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개화 통한

자주적 부국(富國)의 길 밝혀

조선의 18세기가 최고의 개혁군주와 수많은 실학자들이 등장해 ‘사상과 문화의 르네상스’를 구가한 ‘위대한 100년’이었다면, 정조대왕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 19세기는 특정 세도가문이 정치·경제 권력을 독점·전횡한 ‘반동과 보수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18세기와 단절한 19세기 초·중엽 70년의 시간과 공간이 이후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식민과 오욕의 역사’로 만든 시작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그 70년의 시·공간이 18세기를 계승한 역사였다면, 분명 우리의 근·현대사는 다르게 쓰였을 것이다.

18세기를 뒤덮은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뜻과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위한 체제 개혁’의 꿈은 19세기로 들어서자마자 노론(老論) 당파 및 세도권력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혀버렸다. 그렇다면 18세기에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창조적 에너지를 발산했던 ‘실학과 개혁’의 자취는 정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세도권력에 쫓겨 유배지로 혹은 향촌으로 쫓겨나 야인(野人)으로 전락했을망정, 실학자들은 끊임없이 개혁의 꿈을 꾸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자신의 개혁론을 갈고 다듬어 <경세유표>, <목민심서>를 쓴 다산 정약용과 향촌에서 <임원경제지>를 저술한 풍석 서유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개혁의 희망이 모두 사라진 가운데에서도 몇몇 뜻있는 학자들은 비록 서재에서나마 실학의 명맥과 큰 뜻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했다. 최대 규모의 실학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오주연문장전산고>을 저술한 이규경과 <인정(人政)>과 <기측체의>를 통해 국정 개혁과 실증적·과학적 학문을 주창한 최한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 실학자 혹은 근대 개화사상의 개척자

그러나 실학의 정신을 이어받아 19세기에 다시 체제 개혁의 원대한 뜻을 펼친 사상가를 꼽는다면,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환재(桓齋) 박규수(朴珪壽)다. 그가 조선의 마지막 실학자이면서 또한 실학을 근대 개화사상으로 전환시킨 선구자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박규수가 조선의 마지막 실학자이자 최초의 근대 개화사상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연암 박지원이 자리하고 있다. 박규수는 박지원의 친손자다. 그는 박지원이 세상을 뜬 지 2년이 지난 1807년에 태어났다. 따라서 박규수는 가르침은커녕 박지원의 모습조차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박규수는 젊은 시절을 온전히 박지원의 학문과 사상의 울타리 속에서 보냈다.

박규수의 아버지이자 박지원의 아들인 박종채는 직접 <과정록(過庭錄)>을 저술해 박지원의 언행(言行)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박종채는 1813년 봄부터 1816년 초가을에 이르기까지 4년여의 시간과 공을 들여 박지원의 학문과 북학(北學)의 큰 뜻을 정리했다. 그는 박지원의 사상이 후대에까지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과정록>을 썼기 때문에, 가문을 이을 장자(長者)인 박규수가 그 뜻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어렸을 때부터 박지원의 북학사상을 익혔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더욱이 박규수는 22세 때인 1828년 당시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의 명을 받아 박지원의 글을 모두 정리해 <연암집>을 만들어 바치는 작업을 했다. 이때 그는 ‘학문이란 모두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실제나 실용과 관계없는 학문은 학문이라고 할 수 없다’는 실학사상을 깊게 체득했고, 또한 자신이 나아갈 길은 오로지 ‘이용후생, 부국강병, 경제지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박지원과 북학파의 ‘실학과 이용후생’이 박규수의 삶과 사상에 얼마나 깊게 자리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박규수가 홍대용의 손자인 홍양후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보여준 경제(經濟)와 이용후생의 방안은 양 가문의 선덕(先德: 박지원과 홍대용)께서 평생토록 힘써 노력해 마련한 것들입니다. 일찍부터 한두 가지라도 시도해 보았다면 어찌 좋은 결과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천한 관습과 풍속 탓에 끝내 이 방안들을 본받아 좇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사용도 하지 못하고 그치고 말았습니다. 조정에서 국가의 사업과 정책을 도모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이 방안들을 실천하는 일을 시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매년 사신의 행차에서도 다른 일만 급급하게 여기는 바람에 마침내 뜻이 여기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예전부터 이처럼 해왔는데 지금 누가 이러한 어리석음을 바꾸고 고쳐 그 길을 개척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일찍부터 항상 이러한 일을 안타깝게 여겨 탄식했고, 몸소 이 방안들을 실천해 우리나라를 옛날 중국의 발전된 노(魯)나라와 같이 변개(變改)시키고 싶었습니다.”

