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전무는 하루하루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바쁜 와중에 잊지 않고 친목 모임에 나갔더니 약속 장소에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모임 총무에게 전화했더니 약속이 오늘이 아니고 다음 달이라고 했다. 요즘 들어 K 전무는 이런 일을 자주 겪는다. 실수로 여기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어딘가 불안해 의사인 친구를 찾아가 걱정된다고 말했더니 “하는 일이 너무 많고 바빠서 생기는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뇌에 과부하가 걸려서 잠시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럴 때는 객관적으로 이상이 있다는 근거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건망증은 속에서 병이 크고 있는 상태

아직 병으로 진단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이상이 없는 것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속에서 병이 크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K 전무와 같은 경우 뇌에 매우 중요한 시기를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으므로 관심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 병이 치매라면 문제가 된다. 증상이 아예 없거나 증상이 있더라도 단순 건망증 정도로 심각하지 않으며, 검사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 상태는 알츠하이머 치매의 7단계 중 첫 번째 단계인 ‘임상적 정상 기간’에 해당된다.

조금 더 진행이 되면 기억력이 떨어진다. 일이 바쁘지 않아도 뭐든지 잘 잊어버린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느낀 것보다는 심하다. 그래도 증상이 심하지 않아 주위 사람들이 눈치챌 정도는 아니다. 이를 ‘주관적 경도인지장애’라 하고, 7단계 중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K 전무는 첫 번째 단계이거나 두 번째 단계일 수 있다.

더 진행이 되면 가족이나 자주 만나는 사람의 눈에도 기억력이 떨어진 것이 보인다. 7단계 중 세 번째 단계인 ‘객관적 경도인지장애’다.

기억력이 많이 떨어져서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사회생활을 할 수 있고 직장생활도 가능하다.

치매 초기는 기억력 장애가 생기고 인지기능도 나빠져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어진다. 이는 7단계 중 네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치매 중기는 다섯 번째 단계, 말기의 전반부는 여섯 번째 단계, 말기의 후반부는 일곱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이미 치매인 경우에는 자신의 병을 인식하거나 대처하는 능력이 없다. 치매가 되기 전에 자신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첫 번째 단계 중에서도 단순 건망증의 빈도가 잦아졌는지, 두 번째 단계처럼 단순 건망증으로 보기에는 기억력 저하가 심해졌는지, 가족이나 자주 보는 사람이 걱정하는 세 번째 단계 수준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젊은 시절 나와 비슷했던 친구들과 비교해볼 때 지금 나의 기억력은 좋은 편인지, 최근에 평소와 달리 기억력이 많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는 물론 첫 번째 단계에 속하더라도 단순 건망증이 심해지면 치매로 가는 길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특히 나이가 젊다면 치매의 단계별 증상을 인지하고 치매에 대한 적극적인 예방에 나서야 한다.


▒ 김철수
연세대 의대 졸업, 가정의학과 전문의, 경희대 한의학과 졸업, 한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