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는 “용병은 전쟁을 끝내기를 원치 않는다”는 단순하고 감정을 움직이는 명제를 찾아 시민군이 우수하다고 정부를 설득했다. <사진 : 위키피디아>
마키아벨리는 “용병은 전쟁을 끝내기를 원치 않는다”는 단순하고 감정을 움직이는 명제를 찾아 시민군이 우수하다고 정부를 설득했다. <사진 : 위키피디아>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대표작은 ‘군주론’이다. 마키아벨리 자신에게 ‘군주론’은 우울한 작품이었다. 대부분의 천재처럼 생전에 ‘군주론’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마키아벨리가 자부심을 가진 업적은 징병제와 시민군 창설이었다. 전형적인 문생이었던 그는 군사 전문가이자 전술가 대접을 받았고, 징병제에 대한 저서도 남겼다.

16세기 유럽은 직업 군인과 용병들의 천국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유럽 최고의 부국이자 예술의 근원지였다. 프랑스만 해도 문화와 예술에서 이탈리아의 변방이거나 아류였다. 유럽의 내로라하는 군주들이 번갈아 가며 이탈리아의 부와 예술품을 얻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피렌체 시민군, 스페인 보병에 ‘와르르’

하지만 이탈리아 용병은 무능하고 비쌌다. 무구(武具)는 화려했지만 외적을 막는 데는 쓸모가 없었다. 너무 비싸고 무능해서 도시 국가로 분열된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통일이 되면 자신들의 일자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도시 간 전쟁에선 고용주의 금고가 텅 빌 때까지 시간을 끌거나 주변을 약탈했다. 외국군이 쳐들어오면 빠르게 도망치거나 뒤꽁무니만 쫒아다녔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용병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전쟁은 도적(용병)을 만들고, 평화는 그들을 교수형에 처한다.” 그는 전쟁을 돈 버는 기회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평화와 안정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병사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원칙론적인 주장뿐만 아니라 이상적인 군대의 조건, 편성 방법, 전술까지 손을 댔다. 피렌체의 시의원들은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감동했고, 그에게 시민군 창설 임무를 맡겼다.

공명심이 강했던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만든 군대에 눈에 확 띄는 군복을 입혔다. 상의와 하의를 수직으로 나눠 한쪽은 흰색, 한쪽은 붉은 색이었다. 발만 잘 맞는다면 퍼레이드 효과는 보장하는 디자인이었다. 병사들은 평일에는 생업에 종사하며 휴일에 훈련을 했다. 무보수지만 전쟁에 동원됐을 때는 용병 수준의 봉급을 받았다.

피렌체 시민군은 피렌체의 숙적이었던 피사를 굴복시키는 개가를 거뒀다. 마키아벨리는 득의만만했다. 그의 시대를 앞서가는 지혜가 증명되는 듯했다. 마키아벨리의 시민군은 유럽에서 징병제가 보편화되는 18세기에 비하면 200년이나 빨랐다. 1512년에 스페인군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스페인군 8000명이 피렌체로 진군해왔다. 당시 스페인 보병은 총병이 사격을 하고, 장창병이 총병을 보호하는 테르시오(tercio)라는 협력 전술과 검을 들고 근접전을 벌일 때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함으로 유럽 최강의 보병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피렌체군은 근교의 도시 프라토에서 스페인군을 저지하기로 했다. 1만2000명의 피렌체군이 프라토로 파견됐다. 프라토에도 약 4000명의 시민군이 있었다. 그들은 지금도 남아 있는 프라토의 성벽을 이용해서 스페인군에 저항했다. 스페인군은 식량이 거의 떨어졌고, 작동하는 대포는 1문뿐이었다. 그 대포를 쏴서 성벽 상단에 가로 4m, 세로 2m의 구멍을 하나 만들었다. 겨우 병사 2명이 사다리를 타고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었지만, 1만명이 넘는 시민군은 그것을 보자 그대로 도망쳤다.

