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커리어에서 전성기가 찾아오는 시기는 나이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의 커리어에서 전성기가 찾아오는 시기는 나이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7년 발발한 IMF 외환위기에서 한국이 빠르게 탈출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성과’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이전까지 한국 기업의 인사 제도는 근속연수에 따라 연봉이 오르는 연공서열제가 대부분이었지만,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성과주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기업이 하루아침에 부도를 맞고, 옆 동료의 책상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이들은 이른 시간 내에 성과를 내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해야 했다.

이후 세계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약진이 이어지면서 한국식 단기 성과주의가 옳다는 것이 증명되는 듯했다.

국가와 기업은 위기에서 벗어났을지 몰라도, 개인의 위기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어서 빨리 ‘대박’을 터트려야 한다는 압박감,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괴감 등으로 병들어가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직급을 달고 성과 압박을 가장 많이 느끼는 나이대인 30~49세 중 직장 스트레스를 느낀다고 답한 비율이 80.9%에 달한다는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의 조사 결과가 이를 방증한다.

이른 시간 내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조직에서 저성과자로 낙인찍히기에 십상이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이직을 준비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러나 다쉰 왕(Dashun Wang) 미국 노스웨스턴대 켈로그 경영대학원 교수에 따르면, 지금까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해서 당장 직업을 바꿀 필요는 없다. 연구 결과 인생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전성기(hot streak)’를 맞이하는데, 이 시기가 완전히 무작위로 찾아온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대박’을 내는 시기가 일을 시작한 직후일 수도 은퇴 직전일 수도 있다.


나의 전성기는 언제쯤 찾아오는 것일까. 전성기에 나는 얼마나 많은 ‘대박’을 낼 수 있을까. 이 같은 물음에 답하기 위해 왕 교수는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구글 학술검색’과 학술 정보 데이터베이스인 ‘웹 오브 사이언스(Web of Science)’를 이용해 왕 교수는 과학자 2만400명의 논문과 각 논문이 발표된 이후 10년간 인용된 횟수에 대한 데이터를 얻었다.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IMDB)’를 이용해 영화감독 6233명의 개봉 성적을 조사했고, 화가·조각가 등 아티스트 3480명의 작품 경매 가격 데이터까지 입수했다.

데이터 분석 결과, 예술 91%, 과학 90%, 영화에서는 88%가 최소 한 번 이상의 경력상 전성기를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왕 교수는 “두 번 이상의 전성기를 겪은 행운아는 일부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분야별로 전성기 지속 기간도 달랐다. 과학자의 전성기는 평균 3.7년 지속됐지만, 영화감독과 아티스트는 각각 5.2년, 5.7년으로 과학자보다 전성기가 조금 더 길었다. 전성기에 진입하는 시기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낼 수 없었다.

경력 초기, 중기, 말기 등 모든 시기에 전성기가 나타날 가능성은 비슷했다. 즉 개인의 전성기가 언제 시작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왕 교수는 “50~60대 연구자의 전성기가 이미 지났다는 통설은 틀린 것”이라고 말했다.


단기에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해서 무조건 ‘저성과자’로 낙인찍어선 안 된다.
단기에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해서 무조건 ‘저성과자’로 낙인찍어선 안 된다.

젊을수록 성공하기 쉽다는 것은 선입견

서양에는 ‘마태 효과(Matthew Effect)’라는 말이 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25장 29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간극이 점점 더 벌어진다는, 한국의 ‘빈익빈 부익부’와 같은 말이다.

왕 교수는 “사람은 성공에 대해서도 마태 효과와 같은 선입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즉 전성기가 언제 시작될지 알 수 없지만, 한 번 시작되면 성공의 경험을 통해 배운 점을 바탕으로 또 다른 성공작을 내놓게 되면서 전성기가 지속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연속적인 성공 사례를 흔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만 26세였던 1905년, 과학사에 길이 남을 논문 3편을 연달아 발표하며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인류의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대표적이다. 1905년은 지금도 ‘아인슈타인의 기적의 해(annus mirabilis)’라고 불린다. 화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은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캔버스에 페인트를 붓거나 떨어트리는 ‘드리핑’ 기법을 선보이며 ‘20세기 문화 아이콘’으로 올라섰다. 영화감독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Alejandro Gonzalez Inarritu)는 2015년 ‘버드맨’에 이어 2016년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2년 연속 감독상을 받았다.

왕 교수는 각 직업군의 경력상 가장 큰 성공을 비롯해 두 번째와 세 번째 성공 시기를 살펴봤다. 만약 마태 효과가 사실이라면 첫 번째 성공 이후 나머지 성공 역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패턴에 따라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마태 효과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왕 교수는 “개인의 상위 3개 성공작의 시기를 살펴본 결과, 1·2위 성공작이 연속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우연히 (떨어져) 나타날 가능성에 비해 약 50% 더 높았고, 2·3위 성공작도 연이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며 “1·3위 성공작이 나타나는 시기가 붙어 있을 가능성도 높았다”고 말했다.

성공을 둘러싼 또 다른 선입견은 ‘젊을수록 성공하기 쉽다’는 것이다. 젊을수록 의욕적이고 열정이 넘쳐 많은 시도를 해볼 수 있고, 이에 따라 특정 기간에 더 많은 성공작을 내놓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선입견은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사례로 더욱 탄탄해진다. 고흐는 1888~1889년 2년간 약 200편의 작품을 완성했는데,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자화상’ ‘아를의 반 고흐의 방’ 등 그의 수많은 역작이 대부분 이때 탄생했다.

그러나 왕 교수는 “전성기가 지속되는 기간에 ‘생산성’에 대한 유의미한 변화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즉 많이 시도한다고 해서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란 이야기다.