- 박규수, <환재집> ‘홍양후에게 답한 편지’ 중에서  

북학파의 사상을 온전히 계승해 조선의 개혁과 부국강병을 이루겠다는 박규수의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박규수는 1861년과 1871년 두 차례의 청나라 사행(使行)을 통해 북학파 실학사상가에서 근대 개화사상의 개척자로 변모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북학파는 ‘청나라를 배워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기치를 내세웠다. 실제 북학파 학자들이 활동한 18세기 중·후반 청나라는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닌 초강대국이었기 때문에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의 북학론은 매우 정확한 국제적 안목을 갖춘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그러나 박규수가 청나라에 첫 발을 디딘 1861년 청나라는 몰락해 가는 ‘제국(帝國)’에 불과했다. 서구 열강의 침략 앞에 북경이 함락당하고 황제가 열하로 몸을 피하는 상황에 이르도록, 이미 청나라는 ‘종이호랑이’로 전락해 있었다. 박지원이 1780년에 청나라에 들어갔으니 불과 80여 년 만에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국제 정세는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었던 셈이다. 이때 박규수는 청나라가 조선을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막아주는 방파제의 역할을 전혀 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서구 열강의 과학기술과 이용후생의 방법이 청나라의 그것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청나라와의 통상을 통해 선진 문물을 수입해 조선을 부국강병한 나라로 만든다는 북학파의 사상이 이미 낡아버렸고, 이제는 통상개국의 범위를 청나라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일본 포함)으로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조선이 스스로의 힘으로 서구 열강과 개국통상(開國通商)을 할 때만 자주적인 부국강병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훗날 정계에서 은퇴한 박규수가 김옥균에게 지구의를 빙글빙글 돌려 보여주면서, “오늘날 중국이 어디에 있는가. 저리로 돌리면 미국이 중국(中國)이 되고 이리로 돌리면 우리 조선이 중국(中國)이 된다. 어느 나라이건 가운데 오게 돌리면, 그곳이 중국(中國)이다. 오늘날 중국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조선이 주체적으로 국제 정세에 대처해 나가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부국강병과 부국안민을 이루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박규수의 생각은 이후 ‘자주적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주창한 근대 개화사상의 모태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이렇듯 박규수는 북학파(北學派)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한 측면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실학자였던 반면, 조선이 스스로의 힘으로 청나라를 넘어서 서구 열강(일본 포함)과 통상개국(通商開國)해서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창한 측면에서는 최초의 근대 개화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박규수의 경제사상 1   민본 중심의 부국론(富國論) :

백성이 부유해야 나라 역시 부강(富强)해진다.


박규수 경제사상의 기초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민본 중심의 부국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민본(民本)은 유학의 위민(爲民)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박규수의 민본은 유학에서 말하는 사대부 곧 사(士)라는 지배계급이 백성들을 위해 세상을 다스린다는 개념이 아니라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이 평등하다는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사농공상의 차이는 신분 혹은 계급적인 차이가 아니라 단지 직분 혹은 직업의 차이일 뿐이라고 여겼다.

