도 똑같은 심정이었을 것 같다. 막상 슬로베니아에 발을 디딘 순간, 오해와 편견은 사르르 부서져버렸다. 슬로베니아 수도는 류블랴나(아마 처음 들어본 이도 많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항공을 통해 이곳에 오지 않았다. 봄눈 많이 내리던 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부터 입국했다. 유럽 여행은 점이 아닌 선형으로 이뤄지는데 이 중 잘츠부르크와 슬로베니아 블레드 지역은 최고 여행 루트를 완성하고 있다.


그림같은 블레드 호수와 성당

입경은 간단했다. 여권 따윈 미리 꺼낼 필요도 없었다. 충북 제천에서 강원 영월 가듯, 길을 따라 고개 하나만 넘었더니 슬로베니아다.

4월, 한국엔 봄이 왔지만 이곳은 아직 겨울의 막바지다. 차창이 온통 하얗게 변할 만큼 많은 눈이 내렸다. 빌라 블레드에 도착했다. 슬로베니안들의 자랑인 블레드(Bled) 호숫가에 세워진 호텔이다. 원래 티토 전 대통령의 별장으로 지었다. 2004년 정부가 이 별장을 호텔로 개조했다.

설경이 무척 아름답다. 동화책 속 그림이다. 호수 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그 위에는 조그마한 성당이 하나 서있다. 섬과 빌라 블레드를 오가는 배 그리고 누가 풀어놓은 게 분명한 백조 한 쌍까지. 아!

유럽인들은 가장 가고 싶은 허니문 여행지로 이곳을 꼽는다. 대부분 땡볕 해변가로 떠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선택이다.

배를 타러 갔다. 작은 거룻배 플레타나는 화석연료 동력이 아니라 사공이 노를 젓는다. 보트 운행을 시작한 1886년 조합을 결성해 반드시 블레드 지역 사람만, 그것도 꼬박 삼년을 연습해야 뱃사공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덕분에 지금껏 사고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곳이 왜 허니문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는지 금세 깨달았다. 보트 안에서 가이드는 감미로운 세레나데를 불러줬으며, 도착해서 성당까지 이르는 사랑의 계단을 신부를 안고 올라야 한다고 귀띔했다.

사랑의 계단은 99개. 신랑이 새 신부를 안고 계단을 올라야 한다는 전통은 아마도 ‘생각보다 거친 결혼 생활을 이겨낼 힘’을 미리 단련하거나, 하체를 단련해 ‘금슬 좋은 부부 생활을 가지라’는 배려인 듯하다.

1142년에 처음 지어진 이래 여러 차례 지진에 무너졌다가 1747년에 개축한 성 마리아 성당. 성당은 테마파크처럼 근사하다. 동화책을 펴면 튀어나오는 팝업북처럼 생겼다.

성당 안에는 7유로를 내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종이 있다. 무거운 종에 달린 밧줄에 모든 체중을 실어 당기면 “뎅뎅” 사랑과 소원을 담은 종소리가 호숫가로 번져나간다.


슬로베니아 전통 복장을 입은 아이들. <사진 : 이우석>
슬로베니아 전통 복장을 입은 아이들. <사진 : 이우석>

사랑스럽다는 뜻 가진 도시 ‘류블랴나’

슬로베니아는 중유럽의 아름다운 정취 속 고풍스러운 중세 건물로 가득한 발칸반도의 중심 국가 중 하나다. 가장 유명한 곳은 포스토니아 동굴이다. 총 21㎞의 석회동굴로 이 중 5㎞를 공개했다.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동굴로 꼽힌다. 1872년 동굴에 관람용 철도가 놓였다. 전기도 1883년에 일찌감치 들어왔다. 동굴 입구에는 증기기관차를 타고 동굴을 관람하는 관광객들의 흑백 사진이 붙어있다.

동굴을 돌아보는 시간은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입구에서 가이드 헤드셋을 받아들었다. 한국어도 있다. 크로아티아와 더불어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곳이 이곳 발칸반도다.

지붕이 없는 탐사 열차를 타고 동굴에 들어간다. 종유석에 머리를 부딪힐 듯 아슬아슬 스릴 넘친다. 열차에서 내리면 아주 근사한 탐방로가 있다. 데크를 따라 걸으며 각양각색의 종유석과 석순, 석주들을 볼 수 있다. 헤드셋에선 종유석과 석순의 이름에 대한 설명이 흘러나온다.

동굴 안에는 명물이 있다. 작은 뱀처럼 생겼는데 빛을 못 봐서 그런지 하얗다. 유리관에 넣어서 보호하고 있다. 이름은 올름(Olm)인데 뭘 먹고 사는지는 모르겠다.

한시간쯤 걸었을까. 거대한 홀이 나온다.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구멍이다. 보통 영화 속에선 이런 곳에 보물선이 있지만 이 동굴 안에는 기념품 숍이 있다. 이곳으로부터 다시 열차를 타고 나오면 된다.

류블랴나로 향했다. 발칸의 요충지로 로마시대에 생겨난 군사도시로 전쟁 때문에 번성한 도시지만 역설적으로 류블랴나(Ljubljana)란 이름은 러블리(사랑스럽다)라는 뜻이다. 연인들의 여행지로 딱이다. 슬로베니아의 관광 슬로건은 ‘사랑’이다. 국가명(SLOVENJA)에서 ‘S’와 ‘NJA’를 떼내면 가운데 러브(LOVE)가 남는다.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류블랴나 성을 둘러봤다. 곳곳을 지날 때면 기사와 군인, 수녀, 수감자 등 시대순으로 분장을 한 배우들이 갑자기 나타나 서로 연기를 하며 성의 역사를 들려준다.

한때 감옥으로 쓰였다는 성 꼭대기에는 근사한 레스토랑이 있으며 이곳에서 시내를 둘러볼 수 있다. 유럽 중세도시가 대개 그렇듯 중심에는 맑은 강이 흐르고 강변을 따라 시장과 카페가 위치했다.

슬로베니아의 4월은 아직 차갑지만 새하얀 겨울의 낭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시원한 곳에서 서로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커플에게 이 하얀 나라는 최고의 여행지가 될 듯하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여행기자협회 회장, 14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국가정보 유럽연합(EU)가입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으며 바다(아드리아 해)를 살짝 낀 내륙국가다. 전략적 요충지로 지정학적 가치가 있다. 1991년 유고연방으로부터 가장 먼저 독립했다. 면적은 약 2만㎢로 경상북도만 하다. 1인당 GDP는 2만4000달러. 국가 상징은 서양 용이다. 박쥐 날개와 불을 뿜는 입, 날카로운 독수리 발톱을 가지고도 늘 기사에게 당하는 그 용이다.

터키항공 국내에서 류블랴나로 가는 직항은 없다. 스카이트랙스(Skytrax) 평가 2011~2014년 4년 연속 ‘유럽 최고의 항공사’에 선정된 터키항공(www.turkishairlines.com)의 연결편이 좋다. 인천~이스탄불 구간을 주 11회 운항하고, 이곳에서 류블랴나(2시간 15분)로 매일 직항이 있다. 크로아티아까지 연계하는 것도 좋지만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슬로베니아로 넘어가는 여행 루트도 꽤 좋다. 블레드에서 류블랴나는 약 55㎞.

호텔 빌라 블레드(www.vila-bled.si), 류블랴나 더 플라자(www.plazaghotel.s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