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플러스>는 한국산업인력공단과 공동으로
해외 취업 특집을 진행한다.
외국어와 전문 지식으로 무장하고 세계를 안방처럼 넘나들겠다는
디지털 노마드 마인드로 무장한 이들의 도전 현장을 따라가 본다.

 이곳은 호주 서부(Western Australia, WA)의 퍼스(Perth)라는 도시다. 호주는 크게 동부와 서부로 나뉘는데, 동부에는 잘 알려진 멜버른, 시드니 같은 도시가 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서부는 호주 산업의 중심지로, 그중에서도 퍼스는 인구 136만명에 달하는 호주 서부의 주도(州都)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지난 4월23일, 봄이 한창 무르익던 무렵이었다. 어느새 호주로 온 지 석 달이 되어간다. 지구의 반대쪽으로 날아왔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것 같은 친숙한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국제기능올림픽 용접부문 은메달리스트

 내 나이 올해 스물일곱이다. 인천이 고향인 나는 인천기계공고를 졸업한 뒤 국내 굴지의 중공업 회사에 취직,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고등학교에서 용접 배관을 전공했던 나는 회사에 입사한 첫 해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해 용접 부문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국내 굴지의 회사에 취업한 나를 부모님은 물자랑스러워 하셨고 나 역시 기능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어느 누구 못지않았다. 그런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오게 된 건 내 인생의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은 순탄하다면 순탄했다. 생산직이다 보니 현장에서 비바람과 뜨거운 태양, 달아오른 철판을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은 있었지만 고용 불안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회사에서 지급되는 보수도 젊은 나이에 충분히 생활할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5년 후, 10년 후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당시 현장 근로자의 평균 연령은 40대 중반. 회사는 정규직으로 신입 생산직을 거의 뽑지 않는 추세였다. 그런 만큼 나는 희소가치가 있었지만 30~40대의 선배 근로자들에게서 나의 미래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내가 고민하는 걸 눈치챈 선배들은 ‘한국에서 이만한 직장 찾기 힘들다’며 퇴사를 만류했다.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입사한 지 5년 만이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나는 기능공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현장직 근로자가 사무직 근로자가 되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나마 내가 입사할 무렵엔 (드물지만) 길이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그런 기회까지 사라졌다. 현장 일은 무척 고되기 때문에 나이 들어서까지 일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사무직으로 갈 길마저 막힌 것이다. 대학 공부의 필요성을 깨달은 나는 뒤늦게 대학 야간부에 등록해 ‘기술사’를 목표로 공부를 했다. 문제는 계속 회사를 다닐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이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나의 미래와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일단 결심이 서면 누구도 못 말리는 성격인 나는 사표를 내고 대학도 그만두었다. 인천 고향집으로 올라와 집 근처의 소규모 공장에서 일을 계속했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하면서 나는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내가 가진 전문 기술인 용접을 계속한다는 것과 해외 진출을 비롯해 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더 나은 기회를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공장에 다니는 짬짬이 국내외 취업정보를 매일 체크했다. 그러던 중 ‘호주 용접 기술자 모집 공고’를 보았고, 인터넷을 통해 바로 신청했다. 서류 전형과 면접, 실기 테스트로 이어지는 과정 중 호주 현지에서 한국 기술자를 모집하는 회사 사장님과의 인터뷰가 있었다. 인터뷰 과정에서 나는 이곳이 바로 내가 찾던 곳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며칠 후 진행된 실기 테스트가 끝난 후 나는 당돌하게도 사장님께 질문을 했다.

 “사장님, 저 합격입니까? 불합격입니까?”

 당시 나는 오래 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내가 시험에 합격해 호주로 가게 되면 당연히 그녀와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양가 어른들께 인사도 드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합격이 되면 당장 여자친구 집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결혼 허락을 받고 싶었다. 전후 사정을 전해들은 사장님은 웃으며 ‘합격했다’고 그 자리에서 알려줬다.



 인터넷 모집 공고 통해 호주에 취업

 지금은 나의 아내가 된 당시의 여자친구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알고 지낸 지는 오래 되었지만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건 아직 몇 달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호주 취업 준비 사실을 그녀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고, 실기 테스트를 하러 가던 날에야 전화를 걸어 “나 지금 호주 취업 실기 테스트 하러 간다”고 알렸다. 그녀가 황당해 아무 말 못하는 것이 전화기 너머로도 느껴졌다. 언니가 옆에 있어 뭐라 대꾸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당시 그녀의 집에서는 우리가 사귀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네 딸 중 셋째였는데 위로 언니 둘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함께 전남 함평행 버스를 탔다. 시험이 끝난 후 나는 합격 사실을 알렸고, 그녀는 하루 동안 생각을 정리한 끝에 고향 집에 가서 결혼 허락을 받기로 결심을 한 터였다. 함평 부모님에겐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방문이었을 것이다. 처음엔 ‘절대 안 된다’는 완강한 분위기였다. 나는 집안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두 분은 ‘멀리서 왔으니 얼굴이나 보자’고 하셨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해드렸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계획도 말씀드렸다. 가만히 듣고만 계시던 부모님께서는 ‘그럼 일단 혼인신고부터 하자’는 말로 결혼을 허락하셨다. 언니들보다 먼저 결혼을 시키는 것도 내키지 않으셨고, 무엇보다 불쑥 나타나 결혼 허락을 받으려는 태도에 당황하셨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을 듣고는 허락을 하신 것이다. 혼인신고부터 하게 된 건 함께 출국을 하려면 결혼했다는 증빙 서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때가 1월 말이었으니 출국 예정인 4월 말까지는 불과 3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설이 지난 후 부랴부랴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4월 말 호주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은 퍼스에 위치한 AGC(Ausclad Group of Company)라는 곳이다. 한국에서 나를 채용한 KSN이란 회사가 나의 소속사다. 이곳에서 나는 니켈과 코발트를 채굴해 담을 운반기기를 제작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근로자는 주간조와 야간조로 나뉘어 근무를 하는데, 현재 나는 야간조에 소속돼 있어 오후 4시 반에 출근해 새벽 4시 반에 퇴근을 한다. 근무 시간으로 보면 12시간으로 비교적 길지만 노동 강도나 작업 환경은 한국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는다. 한국의 작업 현장과는 달리 ‘서둘러 빨리빨리’ 하는 모습은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자신이 맡은 작업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규격에 맞게 충실하고 꼼꼼하게 작업하는 것이 이곳 문화다. 공장에는 시계가 없다. 식사 시간이나 휴식 시간이 되면 차임벨이 울리는데 그제야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는지 알 수 있다. 일을 한 지는 아직 오래 되지 않았지만 여유를 가지고 일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무척 만족스럽다.