“대체로 사람은 모두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덕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누군들 사(士)가 아니겠는가? 사(士)가 농토에 부지런히 힘써 땅의 재물을 기르면 농민(農民)이라고 일컫고, 사(士)가 다섯 가지 재료로 꾸미며 다듬고 백성들의 기물을 변별해 이용후생의 물건을 개발하면 공장(工匠)이라고 이르고, 사(士)가 물건의 있고 없음을 헤아려 교역해 사방의 진귀한 물건을 통하게 해 먹고 산다면 상인(商人)이라고 일컫는다. 그 몸은 사(士)이지만, 그 직업은 농민(農民)·공장(工匠)·상인(商人)이다.”       

- 박규수, <환재집> ‘잡문(雜文)’ 중에서 

근대 경제학의 ABC는 이렇듯 신분 차별을 뛰어넘은 평등 의식이 경제와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사상적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박규수는 신분 차별이나 억압 특히 양반사대부의 농공상(農工商)에 대한 착취와 수탈 없이 사민(四民)이 자유롭게 생업에 종사하고 자신의 직분에 충실할 때 진실로 나라가 부유해지고 백성은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다고 여겼다. 그가 염정(鹽政)을 다룰 때 사상인(私商人)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옹호한 것이나 진주 민란의 안핵사(按使)로 파견되어 가서 삼정(三政)의 문란을 바로잡아 농민의 생계수단과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제시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예전에는 민간의 개인 상인이 염전을 일구는 백성에게 미리 소금 값을 지불하거나 혹은 대부해주었다. 이것은 염전을 일구는 백성들의 급박한 사정을 헤아린 것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왜인가? 개인 상인들이 관청의 염전(鹽田)에서 소금을 사면, 관리들이 권세를 부려 상인들을 억류하고 물품을 몰수해 관청의 소속으로 만든 다음에 뇌물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풀어준다. 이 때문에 개인 상인들의 어려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백성들이 사사로이 설치한 염전이 많이 있는데, 소금을 사고파는 권한은 어째서 공전(公田)에서만 있단 말인가. 이 때문에 상업 활동이 막혀 끊어지고 재물과 화폐가 제대로 유통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공염(公鹽)과 사염(私鹽)을 똑같이 교역하게 한다면 관청과 백성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고르게 된다. 그러나 관리들이 권세와 이익의 계책을 부려 공염이 팔리기 전에는 어떠한 상인도 거래할 수 없게 하면, 소금을 먹기 위해 사고자 하는 사람은 많고 소금 물량은 적기 때문에 소금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여 관청에서는 원래 가격보다 오른 가격에 소금을 팔아 이익을 챙기고, 또한 소금 가격이 떨어지면 소금 상인에게 원래 가격대로 사게끔 압력을 가한다. 이러면 연안의 백성이 피해를 보게 된다. 소금 가격이 오른 까닭은 공염 탓인데, 중개인의 물품 거래마저 가로 막으면 소금 가격이 올라서 산골 마을 백성들은 더욱 소금 구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리고 상인들 역시 가격이 높을 때 소금 거래를 하지 못하고 헐값일 때 거래하기 때문에 마침내 본전마저 잃고 마는 피해를 입는다. 이 모든 해로움이 공염으로 인해 발생하는 폐단이다. 따라서 공염을 혁파하여 백성의 고통을 없애해야 한다.”

- 박규수, <환재집> ‘경상우도암행어사별단’ 중에서

“난민(亂民)들이 스스로 죄에 빠져든 까닭은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의 삼정이 문란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 살을 베어내고 뼈를 깎는 것과 같은 고통은 환곡(還穀)이 가장 큽니다. 진주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고, 단성현은 가구 수가 수천에 불과한데 환곡은 9만9000여 석이나 되고, 적량진은 가구 수가 1백에 불과하지만 환곡은 10만8900여 석입니다. 이 때문에 환곡을 보충할 방법은 모두 올바른 다스림을 어기고 사리를 해치는 것일 뿐입니다. 오로지 피해를 입고 고통을 겪는 것은 우리 백성들뿐입니다. 마땅히 이와 같은 상황에 미쳐서는 특별히 하나의 관청(삼정이정청)을 설치해야 합니다. …… 한 도(道)에 먼저 시험해 보고 차례로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폐단이 사라지지 않고 백성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을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 

