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세계대전 당시 최전선 포대까지 전달된 코카콜라. 이처럼 풍족한 보급품은 연합군 승리의 원동력이 됐다. <사진 : georgia historical society>
제2차세계대전 당시 최전선 포대까지 전달된 코카콜라. 이처럼 풍족한 보급품은 연합군 승리의 원동력이 됐다. <사진 : georgia historical society>

전쟁 중 보급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역할은 상당했다. 각기 다른 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에 동시 참전했을 뿐 아니라 상상도 못 할 엄청난 보급품을 쉬지 않고 연합군 측에 공급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연합군 전체를 지원했지만 미국에 있어 보급 1순위는 당연히 미군이었다.

가장 질이 좋은 물품이 미군에게 최우선으로 공급됐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즉시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나 여타국과 비교하면 미군은 지원을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지는 않은 편이었다. 미군과 교전을 벌였던 적들은 패해서 포로가 됐든, 승리해 노획을 했든 상관없이 미군의 보급품을 보고 기가 질리는 경우가 많았다.


독일, 전쟁 전엔 미국 다음으로 콜라 소비

음식은 무기만큼이나 중요한 보급품이다. 현지에서 조달하기도 하지만 전염병 등에 걸려 병사들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손실을 입는 사례를 막기 위해 후방에서 공급하는 것이 원칙이다. 전사(戰史)에서 식량 때문에 승패가 결정된 사례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미군은 가능한 한 굶으면서 싸우지 않았다.

그만큼 음식 공급이 충분히 이뤄졌는데, 그중 커피, 초콜릿 같은 기호품은 식량도 제때 보급이 안 되는 적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기호품 중에서도 유독 독일 병사에게 부러움을 안겨 준 것은 박스에 곱게 포장돼 최전선까지 배달되는 콜라였다. 사기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

전쟁 발발 전까지만 해도 미국 다음으로 콜라 소비가 많았던 나라가 바로 독일이었다. 특히 코카콜라는 노동자가 일을 마친 후 싼 가격에 타는 목을 축이기 위해 즐겨 찾는 음료였다. 1934년에 24만3000병이었던 판매량이 전쟁 발발 직전인 1939년에 이르러서는 무려 450만병이 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당시 독일 내 코카콜라 보틀링 권리를 획득한 이는 카이트였다. 그는 나치에 접근해 후원을 아끼지 않는 대신 사업 편의를 제공받고 판매를 확대했는데, 게르만 우월주의가 판치는 상황을 감안해 미국산 제품이라는 점을 철저하게 감췄다. 때문에 포로가 된 독일군이 코카콜라가 미국제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만큼 독일인에게 코카콜라의 인기가 높았지만 1940년부터 쉽게 맛볼 수 없었다. 아직 미국이 전쟁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영국이 해상로를 봉쇄하면서 독일로 충분히 원액을 보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더구나 미국은 영국에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코카콜라 회장 우드러프는 독일을 결코 놓칠 수 없었다.

그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원액을 공급했으나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자 제조법을 아는 히스를 보내 현지에서 원액 생산에 나서도록 조치했다. 1886년 탄생 이래 지금까지도 엄중히 보호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제조법을 아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지도 않는다는 절대 비밀이 바로 코카콜라 원액 제조법이다.

그러나 독일 국내나 점령지에서 원액 제조에 필요한 원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몇몇 재료 조달이 불가능해 7X로 알려진 핵심 성분의 현지 생산은 실패했다. 카이트는 실망이 컸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7X 대신 식품 가공 후 남겨진 부산물을 이용한 새로운 음료 제작에 들어갔다.


1930년대 독일 코카콜라 광고 포스터. 독일에서 코카콜라는 미국과 전쟁을 벌인 후에도 유통되고, 그것으로 부족하자 환타를 만들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사진 : www.historyanswers.co.uk>
1930년대 독일 코카콜라 광고 포스터. 독일에서 코카콜라는 미국과 전쟁을 벌인 후에도 유통되고, 그것으로 부족하자 환타를 만들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사진 : www.historyanswers.co.uk>

소련군 사령관, 아이젠하워에게 콜라 요청

덕분에 상당 요소가 코카콜라와 비슷하지만 첨가된 재료에 따라 다양한 맛을 낼 수 있는 새로운 청량음료를 만들 수 있었다. 카이트는 이를 ‘환타(fanta)’라고 명명하고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 1955년 코카콜라에서 브랜드를 인수하며 또 하나의 세계적 음료수가 된 환타는 이처럼 전쟁으로 인해 탄생했다.

하지만 환타도 코카콜라를 일거에 대체하지는 못해서 미국이 참전한 이후에도 회계 장부에 분실로 처리된 원액 일부가 은밀히 스위스를 거쳐 독일로 넘어가 생산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코카콜라는 이를 부인하지만 전쟁 말까지 일부 유통됐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오히려 거부감이 없던 독일과 달리 같은 편이었던 영국이 전시 편의를 위해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에 영국 내에 하나의 보틀링 회사를 설립해 공동 생산하라고 요구하자 양사가 이에 반발해 보이콧을 하기도 했다. 소련은 한술 더 떠 콜라가 자본주의의 상징물이라며 유통이나 식음을 규제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종전 후 연합국 회의에서 우연히 맛보고 반한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 주코프가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에게 은밀히 콜라를 요청했다. 그러자 미국은 그의 위상과 입장을 고려해 코카콜라에 부탁해 보드카 병에 담은 50상자분의 무색 콜라를 긴급 제작해 보냈다. 이것은 최초이자 마지막 무색 코카콜라로 역사에 기록됐다.

비록 지금은 건강에 나쁜 음료로 비난받지만 콜라는 전쟁 중에 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비밀리에 거래가 이뤄지고 유사품까지 만들어 마셔야 했을 만큼 기호품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어쩌면 전쟁보다 무서운 것은 그런 와중에도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생각된다.


▒ 남도현
럭키금성상사 근무, 현 DHT에이전스 대표, 군사칼럼니스트, ‘무기의 탄생’ ‘발칙한 세계사’ 등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