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국력을 가늠하는 첫 번째 잣대다.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세계화 속에서는 물론 과거 봉건시대에도 지배 권력의 근원이 되었다. 힘으로 가능했던 지배를 한층 공고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경제 지식으로 무장하고, 이를 현실에 옮기려 노력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학자와 경제이론은 서양(西洋)에 한정돼 있다. 특히 우리 선조 가운데에서도 수많은 경제학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코노미플러스>는 조선시대 경제학자들을 통해 그들의 이론과, 경제 현실에서 그 이론들이 어떻게 활용됐는지를 알아보는 연재를 시작한다.

지난 세기 말에 겪은 임진왜란의 악몽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17세기 조선은 또 다시 병자호란의 재앙과 마주쳐야 했다. 이 두 전란은 조선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더욱이 양대 전란 사이에는 광해군의 실정과 인조 서인 세력의 쿠데타로 인한 정치적 혼란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나라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농촌 경제와 국가 재정의 파탄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17세기 조선의 최대 과제는 이처럼 피폐해진 국가경제를 되살리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뛰어넘어 17~18세기 조선의 사회경제에 큰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된 사건은 ‘대동법의 실시’와 ‘화폐 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정책은 양대 전란과 뒤이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악화 일로를 걷고 있던 조선의 사회경제를 복원하는 거대한 에너지 역할을 했다.

17세기 조선의 역사를 뒤져 보면, 대동법과 화폐 유통이 한 조정 관료의 줄기찬 노력에 의해 도입되고 또 비로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효종 시절 영의정을 지낸 잠곡(潛谷) 김육(金堉.1580~1658)이다.

대동법 실시를 둘러싼 '대논쟁'

경제사학자들은 조선의 17세기를 ‘대동법을 둘러싼 대논쟁의 시대’라고 부른다. 대동법은 나라에서 현물(지방 토산물)로 받아온 공물을 쌀이나 베로 통일해 받은 일종의 ‘조세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동법은 1608년(선조 41년) 경기도에서 최초 시행된 이후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시대를 거쳐 무려 100년이 지난 1708년(숙종 34년)에야 비로소 전국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다. 조선 시대 국가 재정의 내역에 관한 기록을 모아 놓은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대동법의 시행 과정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중종 때 조광조가 공안(貢案 : 공물을 기록한 문서와 장부)을 개정하자고 주장하였고, 선조 때 이이가 수미법을 시행하자고 청하였다. 임진년(1592년) 이후에는 유성룡이 역시 미곡을 거두는 일이 편리하다고 주장하였으나, 모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선조 41년(1608년)에 이르러 비로소 이원익의 건의로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먼저 경기도에서 시작하고, 마침내 선혜청을 설치했다. 인조 2년(1624년)에 이원익이 다시 건의해 강원도에서 대동법을 시행했고, 효종 3년(1652년)에는 김육의 건의로 충청도에서 시행했다. 효종 8년(1657년)에 김육이 다시 건의하여 전라도의 해안 마을까지 확대 시행했다. 현종 3년(1662년)에 김좌명(김육의 큰아들)이 청하여 산골 마을에까지 아울러 시행되었고, 숙종 3년(1677년)에는 이원종이 건의하여 경상도 지방에도 시행되었다. 숙종 34년(1708년) 황해도 관찰사 이언경의 상소로 황해도에까지 시행되었다.” (<만기요람> ‘대동법’)

이 100년 동안 대동법은 조선 사회가 풀어야 할 최대의 ‘화두’이자 최고의 ‘논쟁거리’였다. 왜 조세정책에 불과한 대동법이 한 세기 동안이나 조선 사회 전체를 뒤흔들 만한 논란을 낳았을까? 그것은 대동법의 시행을 둘러싸고 위로는 조정의 고위 관료들에서부터 아래로는 한 조각의 땅덩어리도 갖지 못한 빈농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 모든 계층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법은 양대 전란과 정치적 혼란으로 붕괴된 나라 경제와 재정을 어떻게 복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 곧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를 둘러싼 정치세력들의 노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세 수취체제의 근본적 취약점

대동법은 양대 전란과 정치적 혼란으로 붕괴된 나라 경제와 재정을 어떻게 복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 곧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를 둘러싼 정치세력들의 노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나라 재정의 가장 큰 자원을 백성, 특히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공물, 곧 조세에 두었다. 당시 조세 수취 체제는 각 지방의 토산물을 중앙 관청에 직접 납부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때 조세 분담은 각 지방 군현의 가구 단위로 부과되었다. 그런데 이 조세 수취 체제에는 근본적인 취약점이 있었다.

