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욱과 남상미 주연의 드라마 ‘빛과 그림자’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순양극장’. 1960~70년대 거리를 재현한 순천 드라마세트장 안에 있다. <사진 : 이우석>

‘여순광’, 여수와 순천·광양 이 세 도시는 한 묶음이다. 원래 각각의 색을 지녔지만 지금은 이순신대교와 남해고속도로, 순천~완주고속도로를 통해 근사한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한려수도를 출발점으로 멋진 섬을 360여 개나 가진 여수반도, 대한민국 대표 습지 순천만과 전통미 가득한 낙안읍성을 품은 순천 그리고 기세 좋은 호남정맥의 꼭지 백운산과 넉넉한 섬진강을 안은 광양. 이 ‘여순광’이 ‘여행 클러스터’로 입소문을 떨치고 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 계절을 난다. 여순광에 봄이 상륙했다. 샛노란 봄볕 아래 삼합(三合)을 구성하고 있다고 해서 다녀왔다. 아! 이번에는 순천에만 갔다. 여순광의 가운데 토막이다.



순천 괴목식당의 순대와 수육. <사진 : 이우석>

수령 650년 넘은 매화나무도

순천은 남도 중 남도다. 다들 남도는 비슷비슷한 줄 알지만 사실 순천은 광주·목포와도 또 다르다. 서울 쪽에서 가자면 광양과 여수는 반드시 순천을 거쳐야 갈 수 있다. 그래서 학교가 발달했다. 순고(순천고)·매고(매산고) 등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전남 명문고들이 많았다. 국립대학인 순대(순천대)도 있다. 짱뚱어와 고들빼기만 유명한 곳이 아니었다.

순천에 입성했다. 많이 빨라졌다. 순천~완주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이라면 지금쯤 “뭣이 중한디”를 되뇌며 곡성을 지나고 있었을 것이다.

경칩 지나면서 계속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 노래를 불렀지만 이곳은 벌써 온풍 가득한 봄맞이가 한창이다. 사람만 몰랐다. 땅은 이미 알고 있었다. 봄은 도둑처럼 몰래 온다.

선암매를 보러갔다. 선암사 매화(천연기념물 제488호)를 따로 일러 선암매(仙巖梅)라 부른다. 천연기념물(제488호)로 지정된 선암매들은 봄이면 영화제에 온 할리우드 스타처럼 수많은 카메라에 둘러싸이는 스타다. 종정원 돌담에 우뚝 선 선암매 중 수령이 가장 오래된 것은 무려 650년 이상이다. 조선 건국 전에 자라난 나무라니 과연 따로 이름이 붙을 만하다.

보통 3월 말에 만개한다. 꽃이 있든 없든 천년 고찰 경내에 내려앉은 봄은 발길을 붙들기 충분하다. 동글동글 구멍이 뚫린 승선교(보물 제400호)를 지나 절집에 들어섰다. 뺨을 만지듯 돌담을 어루만지면 봄기운을 느낄 수 있다. 산사에 스며든 봄은 온기를 느끼게 한다. 노랑을 감춘 아침 볕이 냉기를 쫓아버린 덕이다.

입구부터 일주문까지 이르는 오솔길이 참 좋다. 길가에 쏟아지는 봄볕에 온기가 실렸다. 제법 힘 좋은 봄볕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하나하나 비춰 빛을 내고, 바닥에는 선명한 스트라이프 무늬를 새겨 이른 아침부터 매화를 찾는 길손을 반긴다.

까만색 등산복이 부끄러워진다. 이미 철이 지난 줄도 모르고. 시커먼 패딩점퍼에 얼굴만 발그레한 채 서서 색의 조화를 맞추고 있다. 봄꽃을 닮은 색색의 등산객들이 계절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틀어 송광사로 향한다.

젊은 여행객들로부터 입소문이 난 순천 드라마세트장에 갔다. 촌스러운 교복을 차려 입은 학생들이 1960~70년대의 그 거리를 누비고 있다. ‘러브-스토리’를 상영하는 순양극장 앞에도, 알프스 양화점 앞에도 심지어 청계천 판자촌에도 셀카봉들이 공중으로 치솟고 있다.

양철지붕과 누더기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하늘을 향해 쌓아올린 달동네도 있다. 아랫집 지붕이 윗집 마당이 되고 토끼굴처럼 이리저리 연결된 그런 동네를 완벽하게 복원해 놓았다. 이런 골목에 젊은 관광객이 찾아들 리 있을까 생각했지만 영화와 드라마 세트장으로 알려진 덕에 20대 여행객들로 그득하다. 저마다 ‘형아, 누나’ 교복을 빌려 입고 주인공 행세를 한다.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핀 선암사의 풍경. <사진 : 이우석>

국밥 주문하면 순대·수육은 ‘서비스’

낡은 흑백사진 앨범에나 어울릴 만한 차림새지만 ‘교련복’과 ‘세일러복’을 챙겨 입은 젊은 커플들, 그야말로 청춘(靑春)이다. 아직 어리기만 한 봄은 청춘들로부터 푸른색을 얻어 입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길목 좋은 순천은 남도땅에서 가장 들썩들썩한 곳이다. 광양·고흥·여수·장흥·강진 등에서도 물건을 보러 올 정도로 큰 시장이 많다. 대표적인 재래시장은 ‘아랫장’과 ‘웃장’. 새벽부터 활기가 넘친다. 때는 바야흐로 봄이라 묘목과 씨앗, 번쩍번쩍하게 갈아놓은 농기구가 늘어섰다.

딸기와 두릅, 머윗대가 든 바구니, 냉이와 달래만 봐도 풋풋하니 군침이 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증편이니 주전부리를 사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웃장 국밥집 골목을 갔다. 이미 입에 짝짝 붙는 시원한 국물 맛과 넉넉한 인심으로 유명세를 탄 곳이다. 돼지국밥인데 콩나물을 넣고 맑게 끓여 느끼하지 않다. 남도 인심을 실감한다.

둘이 와서 국밥 두 그릇을 주문하면 순대와 수육 한 접시를 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두툼한 고깃덩이를 씹으며 소주를 마시노라면, 하루 종일 무거운 주인을 운반하느라 지친 두 장딴지가 행복하다고 서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배를 채우고 둘러보는 봄날의 장은 만물이 깨어나는 세상 천지를 축약시켜놓은 것 같다. 이래서 봄 봄 하고, 이래서 남도 남도 한다.

이우석 스포츠서울 여행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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