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IT강국’ 이미지는 국내 IT인력의 ‘해외 수출’에도 적잖은 기여를 하고 있다. 국내 휴대폰 소프트웨어 개발 벤처기업에서 근무하던 박상영씨는 서른두 살의 나이에 해외 취업에 나섰다. 보다 넒은 견문과 전문지식을 익혀 전문가로 거듭나겠다는 꿈을 가진 박씨의 일본 취업기.

늘은 일요일이다. 일본에 온지 한 달 보름이 지난 지금, 주말은 딱히 갈 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는 나에겐 지루하기만 한 시간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도쿄 바로 위에 위치한 사이타마 현의 오오미야(大宮)라는 곳이다. 회사도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는 제이텍 엔지니어스라는 곳으로, 전기 전자, 소프트웨어, 기계 설계 분야의 엔지니어를 고용한 뒤 필요로 하는 업체로 파견 보내는 인재파견회사다. 소속된 엔지니어는 약360~370명 정도로 각 기업체 사업장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본사 사무실에는 관리직원 30여 명이 있을 뿐이다.

나는 아직 파견 나갈 업체가 결정되지 않아, 회사에 속해 있지만 업무는 없는 어정쩡한 상태다. 지난주부터 몇 군데 업체와 면접을 봤고, 회사 사람들 말로는 며칠 있으면 업체로 파견을 나가게 될 것 같다고 한다. 일본에서의 업무는 어떤 스타일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한다.

소프트웨어 개발자 3년 경력이 큰 힘

일본에 오기 전, 나는 한국의 모바일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는 벤처기업에서 3년간 근무했다. 대구에 있는 경북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한 나는 2002년 10월, 교내 벤처기업에 취업한 것을 시작으로 두 개 회사를 다니며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 3년 동안 일했다. 일본으로 취업을 오기까지는 좀 사연이 있다.

94학번인 나와 내 동기들이 취업할 무렵 IMF를 맞았다. 미래는 불확실했고, 무엇보다 졸업 후 취업할 곳이 없었다. 정부가 IT산업을 적극 육성, 외환위기의 돌파구로 삼겠다고 했지만 시작단계였고, 취업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나는 국내보다 해외로 눈을 돌렸다. 대학재학중 나는 산학협력 관계에 있던 모 업체에 학생 신분으로 취업한 적도 있었다. 업체에서 일정한 보수도 받고, 학교에서는 학점으로 인정도 해주는 제도로 ‘샌드위치’라고 불렀다. 취업 수요는 많고, 일자리는 적을 때라 회사 측은 실습생을 구인하려는 의지가 별로 없었다.

산업체 연수기간이 애매해 동기들보다 1년여 늦게 졸업을 하게 된 나는 같은 처지의 친구와 함께 취업재수에 들어갔다. 우리는 부산에 있는 일본 취업 전문학원에서 8개월 동안 일본어를 배우며 일본으로 진출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교내 벤처기업을 설립한 선배들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왔다. 일본 취업이 금세 결정될 것도 아니라서 친구와 나는 그 회사에 입사하기로 했다.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컴퓨터과학을 부전공으로 이수한 나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흥미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임베디드 소프트웨어라고 부르는, 휴대폰 안에 내장된 하드웨어칩을 컨트롤 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였다. 회사에서는 주로 유럽 전송방식(GSM)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개발, 유럽계 회사에 판매했기 때문에 유럽 출장도 종종 갈 수 있었다. CDMA 전송방식을 쓰는 우리나라에서는 소프트웨어를 테스트할 수 없는 환경 덕분(?)이기도 했다.

IMF 취업난이 해외로 관심 돌리게 해

출장을 통해 외국을 다니다 보니 ‘외국에서도 충분히 일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니 유럽 사람들은 유색인종에 대한 꽤나 단단한 거부감이 있었다. 실력 여부를 떠나 단지 유색인종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아래로 내려다보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까지 유럽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회사에서 일하면서도 졸업 후 친구와 일본 취업을 준비하던 때가 가끔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에 관심도 있었고, 내가 하는 분야에서 일본은 배울 것이 있는 나라라는 매력도 있었다. 하드웨어 칩을 컨트롤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일은 새로운 하드웨어 칩이 개발되면 소프트웨어를 처음부터 다시 짜야하기 때문에 좋은 하드웨어 칩으로 작업해 볼 수 있는 경험은 소프트웨어 개발자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이다. 우리나라 하드웨어 칩 개발 수준도 상당하지만 고급 하드웨어 칩을 개발하는 부분에서는 일정 부분 일본이 앞서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뚜렷해졌다.

