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탄 브로드컴 CEO가 11월 초 미국 백악관에서 브로드컴 본사를 미국으로 이전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혹 탄 브로드컴 CEO가 11월 초 미국 백악관에서 브로드컴 본사를 미국으로 이전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글로벌 고객이 (브로드컴과 퀄컴의) 조합을 포용할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다면 아예 제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 4위 반도체 기업인 브로드컴이 3위 기업인 퀄컴을 인수·합병(M&A)하겠다고 선언, 인텔과 삼성전자 쌍두마차가 주도하는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지형이 요동치고 있다.

두 회사의 빅딜 성사 여부에 따라 반도체는 물론 스마트폰, 네트워크, 전장(자동차 전자장비) 업계도 지각 변동의 태풍에 휩싸일 전망이다.

혹 탄(Hock Tan·64) 브로드컴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달 6일 퀄컴의 주식을 주당 현금 60달러에 주식 10달러를 얹은 70달러에 인수하겠다고 공개 제안했다. 이는 퀄컴 주식의 종가(11월2일)에 28%의 프리미엄을 얹은 가격으로 전체 거래 규모(부채 240억달러 포함)는 1300억달러(약 143조원)에 달한다.

혹 탄 CEO는 “우리의 제안은 양사 주주와 이해 관계자들에게 강렬한 제안”이라며 “퀄컴 주주들에게 주식에 대한 현저하고 즉각적인 프리미엄을 제공하고 합병된 회사의 잠재력 상승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브로드컴 이사회도 혹 탄 CEO의 계획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브로드컴의 전격적인 인수 발표는 퀄컴 이사회가 1주일 뒤 “주당 70달러는 너무 싼 가격”이라며 거절, 적대적인 인수·합병전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혹 탄 CEO는 즉각 “그동안 두 회사의 합병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논의했지만 퀄컴 측이 동의하지 않았다”며 “우리는 적대적 인수 방향으로 나가겠다”고 밝혔다. ‘퀄컴 사냥’을 멈출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브로드컴이 우선 인수가격을 높여 퀄컴 주주 설득에 나설 가능이 높다”며 “당장은 브로드컴에 우호적인 인사들을 퀄컴 이사회에 집어 넣으려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수 성공하면 반도체 산업 지각 변동

두 회사의 합병이 성사되면 반도체 사상 최대 빅딜이 된다. 지난 2015년 미국의 컴퓨터 기업 델이 데이터 스토리지업체 EMC를 670억달러에 인수한 게 역대 최대 규모였다.

브로드컴(151억달러·2016년 기준)과 퀄컴(154억달러)의 매출을 합치면 1위 인텔(570억달러), 2위 삼성전자(443억달러)를 바짝 추격할 수 있다.

당장 인텔과 삼성전자의 매출을 추월하기는 어렵지만 5G,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IoT) 등 숨가쁘게 진행되는 4차 산업혁명이 성숙해질수록 메모리뿐 아니라 비메모리 반도체의 위상도 커질 전망이어서 산업 전반의 지형을 바꿀 수도 있는 초대형 거래가 될 것이란 분석이다.

과거 미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기업이던 브로드컴은 현재 싱가포르계 회사다. 휴렛팩커드 반도체 부문에서 분사한 아바고테크놀로지스가 기업 인수·합병을 통해 덩치를 키웠고 작년 미국 브로드컴을 370억달러에 인수했다.

아바고는 인수 이후 회사 이름을 아예 브로드컴으로 바꿨다. 현재 본사는 싱가포르, 운영본부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두고 있다. 무선인터넷(와이파이)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브로드컴이 표준기술특허 등 통신 관련 특허를 다수 보유한 퀄컴과 합병할 경우 막강한 시너지를 낼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브로드컴은 특히 퀄컴이 강점을 보이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기술에 눈독을 들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퀄컴은 ‘스마트폰의 두뇌’로 불리는 AP 분야 1위 기업이다. 퀄컴의 AP에다 브로드컴의 통신용 반도체를 묶어 ‘원칩(One Chip)’ 형태로 생산하면 이동통신 분야의 강력한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면초가’ 퀄컴 ‘사냥감’ 신세 전락

브로드컴의 사냥감 신세로 전락한 퀄컴은 갈수록 사면초가에 몰리고 있다.

