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섬세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여인들의 성’으로 불리는 슈농소성의 야경. <사진 : 이우석>

처음엔 눈이 온다고 깡총 뛰었지만, 나날이 창백한 겨울로 깊숙이 들어서니 이도 저도 흥이 나지 않는다. ‘연말연시’라고들 하지만 사실 흥겨운 건 ‘연말’이다. ‘연시’는 차분하고 근면하기를 강요한다. 새로운 건 신년 달력뿐이다. 성탄 불빛이 사그라든 겨울의 사부능선에서 모두 열심히 걷고 달리는 모습뿐이다.

아직 아쉬워하고 있는 내게 새해를 맞아 조금 사치스러운 선물을 하면 어떨까. 이런 마음가짐의 여행이라면, 프랑스 파리 남서부 평원으로부터 대서양까지 이어지는 검은 루아르 강물 줄기를 따라 여행해 볼 것을 권한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생제르맹 뒷골목을 걷고 ‘프랑스의 젖줄’ 루아르강을 따라 서남부 너른 들녘을 한번 훑어 보고 오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기적의 성장으로 순식간에 옛 모습을 지워버린 아시아 대도시에 사는 이에겐, 더디게 변해가는 나라에서의 짧은 일상이 많은 영감을 줄 수 있을 테니까.


루아르 강물 따라 흐르는 시간여행

프랑스 하면 누구에게나 센(Seine)강이 가장 유명하지만, 실제 유럽 최대 농업 국가 프랑스의 젖줄로 꼽히는 것은 바로 루아르(Loire)강이다. 프랑스의 중앙평원으로부터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동남부 고원에서 발원, 중남부 지역에서 품질 좋은 포도를 키우고 고성의 그림자를 비추며 유유히 1020㎞를 흘러 낭트 하구에서 비로소 바다와 만난다.

물길을 따라 농원과 도시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유럽 최대 식량 수출국인 프랑스의 풍요는 바로 루아르강이 주는 선물이라 할 수 있다. 파리에서 서남부 방향으로 고속도로를 타면 루아르 강변을 따라가는 ‘프랑스의 정원’ 여행루트를 만날 수 있다.

유럽에도 이처럼 너른 평원이 있었던가. 가느다란 파이프로 만든 수차만이 뚝뚝 선 넓은 지평선이 펼쳐진다. 서너 시간을 달리면 사르트르, 블루아, 오를레앙 등 제법 규모가 큰 중세 도시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지역은 바로 ‘루아르 계곡’. 도시뿐 아니라 80여 개의 고성이 있어 프랑스 고성 투어의 대표 코스로 꼽힌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도 등재됐다.

높낮이가 없어 이렇다 할 계곡 지형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평원으로부터 쑥 꺼져든 강을 계곡이라 부르는 듯하다. 숲과 평원이 함께 펼쳐지고 늘 일정 수량의 물이 흘러 밀과 과일 농사에 적합해 풍요 속 권력을 과시하던 왕과 귀족의 사냥터로 쓰였다.

그래서 성이 생겨났다. 베르사유 궁전의 모태가 되었다는 샹보르성을 비롯, 아제 르 리도성, 슈농소성, 앙부아즈성에는 당시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자랑했던 프랑스 왕가의 권위와 위엄이 잔뜩 서려 있다.

샹보르성은 140여 년간 지어졌다. 당시 문화적으로 가장 융성했던 이탈리아 밀라노 공국을 굴복시켰던 프랑수아 1세가 1519년 짓기 시작했다. 프랑스 전통 중세 양식에다 이탈리아 고전주의 건축미를 더했다.

프랑수아 1세는 수많은 이탈리아의 장인들을 불렀다. 도메니코 다 코르토나가 디자인했지만, 세를 과시하기 위해 계속 수정했다.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앙부아즈 인근 클로뤼세성에 살며 건축에 참여했다. 이후 루이 14세는 이를 증축, 무려 440개의 방을 만들어 태양왕의 위세를 과시했다.