첫째 조세 분담은 국가와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과 수량을 기준으로 일방적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가뭄, 홍수 등의 천재지변이나 전란의 참화를 입었다 하더라도 감면받기 어려웠다. 둘째 공물의 규격이나 수량에 대한 검사 과정에서 지방 관리들이 농간을 부려 백성들로부터 몇 배에 달하는 공물을 더 받아 내는 폐단이 생겨났다. 이와 같은 행위를 통상 ‘점퇴(點退)’라고 한다. 셋째 그 지방에서 생산하지 않는 토산물을 공물로 부과 받은 경우나 수송과 저장이 곤란한 토산물 혹은 가뭄이나 홍수 등으로 인해 공물 마련이 곤란한 경우에는 상인이나 관리들이 해당 공물을 나라에 대신 납부해 주었는데, 이때 그들은 몇 십 몇 백 배에 달하는 이익을 붙여 사리사욕을 채웠다. 이와 같은 대납 행위를 두고 ‘방납(防納)’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폐단에도 백성들은 공물을 직접 납부하는 데 따르는 숱한 어려움 때문에 관리나 상인들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장기간 지속되자 농민들은 집과 토지를 버리고 유랑민으로 전락하거나 도적으로 변해 조정에 대항하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조선은 나라 재정이 취약해지고 민심은 이탈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16세기 중종 때 조광조가 조세 수취 체제의 개혁을 주장한 것이나, 임진왜란 이전 이이가 지방 토산물 대신 미곡(쌀)을 거두어들이자는 수미법(收米法)을 주장한 배경에는 이러한 사회경제 현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기존의 조세 수취 체제로 인한 사회경제적 위기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조세 수취의 자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인구가 전란으로 인해 급격하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특히 노동 동원에 시달리다 못해 일정한 거처나 생업을 갖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유동인구의 증가는 조세 수취 체제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선조수정실록> 34년 8월1일자에 실린 이항복의 발언을 보면, 전란 이후 조선의 인구가 10분의1로 줄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8년 비록 경기도에 국한되었으나 대동법이 최초로 시행되고, 다시 1624년 강원도로 확대 실시된 것은 이러한 조세 수취 체제의 위기와 나라 재정의 파탄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동법의 시행은 주요 곡창지대인 하삼도(下三道), 곧 충청, 전라, 경상도를 제외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특히 광해군과 인조 시대의 정치 혼란과 병자호란의 참화로 말미암아 경기도와 강원도의 대동법조차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그 이외 지역은 점퇴와 방납의 폐단이 더욱 극심해져 농민의 유랑민화 혹은 도적화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효종실록> 2년(1651년) 7월24일자에 실려 있는 효종과 조정 관료 이후원의 대화 내용을 보면, 이와 같은 사태의 심각성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효종 : 남쪽 지방의 도적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후원 : 모두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효종 : 이들은 좀도둑과는 비교할 수 없다. 반드시 이들을 지휘하는 큰 괴수가 있을 것이다.

이후원 : 지금 만약 그들 삼남(三南) 지방의 도적들을 모두 제거한다면 살아남을 백성들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효종 : 명나라가 마침내 유랑하는 도적떼에 멸망하였는데, 이 또한 두려워할 만한 존재다.

이렇듯 양대 전란 이후 조선의 조정은 전후 복구 사업은 고사하고 가혹한 공물 납부에 대한 백성들의 저항으로 인해 조세 수취 체제가 붕괴하고 나라 재정은 파탄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김육이 사회경제개혁정책으로 들고 나온 것이 바로 삼남(三南) 지방에 대한 대동법의 전면 실시였다. 김육은 이 개혁정책만이 점퇴와 방납의 폐단을 없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나라 재정을 부유하게 만들어 전후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를 차질 없이 추진할 수 있다고 여겼다.

김육은 인조 16년(1638년) 충청도 관찰사가 된 후, 처음으로 충청도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김육의 건의는 기존의 조세 수취 체제로 인해 큰 이득을 얻고 있던 정치사회 세력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쳐야 했다.

