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역사에서 볼 때 유학(특히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시대는 여성들에게 ‘암흑의 시대’였다. 아주 특별한 사례를 제외하고는 여성들이 학문, 곧 유학의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여기에서 특별한 사례란 집안의 분위기가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어서 여성들에게 남자 형제와 똑같이 학문을 가르친 경우를 뜻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여성들의 공부는 집안의 울타리 바깥으로는 뻗어 나갈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경우를 대표하는 여성으로는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 집안의 허난설헌이나 ‘인물성동이논쟁’으로 조선 유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임성주 집안의 임윤지당 등을 꼽을 수 있다.

가계 경영 능력이 나라 경제의 뿌리로 믿었던 여성 경제학자

허난설헌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시문(詩文)으로 크게 명성을 얻은 여성이다. 학문의 세계에 관해서는 여성들에게 아주 폐쇄적이었던 조선 사회도 시문의 세계에서만큼은 한 자락 길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신사임당, 황진이, 이매창 등 시문의 세계에서 나름의 자리를 구축한 여성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럼 조선의 여성들 중에 시문의 세계가 아닌 학문의 세계에서 명실상부하게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인물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앞서 소개한 임성주 집안의 임윤지당은 성리학에 관한 여러 철학 저술들을 남겼다. 그녀의 철학 저술들은 <임윤지당유고>에 남아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빙허각 이씨 또한 <규합총서>와 <청규박물지>라는 서적을 통해, 조선 후기 들어 활짝 꽃을 피운 실학 분야에서 독자적인 족적을 남겨놓았다.

이들 임윤지당과 빙허각 이씨를 제외하고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던 성리학과 실학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거나 흔적을 남겨놓은 조선의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렇듯 임윤지당은 조선 유일의 여성 성리학자였고, 빙허각 이씨는 조선 유일의 여성 실학자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빙허각 이씨가 저술한 <규합총서>는 당대는 물론 20세기 초반까지 최신식 생활 경제 백과사전으로 널리 인정받고 인용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조선 유일의 여성 경제학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빙허각 이씨는 어떻게 조선 유일의 여성 실학자이자 경제학자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까?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전주 이씨 가문과 훗날 시집간 달성 서씨 가문은 17~18세기 최고의 벌열(閥閱)이자 대학자를 수도 없이 배출한 집안이었다. 특히 그녀의 학문 경력에 탄탄한 배경을 제공한 달성 서씨는 <보만재총서>의 서명응(시할아버지), <해동농서>의 서호수(시아버지), <임원경제지>의 서유구(시동생) 등을 배출한 당대 최고의 학자 가문이었다. 그녀의 남편인 서유본 역시 뛰어난 실학자였고, 빙허각 이씨의 학문 및 저술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사람이었다. 이들 부자형제(父子兄弟)는 소론 출신의 실학자 그룹을 실질적으로 이끈 인물들이기도 했다.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서유구는 8000권의 서책을 보유한 유명한 장서가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빙허각 이씨는 자신의 주요 저서인 <규합총서>나 <청규박물지>를 저술할 때,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의 저서를 적지 않게 참조했을 뿐 아니라 시댁의 엄청난 장서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빙허각 이씨가 조선 유일의 여성 실학서이자 경제서라고 할 수 있는 <규합총서>를 저술한 직접적인 계기는, 1806년 시댁의 작은 아버지인 서형수가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온 집안이 몰락하면서 동호 행정(지금의 서울 용산 부근)으로 쫓겨나다시피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던 일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48세의 나이였던 빙허각 이씨는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부터는 차밭을 경영하면서 집안 살림과 가정 경제를 직접 책임졌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동안 서책을 통해 틈틈이 배우고 익힌 지식과 어려운 가정 경제를 홀로 꾸려나간 경험을 십분 활용해 최신식 생활 경제 백과사전인 <규합총서>를 저술했다.