대기만성형 인재 놓치지 말아야

26세에 세상을 뒤집어놓은 논문 3편을 연달아 발표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26세에 세상을 뒤집어놓은 논문 3편을 연달아 발표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개인마다 재능을 발휘하는 시기가 다를 수 있다는 이번 연구 결과에 따라, 왕 교수는 기업의 인재 관리에 관한 시각도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각 대학의 테뉴어 위원회(Tenure Committee·대학 교수의 종신 재직 여부를 결정하는 곳)만 봐도, 심사 대상 교수가 언제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가능성 있는 이들을 놓치고 있다”며 “성과를 내는 데 보다 긴 시간이 필요한 직원을 그렇지 않은 직원과 구별하고, 나아가 이들의 능력을 키워줄 수 있는 다양한 방법과 정책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가 이번 연구를 ‘희망 프로젝트(hope project)’라고 명명한 것 또한 이 같은 이유에서다.

성과주의 임금제도에 대한 ‘맹신론’ 역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성과주의 임금제도는 단기 성과에 집착하게 되고 이에 매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성과를 내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인재를 등한시하게 되고, 결국 이들을 밖으로 내모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의 ‘성과주의 임금제도가 기업의 경영 성과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이전까지 선행된 대부분의 연구는 성과주의 임금제도가 기업의 생산성과 수익성 향상 등 경영 성과 개선에 기여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김 선임연구위원은 성과주의 임금제도를 도입한 사업장 대부분이 생산성, 수익성 등이 높은 대기업이었기 때문에 이 같은 연구 결과가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즉 생산성, 수익성이 높지 않은 기업까지 모두 합하면 성과주의 임금제도의 효과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개인 성과급 도입은 장단기 모두 생산성과 수익성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장기적으로 인건비를 높였다”며 “(성과에 따른 이익을 함께 나눠 갖는) 집단성과급은 단기적으로 생산성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만, 그 효과가 지속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성과에 대해 보상도 하지 말고, 성과가 나올 때까지 수십 년이 걸리더라도 ‘한 우물’만 파라는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른 부작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안드레아 맥콜(Andrea Mccoll) 서던캘리포니아대 교수는 “같은 경험이 반복되면 깊이는 조금 더 생길지 모르지만, 학습 효과는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두 번째 이후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처음 경험보다 적으며, 대개의 학습은 유사한 내용의 복습이라는 것이다.

또 한 직무에서만 오랜 경험을 쌓은 경우, 다양한 경험이 부족해 폭넓은 사고를 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 문제가 조금만 복잡하고 변형된 형태로 발생할 경우 실패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같은 일만 반복적으로 할 경우, 일에 대한 흥미를 잃기 쉽고 몰입도가 떨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큰 가지에서는 같은 분야를 유지하되, 세부적으로는 적절한 시점에 조금씩 다른 직무로 옮겨볼 것을 조언한다. LG경제연구원은 ‘인재 육성을 방해하는 고정관념들’이란 보고서를 통해 “한 직무에만 너무 오래 근무하다 보면 타성에 젖어 새로운 직무를 기피하는 성향이 생길 수 있는데, 이런 성향은 직급이 높아질수록 더 커진다”며 “구성원이 한 직무에 지나치게 오래 머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일을 통한 직원 육성을 잘하는 기업의 특징 중 하나”라고 말했다. 리더십 개발 전문 기관인 ‘CCL(Center for Creative Leadership)’의 앤 모리슨(Anne Morrison) 이사도 “새로운 직무 이동이 제공하는 변화의 폭이 클수록 인재가 받게 되는 도전 강도가 증가하고, 도전 강도가 높을수록 이를 제대로 극복한다면 배우는 것이 많다”고 말했다.


plus point

스포츠만큼은 젊어야 성공한다지만…
32세에 전성기 맞이한 日 고다이라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고다이라 나오 일본 국가대표.사진 조선일보 DB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고다이라 나오 일본 국가대표. 사진 조선일보 DB

‘개인의 전성기는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오고, 그 시기는 나이와 상관없다’는 다쉰 왕 미국 노스웨스턴대 켈로그 경영대학원 교수의 연구 결과가 통하지 않는 분야도 있다. 바로 신체 나이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스포츠’ 분야다.

프랑스 생물의학·스포츠인지 연구소 ‘이르메스(IRMES)’ 연구진은 남성 운동선수의 나이에 따른 신체 능력 변화에 대해 연구했다. 분석 결과, 운동선수의 신체 기량이 절정에 오르는 시기는 평균 26.1세였다. 다만 수영 선수의 경우엔 21세에 전성기가 찾아와 다른 스포츠에 비해 비교적 이른 편으로 나타났다. 선수의 이 같은 기록 변화는 폐 기능 등 신체 변화 사이클과 일치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운동선수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은퇴한다.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가 2016년 발표한 ‘청년 체육인 취업 및 진로 여건 실태 조사’에 따르면, 한국 은퇴 선수의 평균나이는 23.8세였다. 현역 선수의 은퇴 희망 연령도 25세 이하(36.8%), 30세 이하(28.5%), 35세 이하(18.3%)순으로 나타나 대부분 30세 전후를 은퇴 시기로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최근 왕 교수의 연구 결과에 꼭 들어맞는 사례가 나타났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에서 이상화 한국 국가대표를 제치고 금메달을 차지한 고다이라 나오(小平奈緒) 일본 국가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1986년생인 고다이라의 올해 나이는 만 32세. 고다이라는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12위,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5위를 기록하면서 기업 후원이 모두 끊기는 수난을 겪었지만, 네덜란드 유학을 계기로 선수 생활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2016~2017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시리즈에서 6차례 레이스 결과 모두 금메달을 차지했고, 그해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개인 최고 기록이자 일본 신기록을 세우며 1위에 올랐다.

이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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