2005년 11월, 결국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일본으로 가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그만둔 건 아니었지만, 보다 큰 조직에서 보다 많은 기회를 접하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일본 취업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 정도로만 열어둔 상태였다. 국내외 여러 회사에 이력서를 보냈다.

물론 일본의 소니나 파나소닉 같은 기업도 그 중에는 포함돼 있었다. 그 중 가장 먼저 연락을 해온 곳이 지금 몸담고 있는 제이텍 엔지니어스라는 회사였다(나중에야 일본의 소니, 파나소닉 같은 회사는 외국인은 좀처럼 뽑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당시 LG전자에서도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갈을 받은 상태였다. 문제는 제이텍에서는 나와 계약을 하자고 제안한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고민을 안 할 수 없었다. 계약을 할 경우, 잘나가는 대기업 면접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고, 계약을 안 하고 대기업 면접을 선택하면 모처럼 찾아온 일본 취업의 기회를 잃게 되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일본행을 택했다.

고민이 되었지만 일본 취업에 응하기로 한 데에는 길지 않은 직장생활에서 보고 경험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작은 벤처기업인 까닭에 대기업에 파견 나가는 등 잦은 교류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기업이 엔지니어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게 되었다. 4~5년 정도 일본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다면 결코 경력에 마이너스가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2005년 12월에 계약을 하고 2006년 3월에 이곳 일본으로 떠나왔다. 일본으로 취업하겠다고 하자 부모님은 “한국이 IT최강국이라고 하는데 굳이 외국에 가서 배워야 하는 이유가 뭐냐”며 간접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서울에서 비행기로 2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거리에 있지만 외국으로 자식이 취업하러 간다고 하니 걱정이 되셨던 것이다. 내가 왜 일본으로 가려고 하는지, 일본에서 어떤 걸 하려고 하는지 차분히 설명해 드렸다. 결국 나를 믿고 보내는 쪽으로 결론이 났지만 나 역시 일본생활에 대한 자신감으로 차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서의 5년 계획 세워

일본은 위도상 한국보다 아래쪽에 위치해 있지만 겨울엔 제법 쌀쌀하다. 봄기운이 완연해도 문제는 온돌방이 아닌 다다미방이라는 점이었다. 자고나면 찌뿌듯해져서 “이럴 때 따뜻한 온돌에서 지지면 금방 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 때나, 저녁시간 도시락 판매점에서 도시락을 사와 혼자 밥 먹을 때는 조금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인터넷 메신저나 화상전화로 한국의 가족, 친구들과 연락하는 일이 외로움을 많이 잊게 해 주었는데, 오늘은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몽땅 날아가 버려서 한층 더 우울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사실은 일본 음식만큼은 아직까지 질리지 않고 맛있게 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4월부터 본격 취업시즌이다. 1년 예산집행이 4월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회사는 곧 파견업체로 나가 일을 하게 될 거라고 해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고 있다. 솔직히 국내 벤처기업에서 32살이면 팀장을 하면서 부하 직원도 여럿 거느리고 있을 나이인데 일본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니 부담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동안 꾸준히 해온 일본어 공부 덕분에 의사소통엔 어려움이 없지만 혹시라도 있을 차별 등등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자신감이 떨어질 때면 ‘내가 왜 지금 일본에 와 있는가’ 되새기곤 한다. 보수도 한국과 비교할 때 그렇게 많지도 않고, 따뜻한 온돌도 없는 10평 겨우 넘는 다다미방에 앉아 나는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정리한다.

일단 1년 동안은 일본 생활에 익숙해지는 시간으로 삼고 있다. 업무와 생활에 익숙해지면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컴퓨터과학 분야를 보다 전문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찾을 것이다. 업무를 상의할 수 있는 동료도 생겨날 것이고, 나처럼 일본 땅에서 새로운 미래를 캐는 친구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여자 친구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앞으로 할 일을 정리해 놓으면 다다미의 냉기도 어느 결엔가 느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