최신식  생활 경제 백과사전

상품·화폐 관계나 시장경제가 일반적이지 않은 시대나 사회에서는, 생산과 소비 혹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흔하다. 의복을 예로 들어보자. 오늘날에는 옷감을 생산하는 사람과 의복을 제작하는 사람 그리고 유통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다. 이 경우 의복이 필요한 사람은 일정량의 화폐를 지불하고 구입한 후 소비한다. 따라서 오늘날 일반인들의 주요 경제적 관심사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재화를 생산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구입할 수 있는 화폐(임금)의 수입과 지출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빙허각 이씨가 생활하던 18~19세기에-물론 이전 시대에 비해 상품·화폐 관계나 시장경제가 급속하게 발달하고 있었지만-대부분의 일반 백성들은 직접 옷감을 생산하거나 의복을 제작하고 동시에 소비했다. 따라서 이 시대 보통 사람들의 주요 경제적 관심사는 오늘날과는 다르게 직접 재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문제였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특히 의식주처럼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물품들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문제는 당시 사람들이 가정 경제 및 집안 살림살이를 관리하고 경영하는 핵심 사항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식주와 관련해 재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문제는 대부분 여성들이 담당했고 또한 글깨나 공부했다는 지식인들은 의식주 문제에 매달리는 것 자체를 대단히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 때문에 이 문제는 가정은 물론 국가 경제 차원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사항이었지만 기록으로 남겨지거나 이론화되지 못했다.

빙허각 이씨가 저술한 <규합총서>는 바로 이 문제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이론적으로 체계화했다. 한마디로 가정 및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문제나 집안의 살림살이를 관리하고 경영하는 일을 직접 담당한 여성이 저술한 최초의 경제 서적이 바로 <규합총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총서(叢書)라는 제목에 걸맞게 백과사전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크게 주식의(酒食議), 봉임칙(縫則), 산가락(山家樂), 청낭결(靑囊訣), 술수략(術數略)의 다섯 가지 조목으로 나누어져 있다.

먼저 주식의는 가정 및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먹고 마시는 일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장 담그는 것에서부터 술 빚는 법과 밥·떡·과자 및 온갖 반찬류를 만들고 관리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둘째, 봉임칙은 당시 여성들이 가정 경제를 꾸려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길쌈과 의복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봉임칙은 <규합총서>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누에치기, 길쌈하기, 염색하기, 수놓기에서부터 의복을 제작하고 또 수선하는 방법을 총망라하고 있다.   

셋째, 산가락은 논밭을 다스리고 각종 꽃과 대나무를 관리하는 내용에서부터 닭, 소, 말 등 가축을 사육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빙허각 이씨는 이와 같은 일은 ‘시골 살림살이의 대강을 갖춘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것들이 가정 경제 및 집안 살림살이를 관리하고 경영하는 데 있어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강조한 듯하다.

넷째, 청낭결은 집안에서 아이를 기르는 요령과 각종 구급 방법 및 약물 복용 시 금기해야 할 내용들을 담고 있다. 빙허각 이씨는 의식주나 농사, 목축 등과 관련한 살림살이 못지않게 가족들의 건강 문제 역시 집안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항이라고 여겼다.

<규합총서>에서 마지막으로 다루고 있는 조목인 술수략 또한 가족의 건강 및 재액막이와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는 집의 방향과 관련한 길흉 및 각종 재액막이 등을 다루면서, 이와 같은 일들이 무당이나 박수에게 현혹당하지 않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밝혀두었다.

빙허각 이씨는 <규합총서>의 서문에서, 자신이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조목을 밝고 자세하고 분명하게 다루어 누구나 한 번 책을 열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서술했다고 적고 있다. 특히 참고하거나 자료를 인용한 책의 이름을 모든 조항에 걸쳐 자세하게 밝히고, 자신의 의견이나 새로 추가한 내용은 ‘새롭게 입증했다’는 표시를 반드시 해 두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빙허각 이씨가 철저한 문헌 고증과 아울러 자신의 경험을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해 책을 서술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규합총서>는 가정 및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온갖 문제들을 두루 보아 널리 기록하고 자세하고 분명하게 밝혀두었기 때문에 당대는 물론 여성들의 지적 수준과 욕구가 급팽창한 20세기 초까지도 가장 널리 읽히고 인용된 가정 및 생활 경제 백과사전이 될 수 있었다.     

