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이후 전기차 에코시스템(생태계)이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세계 각국의 그린 이코노미 육성 정책에 힘입어 전자, 정보기술(IT), 화학 등 다양한 분야의 기업들이 전기차 산업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195개에 불과했던 독일 전기자동차기술박람회(eCarTec) 참가 업체가 2010년에는 400여개로 늘어났고, 2011년엔 1000여개 업체가 참가 의사를 밝혔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박람회에서 가장 큰 부스를 차지하고 있는 업체들이 지멘스나 인피니언·ESG 같은 전기, IT, 반도체업체라는 사실이다. 엔진이 모터로 대체되고 연료탱크가 배터리로 바뀌면서 전기차의 에코시스템은 기존 내연기관 자동차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전기차와 전기차 에코시스템의 부상은 기존 자동차 업계는 물론 부품·에너지·금융 등 자동차와 연계된 모든 산업의 판을 뒤흔들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그동안 자동차 산업의 주변부에 있던 IT·전자·반도체·에너지·금융 산업이 전기차 시대의 주력 산업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전기차는 우선 자동차 부품 업계에 지각변동을 몰고 올 것이다. 전기차 시대에 이르러 엔진이 내연기관에서 전기 모터로 바뀌면 내연기관 부품을 만들던 기업들의 역할을 모터와 모터용 부품, 모터 제어장치를 만드는 전기·전자업체들이 대체한다. 연료 분야에서도 석유에서 전기로 무게추가 옮겨가면서 주유소와 정유업체들이 쇠퇴하고, 전력회사들의 힘이 더욱 막강해질 것이다.

전기차는 자동차에 대한 소유의 개념을 바꿔 놓을 수도 있다. 현재 전기차는 대당 5000만~6000만원의 고가에 1회 충전 시 주행거리가 100~150㎞에 불과해 도시의 출퇴근용으로 보급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전기차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대여 자전거처럼 빌려 쓰고 갖다 놓는 방식이 주목을 받는다. 이 경우 제2금융권의 자동차 할부 금융은 지는 사업이 되고, 전기차 판매 회사나 렌털 회사와 연계된 은행의 대규모 리스 금융이 확산될 수 있다.


전기차의 핵심 부품은 반도체

독일 뮌헨의 ESG는 1967년부터 전투기와 해군 전투함, 장갑차의 조종 시스템 및 정보·전자전에 필요한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온 IT업체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 전기차 분야에도 뛰어들었다. 전기차는 기계보다 전기·전자장치에 가까워, ESG 같은 IT업체가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비즈니스가 된 것이다.

내연기관 자동차는 엔진에 들어가는 연료의 양을 조절해 속도를 제어한다. 가속페달에 연결된 연료 밸브를 열고 닫는 기계적 조작으로 이뤄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전기자동차는 전기 모터에 들어가는 전류의 양을 정교한 전기회로와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통제해야 한다. 기계에서 전기·전자로 기술의 영역이 바뀐 것이다.

ESG는 전기차의 신경계(神經系)인 통합 제어시스템을 개발해 전기차 제조업체에 공급하고 있다. 배터리 관리, 전력 소비량 관리, 주행거리 예측 등 전기차의 핵심 기능은 물론, 에어컨·방향지시등·와이퍼 등 자동차의 기본 장치까지 모두 제어할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자동차 생산업체가 부품업체 여러 곳과 머리를 맞대야 해결할 수 있는 일을 ESG는 원스톱으로 해결해 내놓는다.

전기차에는 전류 조절장치, 배터리, 배터리 충전장치, 보조전원 등 거의 모든 주요 부품에 반도체가 들어간다. 전기자동차에 전력을 공급하는 스마트그리드(smart grid·지능형전력배분시스템)까지 포함하면 100여종 이상의 반도체가 필요하다고 한다. 2030년에는 관련 시장 규모가 250억달러(약 27조50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유럽을 대표하는 반도체 업체인 인피니언(Infineon)이 일찌감치 전기차 반도체 시장의 가능성을 내다봤다. 가장 최근의 성과는 기존 배터리의 용량을 15% 이상 늘리는 기술이다. 예를 들어 국내 업체의 제품보다 10~20% 뒤떨어진 성능의 중국산 배터리도 인피니언의 기술을 이용하면 국내 업체의 최신 제품과 비슷한 수준이 된다는 얘기다.

인피니언은 또 전기차를 충전하는 동안, 전력선을 통해 자동차의 각종 운행 정보를 인터넷으로 전송할 수 있는 반도체 칩셋도 개발하고 있다. 이러한 전기차의 운행 정보는 도시의 교통 통제 시스템에서 분석돼 도시의 교통 흐름이나 혼잡도를 개선하는 데 쓰일 수 있다. 또 고객의 동의를 얻어 운행 정보가 보험사에 제공되는 것도 가능하다. 보험사는 운전자의 운전 습관이나 내역을 파악해 보험료를 조정할 수 있다. 안전운전을 하는 사람은 보험료가 싸지고, 거칠게 운전하거나 교통사고 위험이 큰 곳에 자주 가는 사람은 보험료가 비싸질 수 있다. 독일 지멘스가 이러한 개념의 스마트그리드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에너지 업계 판도 변화 예상

정유업체에 쏠려 있던 에너지 업계의 무게 중심이 전력업체 쪽으로 옮겨 갈 전망이다. 기존 정유업체들은 재빨리 전기차 충전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전기차 시대가 와도 고객들이 주유소에서 연료를 넣던 과거 습관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정유업체들은 가솔린이나 디젤 대신 전기를 팔아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일종의 시장 선점 전략이다.

유럽의 정유·에너지업체 이온(EON)은 올 들어 독일 뮌헨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100개 이상의 전기차 충전소를 계속 세우고 있다. 충전은 아예 공짜로 해준다. 충전 방식도 기존 주유소와 다를 게 없다. 차를 몰고 들어가서 충전기의 플러그를 차에 연결시킨 다음 신용카드를 꽂고 5~10분 정도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전력업체들은 모든 가정과 직장에 충전 장치를 설치한다는 계획이다. 전력업체와 주유소의 경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전기차 시대에는 차량의 소유 개념이 바뀔 수도 있다. 배터리 문제와 함께 전기차 보급의 가장 큰 걸림돌은 가격이다. 현재 전기차는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도 여전히 가솔린·디젤 차량에 비해 약 두 배가량 비싸다. 게다가 전기차로는 수백㎞의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없어서 기존 가솔린·디젤 차량을 완전히 대체하려면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이런 상황은 금융산업에 큰 기회다. 전기차를 일시불로 사는 부담이 커지면서 할부나 리스 형식으로 전기차를 보유하는 비중이 매우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전력회사와 자동차회사가 금융회사를 끼고 전기차 이용료를 몇 년간 월정액으로 받는 식으로 전기차를 판매하는 방법도 있다. 전력회사가 전기차나 배터리 구입비용의 일부를 지원하고, 소비자는 나머지 차(배터리) 값을 금융회사에서 할부로 쓰는 방식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