- 박규수, <환재집> ‘환곡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관청 설치를 청하는 상소’ 중에서

특히 1861년 청나라 사행(使行)에서, 박규수는 청나라의 급격한 쇠퇴는 다름 아닌 ‘내치의 문란이 농민 반란(兵亂: 태평천국의 난)을 초래했고, 이것이 서구 열강에 틈을 주어 침략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개혁을 통해 백성의 삶과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백성의 삶이 안정되고 부유해지면 나라 역시 부강해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된다면 서구 열강의 침략에도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박규수의 경제사상 2   통상개국론(通商開國論) : 서구 열강과 통상개국해야만 스스로의 힘으로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 

청나라의 현실을 목격한 이후 ‘민본 중심의 부국론(富國論)’이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한 대내 전략 곧 사회·경제 개혁으로 자리를 잡았다면, ‘통상개국론’은 서구 열강과의 관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주도하면서 최대의 경제적·외교적 이익을 얻겠다는 대외 경제·외교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규수는 18세기 실학파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해외 통상을 주장한 북학파 사상의 계승자다. 따라서 그가 해외 통상에 대한 어떠한 거부감도 없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8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박규수는 통상론자라기보다는 해방론자(海防論者: 오랑캐인 서구 열강을 방어하자는 쇄국론)의 모습을 보인다. 필자 나름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서학(西學)에 대한 탄압과 위정척사 및 쇄국론이 압도적인 정치 상황 탓에 그가 공적(公的)인 공간이나 공론의 장(場)에서는 통상개국을 주장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청나라 사행을 다녀온 후, 그는 공공연하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통상개국할 것을 주장한다. 청나라가 서구 열강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할 수 없음을 확인한 이상 자주적인 개국(開國)을 통해 서양의 선진 문명과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고, 또한 통상(通商)으로 경제적·외교적 이득을 얻는 것이 조선이 나아갈 길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박규수가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 선진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고 필요한 물산(物産)을 수입해 부국강병을 꾀하고자 했다는 사실은, 그의 제자인 김윤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윤식은 일찍이 박규수가 “미국은 지구상의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토를 확장하려는 욕심도 없다고 하면서 우리가 먼저 수교 맺기를 청해 굳은 맹약을 맺는다면 고립의 우환을 모면할 수 있다”고 했다고 전해주고 있다. 특히 박규수는 세계 각국과 통상하는 전략이 서구 열강이 부강함을 누릴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라고 보는 한편 그들이 조선을 침탈하는 까닭 역시 통상에 목적이 있으므로 우리가 제대로 대처만 한다면 개국이 해로움보다는 오히려 커다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양의 각 나라는 오로지 교역과 상업 활동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출항하는 상선(商船)을 모두 장부에 기재하고 그곳에 실은 화물을 계산해 세금을 받아 나라의 재정으로 사용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자랑하는 부강(富强)의 방법입니다. 그들은 세계 여러 나라와 통상을 하는데 유독 우리나라와는 통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몇 해에 걸쳐 우리나라를 침입해 사단을 일으킨 까닭 역시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 박규수, <일성록> ‘고종 11년 6월25일’ 중에서

“과거에 중국은 강남(江南) 지방에서 전쟁을 할 때 서양의 대포를 많이 사서 사용했기 때문에, 서양인들은 대포를 제조해 경제적으로 큰 이득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국이 서양의 대포를 모방해 제조하고 있기 때문에 서양인은 이익을 잃게 되었습니다. 또 예전에는 중국 상인들이 화륜선을 세내어 사용했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큰 이득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이 또한 화륜선을 모방해 제조하기 때문에 서양인은 이익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서양인들은 아편으로 큰 이득을 얻었는데, 지금은 중국도 아편을 제조하기 때문에 서양인들이 이익을 잃었다고 합니다.”