사회적 신분과 지위보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

<규합총서>는 의식주와 관련해 재화를 생산·소비하고 또 집안 살림살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경영하기 위해 저술한 책으로써 일종의 실용 경제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빙허각 이씨가 어떤 경제 의식과 경제 철학을 지니고 있었는가에 관해서는 현재 남아 전해오는 그녀의 글들을 통해 그 단서를 확인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 <규합총서>의 ‘봉임칙 자모전(子母錢)’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을 보면, 그녀가 매우 근대적인 경제 의식의 소유자였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돈 ‘전(錢)’자를 양과쟁일금(兩戈爭一金, 두 개의 창이 금을 다툰다는 뜻)이라고 한다. 돈이 있으면 위태로운 것을 편안하게 할 수 있고 죽을 사람도 살리는 반면, 돈이 없으면 귀한 사람도 천하게 되고 산 사람도 죽게 한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분쟁과 송사 역시 돈이 없으면 이기지 못하고 원망과 한탄 또한 돈이 아니면 풀리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다. 돈이란 날개가 없되 날아다니고, 발이 없으면서도 달리는 것이다.”

빙허각 이씨는 소론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벌열 중 하나였던 달성 서씨 집안으로 출가했다. 비록 48세의 나이에 집안이 몰락해 향촌에 몸을 의탁해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신세로 전락하기는 했지만, 당대 최고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의 울타리 안에서 생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빙허각 이씨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시대의 변화하는 모습’을 냉철하게 꿰뚫고 있었다. 19세기로 접어든 조선 사회는 이미 사회적 신분과 지위가 아닌 돈이 지배하는 사회로 급속하게 이행하고 있음을 그녀는 직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빙허각 이씨가 <규합총서>라는 실용 경제서를 직접 집필한 이유 역시 양반사대부 가문의 여성이라고 할지라도 더 이상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에 기대어서만 살아갈 수는 없다는 현실 인식이 작용한 탓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빙허각 이씨가 <규합총서>를 저술한 시기(1809년)를 전후해, 농촌 생활 및 가정 경제를 관리하고 경영하는 문제에 관한 서적을 내놓은 실학자들이 여럿 등장했다. 박세당의 <색경(穡經)>, 홍만선의 <산림경제>, 서호수의 <해동농서>, 유중림의 <증보 산림경제>가 <규합총서>보다 이전에 출현했고,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는 <규합총서>보다 16년 늦게 세상에 나왔다.  

18~19세기에 들어와 이렇듯 봇물 쏟아지듯이, 여러 실학자들이 농촌 경제 및 향촌 생활에 관한 실용 경제서적을 저술한 까닭은 그만큼 이 문제가 양반사대부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앞서 말했듯이, 거대한 사회·경제적 변화와 시대의 큰 흐름을 직접 보고 들은 실학자들의 현실 감각과 인식이 낳은 산물이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농촌 경제와 집안의 살림살이를 잘 관리하고 경영하는 능력이야말로 나라 경제의 뿌리를 이룬다고 여겼다. 따라서 이 책들은 한 개인 혹은 한 집안의 살림살이를 윤택하게 하기 위한 목적만이 아니라, 나라와 세상을 다스리는 경세지학(經世之學)을 근본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큰 뜻을 갖추지 않았다면, 그토록 두루 널리 옛 서적과 문헌들을 참조·고증하고 또 자신의 경험과 이론을 종합하고 기록하는 일에 온 힘을 쏟지 못했을 것이다.

빙허각 이씨 역시 비록 온갖 속박과 굴레에 갇힌 여성의 몸이었지만 여타 실학의 대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다스리는 경세지학을 근본 배경으로 삼아 <규합총서>를 저술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여성의 신분과 이름으로 저술을 남기는 일을 매우 꺼렸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탓에, 자신의 뜻과 포부를 온전히 다 펴지 못했을 뿐이다.

<규합총서>의 서문을 살펴보면, 그녀가 품은 큰 뜻과 더불어 여성의 몸으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애써 감출 수밖에 없었던 상황 사이에서 겪었을 미묘한 감정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기사년(1809년) 가을에 내가 동호 행정에 살면서, 집안에서 밥 짓고 반찬 만드는 틈틈이 사랑방에 나가 옛 글을 읽었는데, 그 가운데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내용과 산야(山野)에 묻혀 있는 모든 글들을 구해보았다. 손길 닿는 대로 펼쳐보며 견문을 넓히고 또 무료함을 달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옛 사람이 남긴 ‘총명함은 무딘 글만 못하다’는 말을 떠올리고, ‘기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잊어버렸을 때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글을 보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을 가려 뽑아 적고 혹시 따로 내 생각을 덧붙여 다섯 편의 글을 지었다. …(중략)… 대체로 부인이 하는 일이란 안방 밖을 나가지 않는 법이다. 비록 과거와 현재를 통하는 식견과 남보다 나은 재주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문자로 표현해 다른 사람에게 보고 듣게 하려고 하는 일은 아름다움을 속에 품어 간직하는 도리보다 못하다. 하물며 나의 어둡고 어리석음으로 어찌 스스로 감히 글로 표현하는 방법을 생각하겠는가? 비록 책의 내용이 많지만 모두 건강한 삶을 위해 주의해야 할 것들이고 집안을 다스리는 중요한 방법으로 귀결되니, 다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이고 부녀자가 마땅히 연구해야 할 내용일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서문을 지어 집안의 딸과 며늘아기에게 보여준다.”