점퇴와 방납폐단 차단

대동법은 기존의 조세 수취 체제에서 두 가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경제개혁정책이었다. 그 하나는 지방 군현의 가구 단위로 부과하던 공물을 토지 소유량을 기준으로 부과하도록 바꾼 것이다. 가구 단위로 조세를 부과하는 방식은 토지의 소유 여부 혹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공물을 납부하도록 했기 때문에 토지를 많이 소유할수록 이익을 얻는 폐단을 낳았다. 또 다른 하나는 지방 토산물을 거두어들인 조세 방식을 일정한 수량의 베나 쌀로 통일해 납부하도록 바꾼 것이다. 이것은 지방 토산물(현물) 납부에 따른 점퇴와 방납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획기적으로 덜어 주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대동법은 토지가 없거나 혹은 적은 토지를 소유한 일반 백성들의 삶과 생업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공물 납부의 부담을 일반 백성들에게 전가시켰던 부농이나 지주, 방납 활동으로 막대한 이득을 누린 상인, 공물 수납 과정에서 부정한 이득을 취한 지방 관리들에게 대동법은 얻을 것은 하나도 없고 잃을 것밖에 없는 개혁정책이었다. 특히 지방의 부농, 지주나 관리들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한편 자신들 스스로가 대토지 소유자였던 중앙의 고위 관료들 역시 대동법 시행으로 이로울 것이 전혀 없다고 여겼다. 이들은 거대한 정치사회 세력을 이루어 김육 등이 내세운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이로 인해 김육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와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는 보수파 간에 ‘대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논쟁은 단순히 대동법의 시행 여부에 관한 찬반 논쟁으로 그치지 않았다. 김육 등은 양대 전란 이후 국가 경제를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백성들의 삶과 생업을 안정시키는 방식에서 찾았다. 대동법은 그러한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에서 핵심을 차지하고 있던 개혁정책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보수파 관료들은 신분 질서를 더욱 강화해 백성들의 불만과 저항을 다스리고, 유랑민이나 도적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더욱 확대하는 방식으로 국가의 안정을 되찾으려고 했다. 때문에 이들은 대동법을 반대하는 대신 호패법의 시행을 전면에 들고 나왔다.

대동법 VS 호패법의 대논쟁

가구 단위로 조세를 부과하는 기존의 징세 방식은 토지의 소유 여부 혹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공물을 납부하도록 했기 때문에 토지를 많이 소유할수록 이익을 얻는 폐단을 낳았다.

대동법과 호패법을 둘러싼 개혁파 대 보수파의 최초 논쟁은 김육이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기 15년 전인 인조 원년(1623년)에 일어났다. 당시 유공량, 최명길 등 보수파 관료들은 백성들의 유랑민화, 도적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호패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김육, 조익 등 개혁파 관료들은 호패법은 사회적, 정치적 불안과 위기감을 한층 조장할 뿐이라며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길만이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일이라며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했다. 특히 김육은 호패법을 철폐하자는 주장에 그치지 않고, 호패를 지니고 다니는 자에게 죄를 주라는 급진적인 주장까지 내세웠다. 백성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민생의 안정도, 나라 경제의 복원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김육 등 개혁파 관료들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 김육이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대동법의 시행을 다시 건의하자, 개혁파 대 보수파 관료를 중심으로 한 정치사회 세력 간의 대논쟁이 재연되었다. 김육은 충청도를 관할하는 최고 책임자가 되자마자 평소 자신의 신념과 정책을 현실에 적용한 정치를 펼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건의는 지방 토호 세력과 양반계층 그리고 방납 활동을 하는 상인과 관리들이 중앙의 관료들과 결탁해 완강하게 반대한 탓에 결국 좌절되고 만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인조 24년(1646년)에 또 한 차례 대동법 시행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지만, 이 역시 보수파 관료들의 반대와 조세 징수량의 감소를 염려한 인조의 우유부단함이 겹쳐 중지되고 말았다. 결국 인조 재위 기간 동안 대동법에 관한 논의는 전혀 진전을 보지 못했다.

효종 시대에 들어서자 김육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관료들은 또 다시 삼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의견을 상소했다. 이에 조정은 다시 개혁파 대 보수파로 나뉘어 ‘대논쟁’을 치르게 된다. 이때 대동법 시행을 반대한 보수파 관료의 수장은 김집이었다. 이 논쟁으로 말미암아 조정은 공납제를 개혁해 대동법을 시행하자는 김육의 개혁 세력(한당)과 대동법을 반대하고 공납제의 일부 개선과 호패법의 실시를 주장하는 김집의 보수 세력(산당)으로 분열하고 만다. 온 조선을 들썩이게 만든 이 대논쟁의 결말은 ‘호서 지역(충청도) 실시, 호남 지역 불가’라는 절충안으로 매듭지어진다. 그 후 5년이 지나 김육이 다시 효종에게 호남 지역에도 대동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청해 해안 주변의 마을에서나마 대동법이 시행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렇듯 김육은 온갖 반대와 저항에 굴하지 않고 수십 년에 걸쳐 끈질기고 집요하게 자신의 개혁사상을 현실의 경제정책에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이와 같은 그의 신념과 노력 덕분에 비로소 대동법은 국가 조세 체제로 자리를 잡아 나갈 수 있었다.

