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잡은 은빛 멸치를 유자망 그늘에서 털어내는 ‘멸치털이’ 작업 모습. <사진 : 이우석>
갓 잡은 은빛 멸치를 유자망 그늘에서 털어내는 ‘멸치털이’ 작업 모습. <사진 : 이우석>

오월 만춘. 바다에도 봄이 무르익었다. 허나 계절을 향한 미로의 끝은 아직 남쪽으로 향해 있다. 미세먼지를 피해 떠나는 남쪽 최대 도시 부산으로의 ‘피난’ 행렬은 즐겁기만 하다.

동부산의 북쪽 끝자락 기장군. 부산광역시에서 가장 큰 행정구역으로 미역과 멸치, 곰장어(먹장어)로 유명한 고장이다. 지금쯤 가면 서늘한 바닷바람이 섞인 봄 멸치의 맛과 멋을 만끽할 수 있다. 살아 펄펄 뛰는 작은 생명의 내음은 오히려 상큼하게 느껴진다. 마천루가 우뚝 선 부산이지만 기장군만큼은 어촌마을의 정취가 강하게 풍긴다. 특히 이맘때면 바닥에 옥구슬을 깔아놓은 듯 푸른 바다로부터 튀어오르는 멸치가 봄소식을 전한다. 가히 ‘꽃보다 멸치’라고 부를 법하다. 비록 잠시 떠나왔지만 기장 대변항 옥빛 바다 앞에 서있노라면 다시는 매캐한 도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물에서 멸치 털어내는 모습 ‘장관’

“올해는 메루치(멸치)가 밸로(별로) 없네예.” 어구를 챙기던 어부는 빈 그물이 밉고 야속하기만 하다. 수온은 제법 따뜻해졌지만 멸치잡이 어부의 만선 꿈은 그리 녹록지 않다. 해풍에 검게 그을린 어부에게 멸치는 어느 봄꽃보다 곱다. 흐드러진 이팝나무 꽃처럼 남쪽바다 물속에는 멸치 떼가 곧 흩날릴 게다. 깊게 팬 입가 주름 속으로 파고드는 봄바람처럼.

부산을 시계 반대쪽으로 돌면 기장(機張)이 나온다. 남해에서 동해로 가는 길목이다. 기장군은 천혜의 해산 자원과 군사적 요충지를 가진 항구로, 예부터 번성했다.

이곳에 만춘의 전령사 멸치(멸어·蔑魚)가 있다. 이름하여 대변(大邊)항. 이름이 주는 이상한 뉘앙스와는 달리 맑고 고운 물을 담뿍 담은 오목한 항구다. 4~5월 대변항에는 누군가 멋진 솜씨로 제련한 은빛 고기들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튀어오른다. 이 멋진 풍경을 보기 위해 매년 이맘때면 많은 출사객(出寫客)과 관광객이 멸치떼처럼 몰려든다. 태양이 누런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오후 4시부터 멸치조업을 나섰던 배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들어온 배는 곧장 유자망 그물에서 멸치를 털어내는 ‘멸치털이’ 작업을 하는데, 장관이다. 만선이 돼야 멸치털이를 볼 수 있기에, 귀하기도 하다. 검푸른 바다로부터 끌어올려진 그물을 부여잡은 어부들이 구성진 구령에 맞춰 탕탕 떨어내면, 사방으로 은빛 생명이 튀어나간다. 살점이, 땀방울이 튄다. 펄펄 뛰던 강한 생명력이 마지막으로 발하는 고혹스러운 광택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 세상에 외치고 싶은 그들만의 몸사위. 어부의 굵은 땀방울과 함께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는 봄 멸치의 아름다운 갈라쇼는 저무는 해와 함께 슬며시 꺼져버리고, 세상이란 무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음 막을 준비한다.

해는 저물고 멸치 배의 시동도 꺼졌지만 살점 보드라운 멸치는 내일의 따가운 햇살에 미라가 돼 또 다음 세상을 만날 준비를 한다. 밥상 위 국과 찌개에서 깊은 바다 맛을 내주는 멸치는 멋진 생의 책임을 다하고 사라진다. 무심코 뜬 국 한술을 두고 멸치의 은덕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기장 대변항에는 5월까지 가장 맛이 좋다는 봄 멸치를 신선한 회로 맛볼 수 있다. <사진 : 이우석>
기장 대변항에는 5월까지 가장 맛이 좋다는 봄 멸치를 신선한 회로 맛볼 수 있다. <사진 : 이우석>

최상급 치즈 같은 식감 멸치 구이

뱀처럼 구불구불한 도로를 달린다. 창문을 여니 바다의 향이 그대로 차 안으로 들이닥친다. 미세먼지에 숨 막히는 도시를 벗어난 기분, 이리도 즐겁다. 좁은 실내를 금세 가득 채운 봄 바다의 숨결은 향긋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처럼 느껴진다.