- 빙허각 이씨, <규합총서> ‘서문’

경제 사상 계승자 서유구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여성이었기 때문에 다 펼치지 못한 빙허각 이씨의 뜻과 포부는 그녀의 시동생인 서유구를 통해 온전히 세상에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빙허각 이씨가 <규합총서>를 지은 지 16년 후에 서유구 역시 농촌 생활 및 살림살이에 관한 본격적인 경제 이론서인 <임원경제지>를 저술했기 때문이다.

모두 113권 52책 250만 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이 책은 농업, 축산업, 수산업은 물론 원예, 요리, 기상, 지리, 의약, 건축, 음악, 서화 등 일상생활 및 농촌의 경제 활동과 관련한 16개 분야의 정보와 지식이 총망라되어 있다. 워낙 방대한 분량에다가 광범위한 분야의 지식을 담고 있어서 여태까지 누구도 한글 번역본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2007년 3월부터 수십 권에 이르는 번역본이 나오기 시작할 것이라고 한다). 서유구는 자신이 <임원경제지>를 저술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나아가 벼슬하거나 물러나 거처하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세상에 나아가 벼슬할 때는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어야 하고, 물러나 거처할 때는 스스로 의식주에 힘쓰고 뜻을 길러야 한다.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정치와 교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서책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향촌으로 물러나 거처하면서 자신의 뜻과 생업을 돌볼 수 있는 서적은 거의 없다. 이에 나는 향촌과 시골 마을에 널리 흩어져 있는 모든 서적을 두루 모아 서책을 저술하기로 했다. 밭 갈고 길쌈하며 씨를 뿌리고 심는 기술과 음식을 만들고 가축을 기르고 수렵하는 방법은 모두 향촌에 사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들이다. 기상과 기후를 예측해 부지런히 농사짓고, 집터를 가려서 집을 짓고, 재화를 늘리고 생활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농기구를 잘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여기에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수집해 놓았다. 화초 재배와 서화에 관한 일도 소홀하게 다룰 수 없다. 의약에 관한 일도 구급을 위해 갖춰야 하고, 길흉과 점복에 관한 일도 대강이나마 익혀 두어야 하므로 아울러 수록했다. 사람이 사는 지방이 제각각 다르고, 생활 습관과 풍속 또한 같지 않다. 생활하는 방식도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있고 우리나라와 외국의 구별이 존재한다. 어찌 중국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해 그대로 우리나라에서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필요한 방법들을 취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렸다.”

- 서유구, <임원경제지> ‘자서(自序)’

이 기록을 통해 서유구가 <임원경제지>를 저술한 목적이 빙허각 이씨가 <규합총서> 서문에서 밝힌 ‘저술의 변’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서유구가 형수인 빙허각 이씨의 영향을 받아 <임원경제지>를 저술했다는 사실 또한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실제 서유구는 어린 시절 빙허각 이씨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또한 빙허각 이씨의 행적과 저작이 자세하게 밝혀질 수 있었던 배경 역시 서유구가 지은 ‘빙허각 이씨 묘지명’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하튼 <규합총서>는 분명 규방(閨房)에 갇힌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은 실용 경제서적이었지만 ‘집안의 딸과 며늘아기에게 보여준다’고 할 정도로 빙허각 이씨가 스스로의 뜻과 포부를 규제하며 저술한 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약용, 박지원 등의 인물과 동시대를 살면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대학자이자 실학자였던 서유구는 그 어떤 제약과 속박도 없이 빙허각 이씨가 품었던 뜻을 펼쳐 보일 수 있었다. 따라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는 빙허각 이씨가 <규합총서>에 담고 싶었지만 차마 담지 못한 뜻과 포부까지 온전하게 계승해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빙허각 이씨의 경제 사상은 서유구에 와서 비로소 활짝 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