마키아벨리의 선구적 실험은 참혹한 실패로 끝났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탓이었을까. 하지만 알고 보면 앞선 것이 아니라 뒤처졌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마키아벨리는 적당한 지식인과 대중을 설득하는 비결을 알았다. 그는 ‘용병은 전쟁을 끝내기를 원치 않는다’는 단순하고 감정을 움직이는 명제를 찾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이렇게 선고했다. “이것이 만악의 근원이다.” 의외로 지식인들은 이런 단순화된 논리에 잘 넘어간다. 실무와 현장 경험을 무시하고 논리로 판단하는 사람일수록 더 잘 넘어간다.

공감을 얻으면 마키아벨리는 역사를 끌어들인다. 이때도 단순화와 감성이라는 무기를 잊지 않았다. 호감 가는 성공 사례를 찾는 것이다. 이탈리아인에게 로마처럼 좋은 소재는 없다.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낳은 군대를 시민군이라고 봤다. 그 자리를 이민족 용병이 채우면서 로마는 혼돈에 빠졌고 그들 손에 멸망했다. 여기까지였다면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언변을 성공 사례로 사용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여기서 더 과감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에 있어본 적이 없다. 그는 전문가가 되기 위해, 자신의 논리 위에 우뚝 서서 역사를 무기로 전문가 영역까지 침범했다. 여기서 시간적 퇴행이 발생하는데, 그는 로마에 너무 빠져서 무턱대고 모방하기 시작했다.


피렌체 시민군을 무너뜨린 스페인 보병. <사진 : 위키피디아>
피렌체 시민군을 무너뜨린 스페인 보병. <사진 : 위키피디아>

명분도 좋지만 조직의 전문성 고려해야

그래도 감각은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시민군과 로마군의 장점을 적절히 매치시켰다. 그가 로마군만 참조한 것은 아니다. 그는 박식을 자랑하며 주변 나라의 군대, 스위스 용병 등 다양한 사례를 연구하고 인용했다. 하지만 자신의 선입견과 맞지 않는 사실은 감추거나 왜곡했다. 여기서 최악의 왜곡이 발생한다. 피렌체에도 너무 단순 명쾌한 이론에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군사 전문가들은 더 불안했다. 그들은 반론을 제시했다. “로마군이 시민군이라고? 입대 전에 시민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나? 로마군의 능력은 시민이 아니라 전문성에서 온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진짜 적은 용병의 탐욕이 아니라 전문성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직업군인, 용병의 장점을 인정할 수는 없다. 그는 전문성의 근거가 되는 것은 모조리 부정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시간의 역행이 발생한다. 16세기에 전문 군인이 각광을 받고 군인 봉급이 높아진 진짜 원인은 총과 대포였다. 이때 화기는 지금 화기와 달리 상당한 숙련을 요구했다. 총과 화약이 나오면서 전술 운용이 복잡해졌고, 전문 장교의 가치가 높아졌다.

마키아벨리는 총의 위력을 폄하했다. 총병은 겨우 10% 정도였고, 그들보다는 창과 로마군을 본뜬 원형 방패를 든 보병에 가치를 뒀다. 기병도 의미를 제한하고 대포는 별거 아니라고 했다. 그는 창이 총과 대포보다 강하다는 근거로 스위스 보병의 승전 사례를 제시했다. 스위스군이야말로 유럽 용병의 대명사인데, 마키아벨리는 스위스군을 농민병 취급했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공화정부를 설득한 주요 논거는 ‘용병은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높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군대는 쿠데타 위험이 없다고 자신했다. 장교와 병사의 유대감을 해체한다는 이유로 중대장을 번개같이 순환시켰다. 병사들은 자기 중대장이 누군지도 잘 몰랐다. 중대장은 과다하게 많고 그들 위에는 장교가 없다. 마키아벨리는 시민군은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병력을 모집할 수 있다고 자랑했지만, 시민군의 조직력은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렸다.

마키아벨리의 오류는 우리 사회와 조직에서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교훈이다. 우리는 결론이 간결한 것을 좋아하고, 단순화와 핵심을 오해한다. 해결책이 명확하거나 해결 가능한 문제제기를 선호한다. 현장의 목소리는 불만으로 간주되기 일쑤다. 우리는 어려움에 처하면 흔히 역사나 성공한 기업의 사례에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과거의 사례를 참조할 때는 그것을 변화하는 현실에서 재조립하고, 미래 상황에 대입해 판단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 임용한
경희대 대학원 사학 박사, 경희대·공군사관학교 한국사·군제사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