 처음 이곳에 응모하고 난 뒤 ‘호주에서는 용접공이 아니라 용접사로 대접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땐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막상 와서 일해보니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기술을 가진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풍토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보수도 한국보다 많다. 세금 포함해서 연간 5000만원 정도 된다. 나 정도의 기술에 해외 취업자가 아닌 현지인일 경우 연봉이 1억원이 넘는다고 들었다. 호주는 엄청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나라인데, 산업화는 초기 단계여서 기술자가 많이 부족하다. 이곳 기업들은 물량을 수주해도 사람이 없어 물건을 만들지 못하고, 그래서 망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연봉 5000만원, 현지인은 1억원

 아내와 나는 퍼스 시내에 방 3개에 거실과 주방, 식당, 정원이 딸린 집을 구해 살고 있다. 고층 빌딩이라야 시내 전체를 통틀어 4개에 불과한 이곳은 산업도시임에도 무척 쾌적한 환경을 자랑한다. 환경에 관한 한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호주의 엄격한 환경 정책 때문에 4개 이상은 고층 빌딩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는 방침이라고 들었다. 늘 높다란 건물에 가려진 채 살아와 그런지 탁 트인 환경에서 사는 하루하루가 믿기지 않을 때가 많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오후 4시 반에 출근해 새벽 4시 반에 퇴근한다.  여유로운 작업 환경에다 젊기 때문인지 아직 힘든 줄을 모르겠다. 12시쯤 일어나 아내와 함께 근처 공원으로 도시락을 싸가지고 피크닉 겸해서 나가 점심을 먹고 들어온다. 아내가  혼자 호주에 와서 많이 외로울 때라 근처에 자주 나가려고 한다. 다행히 이웃 주민들이 친절해서 한결 마음이 놓인다.

금요일엔 오후 4시 반에 출근해 밤 11시 반에 퇴근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쉰다. 주5일 근무인 셈이다. 주말엔 가까운 해변에 나가 낚시도 하고, 하루 코스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집 가까운 곳에 해변이 있는데, 거기엔 한국에서 귀한 전복, 대게 같은 것들이 직접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하다. 낚싯대를 드리우면 팔뚝만한 자연산 도미가 잡혀 올라온다. 생선을 사 먹을 일이 없을 정도다. 낚시를 모르던 아내가 이곳에서 낚시를 배웠는데 이제는 나보다 더 낚시를 즐긴다.

 호주에 온 지 석 달 째. 많은 준비를 하진 않았지만 막상 와보니 나와 너무 잘 맞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면 외국 나가 못 산다는데 다행히도 나는 그런 성향이 아니다. 호주 취업시 거의 모든 직종에서 영어 자격이 엄격한 편인데 용접과 배관(이곳에서는 보일러 메이커라고 한다) 기술자는 예외로 영어 테스트가 없다. 현장에서 일할 때 중학생 수준의 일상 회화를 할 수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일하는 데 있어서도 아직 큰 어려움이 없다. 그래도 호주에서 살려면 영어회화가 필요할 것 같아 시간 나는 대로 회화 책도 들여다보고 주말에는 한인회 영어회화 강좌, 한인 교회 영어회화반에서 공부도 한다.

 사실 나의 아내도 기능올림픽 메달리스트 출신이다. 양장 부문이라 부르는 ‘드레스 메이킹’ 부문 국가대표로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결혼 전까지 전남 광주에서 자신의 가게를 운영하면서 기능학원에서 후배들을 가르쳐왔다. 공부도 계속해 한국에서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상태였다. 결혼 허락을 받을 때 ‘아내가 일과 공부를 계속하도록 적극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호주로 올 때 아내의 작업 장비도 모두 가져와 방 하나는 아내의 작업실로 꾸몄다. 또 하나의 방은 우리가 함께 공부하는 방이다.

 나의 꿈은 우리 회사의 사장님처럼 되는 것이다. 이민을 온 뒤 뒤늦게 용접 기술을 배우신 사장님은 성실하게 일을 하셔서 자신의 회사를 호주 당국도 인정하는 회사로 키우셨다. 물론 당장 이룰 수 있는 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은 보다 많은 기술과 지식을 쌓는 데 몰두하고 있다.

 끝으로 막상 호주 현지에 와보니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고등 교육과 지식,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할 곳이 없어 한국에서 괴로워하고 방황하고 있는 내 또래 젊은이들에게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넓게 보라고 권하고 싶다.

/ 정리 : 오성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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