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욱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연세대 경영학·법학, 베이징대 법학 박사, 사법연수원 33기, 전 법무법인 율촌 상하이 대표처 대표
허욱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연세대 경영학·법학, 베이징대 법학 박사, 사법연수원 33기, 전 법무법인 율촌 상하이 대표처 대표

허름한 옷차림의 주인공이 비행기를 타기 위해 보안 검색대에 줄 서 있다. 액체를 가지고 탑승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서는 들고 있던 우유 몇 리터를 그 자리에서 다 마셔 버린다. 비행 중에는 답답하다면서 창문을 열어 달라고도 한다. 2010년 중국에서 개봉돼 공전의 히트를 친, 우리말로는 ‘험난한 여정(人在囧途)’쯤으로 번역될 영화의 장면이다. 이 영화는 농민공(農民工)인 남자 주인공이 공사장에서 받지 못한 체불 임금을 받기 위해 사장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2019년 중국 상하이 최고 번화가인 루지아주이의 한 지하철에서는 먼지가 가득 내려앉은 작업복을 입은 농민공 가장이 저녁 퇴근 시간에 휴대전화를 충전하면서 무료 와이파이를 이용해 고향의 가족들과 영상 통화하는 모습이 공개돼 많은 이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농민공은 농촌 호적을 가지고 도시에 나가 주로 건설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말한다. 중국에서 농민공은 법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농민공에 대한 임금 체불이 사회 문제가 되자 2019년 중국 국무원은 ‘농민공 임금 지불 보장 조례(保障農民工工資支付條例)’를 반포한다. 이 조례는 농민공을 ‘사용자를 위해 노무를 제공하는 농촌 주민’이라고 정의했다. ‘농민’은 농촌에 호적이 있다는 신분을, ‘공’은 그들이 호적지인 농촌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종사하는 직업을 의미한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농민공이라 하면 베이징·상하이 등 중국 대도시의 초고층 빌딩 건설 현장에서 무거운 철근을 짊어 나르는 육체 노동자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고도성장 과정에서 보여준 그들의 희생과 고난은 중국인에게 ‘짠한’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이제는 이런 농민공을 바라보는 시각과 대우가 달라지고 있다.

2021년 9월 17일 중국 선전 인민대표대회의 한 대표가 “더는 언론에서 농민공이라는 차별적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도시 노동자로서 농민공을 존중하자”고 제안한다. 농민공이라는 단어 자체에 차별적인 의미가 포함돼 있다며 용어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미 국무원이 반포한 문건에 농민공이라는 용어가 언급돼 있어 이를 금지할 수는 없지만, 선전 현지 상황을 반영해 현지 언론 매체들이 ‘선전에 온 건설자’라는 의미의 ‘내심건설자(来深建设者)’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자고 했다. 노동 집약적 산업의 제조업체가 몰려 있는 중국 둥관이라는 지역에서는 이미 농민공을 ‘새로운 둥관인’이라는 의미의 ‘신관인(新莞人)’으로 부른다고 한다.

농민공에 대한 호칭의 변화뿐 아니라 이들을 동등한 도시 거주민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각종 정책도 시행 중이다. 노동자로서 농민공의 권리를 더욱 보호해 공평한 취업 환경을 조성하고, 농민공을 사회보험의 보호 범위 내에 포함하고, 농민공 자녀가 도시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며, 농민공의 노동 환경 보장을 위한 각종 부담을 정부 예산 범위에 포함하도록 했다.

농민공을 어떻게 도시 주민으로 포용하느냐는 중국에서 가장 큰 화두 가운데 하나다. 인구 고령화와 출생률 저하에 따른 도시 노동력 감소라는 외부 요소가 농민공을 도시로 흡수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동시에 중국 현대 사회의 대표적 약자인 농민공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대우는 중국 사회의 다양성 제고에도 일정 부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