- 박규수, <일성록> ‘고종 9년 12월 26일’ 중에서

박규수가 서구 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하면 그들로부터 부강해지는 방법을 배울 수 있고, 또한 그들과 통상을 하면 커다란 경제적 이득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박규수는 미국이나 일본의 수교 요청에 조정이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고, 일본은 지리적으로 근접한 탓에 여러 가지 경제적·외교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가장 우선적인 통상개국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박규수의 ‘통상개국론’은 북학파의 ‘해외통상론’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러나 북학파의 ‘해외통상론’이 외국(청나라)의 선진 문물과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상품 교역을 통한 부국(富國)을 지향하는 중상주의적 입장에 서 있었다면 박규수의 ‘통상개국론’은 중상주의 이외에 서구 열강에 맞서 조선의 독립과 자주적 발전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덧붙여져 있었다. 따라서 그의 통상개국론은 나라와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부국사상(富國思想)’과 더불어 서구 열강의 침입을 막기 위한 ‘강병사상(强兵思想)’의 요소를 두루 담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박규수의 경제사상 3   토지개혁론 :

토지를 균분(均分)하고 농민과 병사를 일치시켜야 한다.


박규수의 토지개혁론은 박지원와 서유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아버지 박종채가 쓴 <과정록>를 읽고 <연암집>을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 박규수는 할아버지 박지원의 토지개혁론인 한전론(限田論)을 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서유구과 박규수의 인연에는 박지원이 자리하고 있다. 어렸을 때 박지원의 집을 드나들며 학문을 배운 서유구는 평생토록 박지원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말년의 서유구는 박규수에 대해 남다른 기대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박규수 역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큰 감명을 받고, 그곳에 담긴 진보적인 경제사상에 깊은 존경심을 표현했다. 이러한 까닭에 박규수는 모든 토지의 국가 소유와 경자유전을 원칙으로 하는 정전제(井田制)를 이상으로 삼은 박지원과 서유구의 경제사상에 깊게 공감한 듯하다. 아울러 두 사람이 현실적인 토지개혁안으로 주장한 한전론 역시 적극 수용했다.

박규수가 약관의 젊은 나이에 저술한 <상고도설(尙古圖說)>에 따르면, 그가 정전제와 균전제(均田制)를 토지제도의 근본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평소 정전제와 균전제 하에서 경작자로서 농사를 짓다가 전쟁이 발발하면 병사가 되어 싸우는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를 시행하면 모두 생업을 잃지 않기 때문에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의 삶은 안정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대토지 소유의 폐단을 없애고 균전제를 통해 실제 농민(경작자)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하고 병농일치제로 경제와 군사제도를 개혁한다면 부국강병과 경제적 안정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박규수는 자신의 토지개혁론을 공론의 장에서 정면으로 제기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시행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삼정(三政) 가운데에서도 전정(田政)과 환곡(還穀)의 문제를 중심으로 부분적인 경제 개선책을 찾았을 뿐이다. 더불어 통상개국을 통한 체제 개혁과 부국강병론을 중시한 탓에 토지 소유의 개혁 문제에 대한 관심과 문제제기를 부차적으로 여겼지 않나 싶다. 훗날 중농주의 경제학자들의 토지개혁사상을 계승한 사람들이 ‘농민이 주도하는 토지혁명’을 통해 근대의 길을 열고자 한 반면, 북학파와 박규수의 통상개국과 부국강병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상층 계급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정치혁명’을 통해 근대화의 길을 걷고자 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해볼 수 있다.       