김육에 의해 뿌리를 내린 대동법은 단순히 조세 체제의 개혁에 그치지 않았다. 대동법은 조선 후기 상공업과 시장경제 발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방 토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던 공납제 시절에는 중앙관청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만드는 관영 수공업 이외의 민간 수공업은 발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베나 쌀만을 조세로 수취하는 대동법이 실시되면서부터 중앙관청은 소요 물품에 대한 일정 비용을 지출해 공인(貢人)이라고 하는 민간 상인에게 조달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공인 계층은 관청과 민간 수공업을 중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보통 관청에 납품할 물품을 한양의 시전이나 지방의 장시들을 통해 조달하는 한편 민간 수공업자들과 거래하거나 혹은 직접 수공업장을 개설하기도 했다. 농민들 역시 쌀이나 베를 마련해 조세를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생산한 여러 다른 농산물이나 물품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상업적 농업을 경험하거나 상품 교환 경제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것은 다시 시장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동법은 이렇듯 조선 후기 농업, 수공업, 상업의 생산 및 교환 활동을 자극하면서 시장경제의 싹을 틔웠다.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들어와 조선이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대동법과 같은 경제정책으로 양대 전란의 후유증을 말끔히 털어 내고 새로이 사회적, 경제적 활력을 되찾은 17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17세기를 들여다보면, 훌륭한 경제 관료 한 사람과 좋은 경제정책 하나가 국가 경제와 백성들의 삶을 백 년 정도는 거뜬히 부유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만든다.

조세 정의를 통한 분배론

김육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성장론자’라기보다는 ‘분배론자’에 가까운 경제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조세 정의를 통한 분배에 큰 무게를 두었다. 당시 나라 재정의 가장 큰 몫은 백성들이 납부하는 조세였다. 또한 백성들의 입장에서 조세 납부는 갖가지 폐단으로 말미암아 삶과 생활의 근간이 뒤흔들릴 만큼 큰 부담이었다. 따라서 국가 경제 복원과 분배정책의 핵심을 조세 수취 체제의 개혁에서 찾은 김육의 판단은 정확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농민들이 조세 부담을 못 이겨 집과 토지를 버리고 유랑하거나 도적으로 변하는 사회경제 현상은 곧 대다수 백성들을 빈곤하게 만든 반면 일부 대토지 소유자나 부농, 지주 그리고 부패 관료와 상인들만을 부유하게 하는 ‘부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더욱이 앞서 지적했듯이, 공납제 덕분에 일부 부유 계층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조세 부담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조세 납부를 회피해 더욱 재산을 불려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농업을 근본으로 하는 조선의 국가 경제를 뒤흔들고, 왕실 및 관청의 재정을 궁색하게 하는 근본 원인이었다.

이에 김육은 조세 정의의 실현이야말로, 사회 계층 간의 경제적 불균형을 해소하고 나라 경제를 안정시킬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자신의 경제사상을 현실 정치에 옮겨 적용한 경제정책이 바로 ‘대동법’이었다.

김육의 경제사상과 대동법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그가 효종이 즉위한 해(1649년)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확대 시행할 것을 주청한 상소문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먼저 백성들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그것은 첫째 탐관오리들이 자신들을 살찌우고 권력이 있는 세도가를 섬기는 일에만 충실하기 때문이고, 둘째 지방의 세력가와 부자들이 제멋대로 토지 소유를 늘리기 때문이며, 셋째 사신 행차가 많아 대접하고 물품을 조달하느라 백성들이 곤궁해진다는 것이다. 곧 탐관오리, 권세가, 토호, 부자, 사신들은 나날이 부유해지는 반면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곤궁해질 뿐이라는 지적이다.

