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Su-15 방공 요격기. 대한항공 007편뿐만 아니라 1978년 무르만스크 상공에서 대한항공 902편을 공격해 비상 착륙시키기도 했던 기종이다. 우리와는 악연이라 할 수 있는 전투기다. 사진 위키피디아
소련의 Su-15 방공 요격기. 대한항공 007편뿐만 아니라 1978년 무르만스크 상공에서 대한항공 902편을 공격해 비상 착륙시키기도 했던 기종이다. 우리와는 악연이라 할 수 있는 전투기다. 사진 위키피디아

차에 책으로 된 지도를 비치하던 때가 그다지 먼 과거는 아니다. 낯선 곳을 방문할 때 출발 전에 지도를 보고 길을 파악했고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곳에서는 차를 멈춘 후 현지인에게 길을 묻는 행위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최신 교통 현황까지 자동으로 분석해서 최적의 코스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 덕분에 이런 모습은 사라졌다.

그래서 20여 년의 준비 끝에 2014년부터 전면적으로 실시된 도로명주소가 불필요한 사업이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제정된 이전 주소 체계가 목적지를 찾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법정동과 행정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도로명주소가 탄생했다. 의도는 좋았지만, 정작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핵심 기술은 3개 이상의 위성에서 나오는 신호를 이용해 정확한 위치를 측정하는 ‘위성 위치 확인 시스템(GPS)’이다. 여기에 통신, 정보기술(IT)이 결합하면서 빅 데이터를 신속히 처리한 후 원하는 정보를 즉시 취사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GPS는 내비게이션뿐 아니라 교통카드, 자율주행차,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 동선 추적 등 다양한 용도의 기반으로 사용된다.

이처럼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GPS는 순전히 군사적인 목적 때문에 탄생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위치에 대한 정보는 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하다. 지금도 초정밀 지도의 열람이 제한되고 국가 기밀로 취급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20세기 중반에 위성이 실용화한 이후 이를 이용해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시작됐다.

미국은 1978년부터 30여 개 이상의 위성을 궤도에 올려놓고 이를 이용해 전 지구에서 얻은 위치 정보를 군사용으로 사용해 왔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제한적으로 정보 개방이 이뤄지면서 민간에서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지금도 GPS를 운용하는 주체가 미 공군이고 보내주는 신호도 군용과 민간용으로 나뉜다.

누구나 GPS를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것은 적성국(敵性國)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오차 범위가 밀리미터(㎜) 단위일 정도로 정밀한 군용은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암호화됐다. 반면, 민간용은 고의로 정확도를 떨어뜨려 오차 범위가 5~10m 정도이고 일부 정보만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러시아, 중국 등은 독자적인 GPS 체계를 운용하고 있다.


1983년 9월 1일, 소련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격추된 대한항공 007편. 이 비극을 기화로 군용으로만 사용되던 GPS가 민간에도 개방되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1983년 9월 1일, 소련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격추된 대한항공 007편. 이 비극을 기화로 군용으로만 사용되던 GPS가 민간에도 개방되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교통카드와 환승 시스템은 GPS와 정보통신 기술의 결합으로 탄생했다. 이처럼 GPS는 실생활에 많이 사용되는 문명의 이기다.
교통카드와 환승 시스템은 GPS와 정보통신 기술의 결합으로 탄생했다. 이처럼 GPS는 실생활에 많이 사용되는 문명의 이기다.

엄청난 ‘비극’이 이끈 변화

이처럼 군사용으로 전용되던 GPS를 민간이 제한적이나마 이용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비극적인 사건 때문이다. 그것도 우리나라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참사였다. 1983년 9월 1일, 뉴욕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007편이 사할린 근처 상공에서 소련군 전투기의 공격으로 격추당해 246명 승객과 23명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아무리 냉전 시대였지만, 민간기 공격은 두말할 나위 없는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묵묵부답이던 소련은 국제 사회가 규탄을 이어 가고 속속 증거가 공개되자 5일 만에 마지못해 자신들의 행위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고 영공을 침범한 007편을 정찰기로 오인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기조는 현재의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1960년에 있었던 U-2기 사건 정도만 알려져 있으나, 냉전 시기에 미국과 소련은 상대 정찰기가 영공에 진입하면 격추했고 그 과정에서 종종 공중전도 벌어졌다. 다만 미국과 소련이 직접 충돌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여파가 워낙 크기 때문에 양국은 암묵적인 비밀로 취급했다. 하지만 민간기를 그렇게 공격할 수는 없다.

물론 영공을 무단으로 진입한 민간기도 군사적으로 제재를 받는다. 하지만 고의가 없다고 판단되면 경고해서 영공 밖으로 축출하거나 인근 비행장에 강제 착륙시켜 법적 조치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무력에 의한 공격은 격추하지 못해 엄청난 참사를 야기한 9·11 테러처럼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실시하는 최후의 방법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007편이 비행 경로를 벗어나 소련 영공으로 들어섰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소련은 민간기임을 알았으나 어떠한 경고도 없이 미사일을 발사했다. 당시 약소국이고 적성국이던 한국의 국적기이니까 가능했던 의도적인 공격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어쨌든 이 사건의 여파는 엄청났고 재발 방지를 위해 여러 대책이 강구됐는데, 이때부터 GPS를 민간이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우리에게는 아픈 역사였지만, 이를 기점으로 GPS는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을 주는 문명의 이기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이제는 단순히 위치에 관한 정보뿐 아니라 마치 공기처럼 일상을 영위하도록 하는 인프라가 됐다. 당연히 누린다고 생각하는 편리함 뒤에 이처럼 커다란 아픔이 있었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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