개화파(開化派) - 박규수 경제사상의 계승자들

박규수는 68세가 되는 1874년 우의정을 사임한 후 조정에서 완전히 물러나 재동의 자택에 칩거한다. 그는 쇄국정책을 버리고 서양에 문호를 개방할 것을 내세운 자신의 요청이 흥선 대원군에게 거듭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더 이상 조정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음을 깨닫고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양반층 자제들을 중심으로 신진 개혁 세력을 길러 자주적인 개국과 근대화의 힘을 준비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당시 박규수의 재동 집 사랑방에 모여든 인물들은 김옥균, 박영효, 박영교, 김윤식, 서광범, 홍영식 등이었다. 모두 훗날 개화당(開化黨)을 이루어 조선을 근대적인 체제와 국가로 개혁하기 위한 정치혁명 곧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역들이다. 따라서 개화당과 갑신정변의 큰 뜻은 이미 10여 년 전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박규수는 이들에게 북학파의 실학사상에서부터 자신이 보고 배운 중국의 근대화 노력에 대한 견문과 지식 그리고 서양의 근대 제도와 선진 문물은 물론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까지 자세하게 가르쳤다.

박규수가 이들 개화파 지식인들에 얼마나 큰 사상적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서는 1931년 이광수가 박영효와 나눈 인터뷰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인터뷰에 관한 기록에 앞서 이광수는 갑신정변에 대해 “조선을 구미식의 새로운 정치사상-자유민권론, 오늘날 말로 봉건에서 부르주아에 이래(移來)하는 신사상으로 혁신하려던 대운동이다. 그것이 실패했기 망정이지 만일 프로그램대로 되었다고만 하면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상당하는 의미를 가져 조선사의 진로는 실상 밟아온 것과 다른 방향을 취했을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고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제 박영효가 개화사상에 대해 말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러면 당시(갑신정변)의 혁명가들이 이러한 신사상에 감염되게 된 경로는 어떠한가? 이에 대한 필자의 질문에 춘고(박영효)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신사상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내 백형(필자 왈. 백형이라 함은 영교를 가리킴이다)이 재동 박규수 집 사랑에 모였지요.’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서 이유원이 영의정이었을 때 우의정으로 있다가 이유원과 불합하여 괘관(卦冠: 사직)하고, 재동 집에서 김옥균 등 영준한 청년들을 모아놓고 조부의 <연암문집>을 강의도 하고 중화 사신들이 들고 오는 신사상을 고취하기도 했다. ‘<연암집>에 귀족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지요’ 하고 춘고(박영효)는 당시 신사상이란 것은 평등론, 민권론이라고 말했다.”

- 이광수, <박영효 씨를 만난 이야기> 중에서

이처럼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시작된 신사상은 조선의 자주적인 개국과 근대화를 주창하며 ‘위로부터의 정치혁명’을 통해 입헌군주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길을 활짝 열고자 한 개화파(開化黨: 개화독립당)의 조직화로 발전해갔다. 그리고 북학파와 박규수의 사상이 서재(書齋)나 재야(在野)에 머문 반면 이들 개화파의 신진 개혁가들은 정치권력을 장악해 일거에 조선을 자신들이 구상한 체제로 개변(改變)하고자 했다.

앞서 여러 차례 지적했듯이 북학파와 개화파는 박규수를 매개로 해 사상적 사제(師弟)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북학파 학자들이 봉건 왕조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꿈꾼 반면, 박규수 사상의 계승자들은 봉건체제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근대체제의 혁명을 꿈꾸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성향을 강하게 띤 이유 역시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때 박규수는 북학파와 개화파의 중간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즉 봉건 왕조체제의 개혁을 통해 통상개화와 부국강병을 이루려고 한 점에서는 북학파에 가깝지만, 관직에서 물러난 말년에 이르러서는 훗날 젊은 개혁가들이 봉건 왕조체제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근대화 혁명을 모색할 수 있도록 사상적 기초를 닦아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광수의 지적처럼,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성공해 조선이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어 독립국가로 우뚝 섰다면 분명 박규수는 ‘근대화의 선구자’ 혹은 ‘근대 국가의 아버지’로 추앙받지 않았을까? 그것은 19세기 후반 조선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꿈꾸었던 젊은 개혁가들의 사상적 뿌리가 모두 박규수에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메이지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근대화 모델을 접하기 이전에 이미 <연암집>과 박규수의 가르침을 통해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 모델을 모색했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