김육은 이와 같은 ‘부익부 빈익빈’의 구조를 혁파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대동법’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상소문에서 그는 대동법은 부역과 조세를 균등하게 해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기 때문에 진실로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는 훌륭한 정책이라고 했다. 또한 국가의 정책이란 마땅히 가난하고 곤궁한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입안하고 집행해야지, 부호들이 대동법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 뜻을 좇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렇듯 김육은 경제정책의 핵심을 소수의 부유 계층이 아닌 다수의 가난하고 곤궁한 백성들에 두어야 한다는 ‘분배론자’의 입장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안민익국(安民益國), 선 민생 후 부국론

오늘날에도 성장론자들은 1인당 국민소득, 연간 수출량, 경제성장률, 종합주가지수 등 ‘국가’ 차원의 경제 지표를 중시하는 반면 분배론자들은 도시 계층 간 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나 도시·농촌 간 소득 불균형을 나타내는 경제 지표에 더 관심을 둔다. 즉 국가 차원의 경제 지표가 성장론자들의 관심사라면 국민(개인) 차원의 경제 지표는 분배론자들의 관심사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육은 성장론자보다는 분배론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이 때문인지 그는 오늘날의 분배론자들처럼 ‘국가’보다는 ‘백성(개인)의 삶’을 더 우선시했다. 이러한 그의 경제사상은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에 이롭다’는 안민익국론(安民益國論)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안민익국론을 요즘 식 표현으로 풀어본다면, ‘선(先) 민생 후(後) 부국 혹은 선 분배 후 성장’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백성들이 바라는 것은 하늘도 반드시 따르기 때문에 임금은 백성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충청도와 전라도 백성 몇 백만 명이 원하는 대동법을 단지 50여 명에 불과한 지방 수령들의 반대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다고 했다.

또한 훌륭한 임금은 국가에 이롭지만 백성에게는 해로운 정책을 결코 강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곧 국가나 관청의 이익과 백성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를 경우 마땅히 백성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는 백성들이 고르게 잘 살아야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했다. 백성들이 일정한 거처를 두고 생업에 전념할 의욕을 갖지 못한다면 그 원망이 하늘과 같은 큰 힘을 지녀 나라의 안정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백성의 삶이 안정된 후에야 비로소 나라도 부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 김육의 기본 생각이었다. 그가 그토록 끈질기고 집요하게 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이유 역시 먼저 백성의 삶이 안정되고 나라에 대한 원망이 없어져야, 나라의 재정과 경제 또한 부유해지고 안정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육 경제사상의 게승자들

대동법 이외에도 김육은 조선 후기 사회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여러 가지 정책과 경제사상을 펼쳤다. 조선 후기 상공업을 발달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주목받는 화폐의 유통 역시 김육에게서 비롯되었다.

대동법 이외에도 김육은 조선 후기 사회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여러 가지 정책과 경제사상을 펼쳤다. 조선 후기 상공업을 발달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주목받는 화폐의 유통 역시 김육에게서 비롯되었다. <만기요람>은, 효종 2년(1651년) 정승의 자리에 오른 김육이 지방 수령들로부터 구리와 철을 모아 화폐를 주조한 것이 돈의 시초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그 후 100여 년을 내려오면서 ‘화폐 혁파 여부’를 두고 여러 번 조정 내에서 논쟁이 있었으나 마침내 없애지 못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김육이 첫 관문을 연 ‘화폐 유통’은, 숙종 4년(1678년)에 국가 화폐인 상평통보가 발행되어 전국으로 보급 확산될 수 있는 주춧돌 역할을 했다. 이로써 조선은 본격적으로 상품·화폐 경제의 시대를 활짝 열 수 있었다.

이외에도 김육은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는 수레 사용과 도로 확장 및 개선을 주장했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수차 제조와 보급에도 힘썼다. 이러한 김육의 경제사상은 18세기 들어 상공업 발달과 상업적 농업의 진흥을 역설한 북학파 실학자들에 의해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북학(北學)’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김육은 평생 동안 오로지 수레와 화폐 사용 두 가지 시책을 위해 노력하고 마음을 썼다”고 한 대목은, 북학파 실학자들이 그의 경제사상과 정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이 때문에 일부 역사학자들은 김육을 ‘북학파의 원조 혹은 선구자’로 여기기도 한다.

여하튼 김육은 근대적인 상품 화폐 및 시장경제가 막 싹을 틔우기 시작한 17세기 조선 사회에 거대한 뿌리를 드리운 사람이다. 특히 경제개혁과 상공업 및 시장경제의 장려를 주창한 후대 실학자들 대부분이 현실 정치나 정책 집행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최고 관료의 신분으로 자신의 경제사상 및 개혁안을 현실 정책으로 입안하고 실천했다. 조선 역사 속 인물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김육처럼 사상과 실천이 밀착되어 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이 때문에 김육은 조선사 최고의 경제 관료 혹은 관료 경제학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