테라스에 오르면 해자(垓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와 정원, 숲까지 이르는 탁 트인 전망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방마다 성의 역대 소유주들이 사용했던 그림과 조각, 당구대, 카지노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성을 둘러싼 숲도 정원도 모두 아름답다.

샤를 8세 때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은 앙부아즈성 역시도 다빈치와 관계가 깊다. 프랑스에서 노후를 보내던 다빈치는 강변 언덕에 위치한 앙부아즈성 인근 클로뤼세에 살며 헬리콥터와 자전거 등 각종 기계를 설계했으며 자신 역시 성의 뒤편 교회에 잠들어있다.



‘미식 골목’으로 불리는 몽파르나스 거리의 레스토랑. <사진 : 이우석>

겨울비 내리는 파리 뒷골목의 미식 순례

한국의 상가마다 입점한 ‘파리○○○’ 빵집 때문인가. 프랑스 하면 크루아상, 바게트 등 맛있는 빵과 향긋한 와인 그리고 마카롱, 카페오레 등 달달한 먹거리가 연상된다.

하지만 프랑스는 그 외에도 자랑거리가 퍽 많다. 비싼 가방과 원자력 발전은 워낙 산업계에서 유명하고 라팔 전투기, 에어버스 항공기, 테제베 고속철도 등 프랑스산(産)으로 이름을 알린 것이 즐비하다.

이 중 프랑스인들이 정작 제일로 꼽는 것은 다름 아닌 파리다. 자존심 세고 여유로운 현지인의 소소한 일상을 함께 해보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여행의 매력 중 선두로 꼽히게 마련이다. 파리를 찾는 이들이면 보통 에펠탑과 루브르 박물관, 노트르담 성당, 몽마르트 언덕,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 등을 차례로 순례한다.

이들 명소 이외에 파리의 좁은 뒷골목들도 재미가 가득 넘쳐난다. 맛난 해산물 식당이 많아 ‘미식 골목’으로 꼽히는 몽파르나스와 식민지 시절 베트남인들이 건너와 거주하기 시작하며 형성한 차이나타운도 우리에게 익숙한 파리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얼굴이다.

파리 외곽에 현대식 건물들로 가득찬 신도시 라데팡스는 파리의 미래를 보여주는 곳이다. 라데팡스는 파리 서쪽으로 샹젤리제의 축선으로 놓인 주상복합 신도시다. 멀리 일직선으로 개선문이 보이며 대칭점에 신개선문이 우뚝 서 있어 이곳이 파리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곳임을 알리고 있다.

흔히 ‘소대(소르본대) 입구’라 불리는 파리 4대학(옛 소르본대) 인근 생미셸부터 생제르맹 거리에 이르는 골목도 먹거리, 볼거리, 쇼핑거리가 넘쳐난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보봐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곳으로 유명한 ‘카페 뒤 마고’에 앉아 마시는 카페오레 한잔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 맛보는 커피보다 더욱 진한 의미의 향을 풍긴다.


▒ 이우석
성균관대 미술교육학과, 여행기자협회 회장, 14년째 여행·맛집 전문 기자로 활동 중


여행수첩

가는 길 파리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에어프랑스 등 취항편이 많아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스케줄을 제공한다. 파리에서 루아르 지역으로 고성 여행을 할 때는 철도보다는 렌터카가 편리하다. 성들이 도심보다는 외곽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숙박 가능하다면 루아르 지방에서 민박을 이용할 것을 권장한다. ‘지트 드 프랑스’로 알려진 프랑스의 민박 체계는 가입 농가가 무려 5만6000곳으로 잘 갖춰진 데다 호텔에 비해 무척 저렴하다. 게다가 오래된 농가의 정취까지 즐길 수 있어 분위기는 오히려 낫다.

이우석 스포츠서울 여행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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