풍경 또한 아름답다. 이런 바다가 따로 없다. 물 위로 삐죽삐죽 솟아난 기암괴석, 수석(壽石)을 풍덩풍덩 던져 넣은 듯한 동해안의 유려한 지형이 빛깔 고운 남쪽 바닷물과 만난다. 강원도 고성에서 내려와 속초, 경북 울진·영덕·경주를 지나 남해와 손바닥을 겹치는 곳이다. 부드럽고도 씩씩하다.

고즈넉하던 항구의 정취는 오후가 돼 가끔씩 들어오는 관광버스와 멸치 배를 만나며 다시 힘차게 뛴다. 선캡의 아줌마 부대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갯가에 늘어선 좌판으로 달려든다. 갑자기 왁자지껄해진다. 노상에서 멸치를 구워 파는 집. 아직 말리지 않아 어른 중지만한 대멸을 석쇠에 올려 구워낸다.

5월까지 가장 맛이 좋다는 봄 멸치에 기름 방울을 떨구면 치익 흰 연기를 피워올리며 근사한 향기를 사방에 풍긴다. 석쇠에 올리면 지방이 배어나오다 다시 보드란 살 속으로 스며들어 고소한 맛을 낸다. 명품 앤초비처럼 고소하고 식감은 최상급 치즈 같다. 원래 임금님 진상품으로 올릴 만큼 명품으로 소문난 기장 멸치는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회(무침)로도 먹고 구워도 먹는다. 회를 떠서 싱싱한 봄 채소와 함께 무쳐놓으면 보기만 해도 그렁그렁 침이 고인다. 청어 과메기처럼 기름 많고 가무잡잡한 멸치 살이 눅진한 치즈처럼 혀 위에서 슬슬 녹아든다. 채소는 놔두고 살만 골라먹어도 비린내가 없을 정도로 싱싱하다.

찌개도 좋다. 배초향(방아잎)을 넣어 청량한 맛을 낸다. 미나리 등 봄 채소를 한가득 넣으면 그야말로 봄이 한가득 냄비에서 끓는다. 기장의 봄은 참 입맛 다시게 만든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여행기자협회 회장, 14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가는 길 서울에서 가려면 부산은 열차 편이 좋다. 부산역도 좋고 울산역도 기장과 가깝다. 울산역은 서울역에서 2시간 10분이면 도착한다. 렌터카를 빌리면 더욱 편리하다.

둘러볼 만한 곳 기장 해안 곳곳과 청사포, 달맞이 고개, 해운대를 잇는 7번 해안도로는 명품 관광 로드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해안 사찰인 해동 용궁사와 수많은 바위섬, 등대 등 절경의 파노라마가 끝도 없다.
기장군과 해운대 끝자락 사이에는 달맞이 고개가 있다. 그야말로 바다에 뜬 달을 보기 좋은 곳이라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굽이치는 고갯길과 푸른 바다가 만나는 언덕에서 환상적인 야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달맞이 고개 ‘문탠로드(달빛을 쐬는 길)’는 해월정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해송 숲으로 내려가 바다를 끼고 슬쩍 돌아가는 코스에는 최소한의 불빛만이 들어와 길을 밝힌다. 밤중에 걷는 길이라 여느 도보여행 코스와는 또 다르다. 약 2㎞(소요시간 30~40분).

먹거리 당연히 멸치가 으뜸이다. 좌판에서 썰어먹는 회도 맛있고, 무침·구이·찌개까지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남해 미조항도 멸치로 유명하지만 물이 깊고 물살 빠른 동해 청정해역에 사는 동해 대멸은 기장 대변항이 가장 유명하다. 멸치볶음과 멸치조림으로 쓰이는 소멸, 중멸과는 달리 유자망으로 잡는 대멸은 크기 덕에 여러 조리법으로 맛볼 수 있다. 대변항에는 멸치 횟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 대변항 용암할매횟집은 봄 멸치를 다양한 방법으로 즐길 수 있는 곳. 4인 가족이 간다면 멸치회 작은 것 하나에 구이 하나 그리고 찌개 작은 것을 시켜먹으면 적당하다. (051)721-2483. 기장군은 멸치뿐 아니라 미역과 다시마, 곰장어도 유명하다. 대변항 동부산 특산품 직판장에선 미역과 멸치 등 건어물을 저렴하게 판매한다.(051)703-6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