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후반 그리스를 필두로 한 ‘남유럽발(發) 재정 위기’가 전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했다. 2008년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차 여진(2009년 2월 동유럽 금융위기), 2차 여진(2009년 11월 말 두바이 위기)에 이어, 이른바 3차 여진(2010년 2월)이 남유럽에 몰아닥친 것이다.

그리스를 비롯해 재정이 취약한 포르투갈·아일랜드·스페인까지 국가 부도 우려가 커지면서 이들 국가의 첫 글자를 따 ‘PIGS’, 또는 이탈리아까지 보태 ‘PIIGS’라고 부르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굼뜬 정부, 강성 노조가 주범

그리스의 재정 적자와 국가 부채는 ‘만성 질환’이다. 2001년 유로 가입 당시에 이미 국가 부채가 GDP의 100%를 넘었다. 갈수록 악화된 그리스 재정 적자는 세계 금융시장에 남유럽발 재정 위기와 국가 부도 공포를 불러일으키면서 세계 증시 동반 급락을 불렀다. 그 주범은 사태 수습에 굼뜬 그리스 정부와 ‘솜방망이 개혁’조차 발목 잡는 그리스의 강성 노조였다.

그리스 신임 정부는 피치의 신용등급 하향 조정을 전(前) 집권당이었던 야당 탓으로 돌리면서, 시장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재정 감축안을 내놓았다. 그러자 2009년 12월 초 피치는 “그리스 정부의 연금 개혁안 및 재정 삭감계획이 지속가능하고 신뢰할 만한 수준이 못된다”며 신용등급을 A-에서 BBB+ 등급으로 다시 떨어뜨렸다. 유로존(16개국)에서 국가신용등급이 A 밑으로 떨어지기는 그리스가 처음이었다.

증시가 급락하고, 독일 국채(10년물) 대비 그리스 국채의 스프레드가 230bp로 확대되는 등 금융시장이 요동치자 파판드레우 총리는 비로소 사회보장지출 10% 삭감을 포함한 재정 감축안을 다시 내놨다.

하지만 좌파 단체를 비롯, 노조가 시위를 벌이며 “부자들에게 위기의 대가를 치르게 하라” “총선 공약을 잊지 말라”며 정부에 반발했다. 이번에는 신용평가사 S&P가 신용등급을  A-에서 BBB+로 하향 조정했다.

지난 2월 중순 그리스 정부는 “2010년까지 재정 적자를 GDP의 2.8%로 낮추겠다”는 재정 건전화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80억달러에 달하는 국채 발행을 추진했다. 연 6.3%의 높은 금리에 국제 투자자들이 솔깃했지만, 중국이 그리스 국채 인수를 거절했다는 소문이 국제 금융시장에 나돌면서 그리스 국채 수익률이 급등(채권 가격 하락)하기 시작했다. 헤지펀드들이 그리스의 국가 부도 가능성에 베팅하면서 CDS(크레디트 디폴트 스와프) 프리미엄도 치솟았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투기꾼들을 비난했지만, 그리스가 위기에 몰린 건 방만한 재정 운용 탓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2010년 2월 초 총리는 월 2000유로 이하의 공공 근로자까지 공공 부문의 임금 동결에 포함시키는 등 더 강도 높은 재정 감축안을 내놨다.

같은 달 EU가 그리스 정부의 재정 건전화 방안을 승인하면서 위기가 진화되는 듯했으나, 그리스 공공노조 ADEDY가 총파업(2010년 2월 10일)을 선언하고, 민간 최대 노조인 GSEE도 대규모 파업(2010년 2월 24일 예정)을 결의하자, 전 세계 증시가 폭락하면서 이른바 ‘PIGS 사태’가 확대됐다.

그리스는 1981년 EU(당시는 EC)에 가입했고, 2001년 단일 통화 유로에 가입하면서 바야흐로 봄을 만끽했다. 유로의 우산 아래, 그리스는 저금리의 유리한 조건으로 돈을 쉽게 빌릴 수 있게 됐고, 2004년 올림픽을 계기로 투자가 활성화된 그리스 경제는 4% 안팎의 성장을 이어나갔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2009년 -1.1%)로 돌아섰지만, 유로화의 우산 밑에서 폭풍우는 피하는 듯했다. OECD가 지난해 7월 발표한 그리스 국가 보고서에서도 “그리스 경제는 글로벌 위기의 초기 충격에 상대적으로 잘 견뎌왔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하지만 높은 실업률에, 오랫동안 누적된 부패와 비효율적이고 허약한 재정 체력을 갖고도 흥청망청하다가, 뒤늦게 불이 옮아 붙은 것이다. 실제로 유로 가입 이후, 국제 시장에서 더 유리한 조건으로 부채를 끌어다 쓰면서 2003년 재정 적자가 GDP의 6.1%, 2004년 7.8%까지 높아졌다. 2005년 EU는 “2007년까지 GDP의 3% 이내로 재정 적자를 축소하라”고 ‘옐로 카드’를 내밀었다.


미흡한 정부대책이 위기 부채질

현재의 방만하고 비효율적인 재정 구조는 1980년대에 사회당이 집권하던 시절 도입한 사회주의 정책들로 인해 굳어진 것이다. 당시 사회당 정부는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유럽에서 가장 관대한 연금 제도를 도입했다.

캐나다·프랑스·일본·포르투갈 등은 대개 40년 일해야 연금을 수령한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35년 일하면 연금을 타고, 연금의 소득대체율이 무려 95.7%에 달한다.

게다가 독일·이탈리아·영국 같은 나라들은 평생 벌어들인 소득을 평균해 연금을 지급하는데, 그리스는 소득이 가장 높은 은퇴 직전 5년간의 소득을 기준으로 삼는다. 나이 들어 굳이 열심히 일할 필요를 못 느끼게 만드는 구조다.

3000억유로의 빚더미에 앉아 있는 그리스 정부는 올해 만기가 도래하는 외채만 500억유로가 넘는다. 신용등급이 하락하면서 신규 차입, 만기 연장 등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자 국가 부도설이 나돈 것이다.

그런데 재정 적자나 국가 부채가 심각한 국가가 그리스만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리스가 ‘재정 위기’를 촉발시킨 이유에 대해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훨씬 더 대담한 조치를 내놓은 아일랜드나 다른 나라에 비하면, 그리스가 내놓은 재정 지출 삭감안 등은 너무나 미흡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령 아일랜드가 지난해 12월 공무원의 임금을 삭감하고, 연금에도 과세하는 조치를 발표하자 국채 수익률이 하락(채권가격 상승)하는 등 금융시장이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반면 그리스는 은퇴한 공무원을 충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재정 지출을 줄이겠다는 식의, 느리고 소극적인 정책을 내놔 시장의 불신을 부채질했다는 것이다. 모건 스탠리의 경제분석가 스피로스 안드레오풀로스는 “그리스 정부가 귀한 시간을 너무 놓쳐버렸기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국가 부도 위기에 IMF에 손을 벌리느냐, EU 지원을 받느냐를 놓고 결국 EU가 급한 불을 꺼주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그리스의 만성 질환까지 해결된 건 아니다. 그리스 사례는 세계 금융시장에 ‘국가 부도 위험(sovereign risk)’이라는 새로운 숙제를 던졌다. 대표적인 ‘닥터 둠(비관론자)’ 누리엘 루비니 교수는 “재정 적자가 큰 나라들의 재정 건전화 작업이 지연된다면, 심지어 국제 금융시장이 미국과 일본마저도 경계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