이동통신 표준기술특허(SEP)를 가진 통신시장 지배자의 지위를 남용, 20년간 휴대전화 제조기업과 부품 회사를 상대로 ‘갑질’을 했다는 원성을 사면서 여기저기에서 과징금을 맞고 있다.

올해 들어 보유 특허를 부품회사에 제공하지 않고 휴대전화 회사에만 제공하면서 부당한 특허료를 받아 챙긴 혐의로 한국(1조300억원), 중국(60억위안·약 1조500억원), 대만(234억대만달러·약 8780억원)에서 잇따라 거액의 과징금을 맞았다. 유럽과 미국의 경쟁 관련 규제 기관들의 조사도 받고 있다.

최대 고객 중 하나인 애플과의 특허 분쟁도 퀄컴을 궁지로 몰고 있다. 애플은 올해 초 “퀄컴이 부당한 특허료를 챙겼다”며 퀄컴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 10월에는 아예 퀄컴과의 거래 중단을 선언했다. 애플과의 법정 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우려하는 퀄컴 주주들에게 브로드컴의 인수 제안이 솔깃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퀄컴의 경영진들이 네덜란드 NXP반도체 인수를 빨리 끝내 주주들에게 브로드컴과의 합병이 필요 없다는 점을 설득, 브로드컴의 공격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퀄컴은 작년 10월 전장 반도체 분야의 강자인 NXP반도체를 380억달러에 인수했으나 EU와 중국 등 각국의 반독점 심사가 지연되면서 최종 승인이 내년으로 연기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브로드컴은 퀄컴을 인수한 뒤 지지부진한 NXP반도체 인수에도 적극 나서겠다는 전략이다. 브로드컴의 ‘퀄컴 사냥’이 성공하면 브로드컴은 모바일과 전장 산업 분야의 지배자가 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브로드컴과 퀄컴의 합병이 순탄치만은 않을 전망이다.

두 회사가 합병하면 와이파이와 블루투스용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60%에 육박하고 위성항법장치(GPS)용 반도체 시장 점유율도 52%에 달한다. 퀄컴 한 회사의 CDMA 시장 점유율도 59%나 된다.

미국 법무부가 최근 AT&T의 타임 워너 인수를 저지하기 위한 소송을 거는 등 각국의 규제가 강화되고 있어 규제 장벽을 넘어야 한다.


Plus Point

말레이시아계 미국인
무자비한 비용절감 추구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 있는 브로드컴 본사. <사진 : 블룸버그>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 있는 브로드컴 본사. <사진 : 블룸버그>

‘대담하고 야심 찬 제안’으로 평가받는 브로드컴의 퀄컴 인수를 주도하는 인물은 혹 탄 브로드컴 CEO다.

1953년 말레이시아 페낭(Penang) 태생인 말레이시아계 미국인인 혹 탄 CEO는 MIT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MBA(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말레이시아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 싱가포르의 벤처캐피털, 펩시, GM, ICS, IDT, 코모도어인터내셔널 등 주로 미국 회사에서 경력을 쌓았다.

2006년 아바고의 최고경영자가 된 뒤 잇따라 기업 인수·합병에 성공, 회사 덩치를 급격히 키우면서 반도체, 통신 분야의 거물로 부상했다. 아바고테크놀로지스의 370억달러짜리 브로드컴 인수도 그의 작품이다. 25년간 반도체 업계에서 일하며 잔뼈가 굵은 혹 탄 CEO가 브로드컴과 퀄컴의 저력을 높이 평가, 두 기업의 인수·합병에 강한 의욕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업 운영에서는 무자비한 비용 절감을 추구하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11월 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 브로드컴 본사를 미국으로 이전하겠다고 선언, 글로벌 기업들의 미국 유치를 추진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2016년 연봉은 2469만달러(블룸버그 추정)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