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항공의 출범으로 한국에도 저가항공사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이번 호에 소개하는 억만장자가 없었다면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저가항공사는 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린 시절 창공을 나는 꿈을 꾸던 소년이 세계 최대의 항공기 리스회사를 설립해 세계인들에게 보다 수월한 항공여행을 가능케 한 산 역사를 따라가 보자.

 “이제 제가 진 빚을 좀 갚았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스미소니언 항공박물관 개관 기념식에서 스티븐 우드바하지(Stephen Udvar-Hazy·59) 국제리스금융그룹(International Lease Financing Corporation: ILFC)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정확한 명칭이 ‘스미소니언 박물관 산하 우드바하지 우주항공박물관’인 이 기념관은 그가 개인자격으로는 박물관 역사상 최고액인 6600만달러(약 700억원)를 기부함으로써 지난 2003년 1월 미국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 한쪽에 문을 열게 됐다.

 사실 이 자리는 박물관 개관 기념식이라기보다는 그의 어릴 적 꿈이 세상에 드러나는 기념비적인 자리였다. 항공업계 외부에는 그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기념식에서 “우리 가족은 공산 독재로 질식할 것 같았던 땅을 탈출해 이곳 미국으로 왔습니다. 아무런 경제적 기반도 없이 그저 꿈만 갖고 밟았던 이 땅에서 우리가 받은 혜택의 일부를 돌려줄 수 있게 됐습니다”며 감격해했다.

 그가 언급한 꿈이란 52년 전 우연찮게 만났던 한 사건을 지칭한다. 일곱 살이 되던 어느 여름날 우드바하지 회장은 아버지를 따라 부다페스트 에어쇼를 구경하러 갔다. 그날 이후 그의 꿈은 비행기, 창공 등으로 수놓아졌고 그의 나머지 인생행로를 결정지었다.



 헝가리 출신 이민자

 그리고 50여년이 지난 뒤 우드바하지 회장은 24억달러(약 2조3000억원)의 재산(<포브스>지 추산)으로 미국 85위 부자에 기록됐다. 헝가리 출신 이민자인 그가 세계 항공업계에 커다란 궤적을 남긴 것은 물론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부를 갖게 된 것이다.

 우드바하지 회장은 194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의사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스포츠 의약 전문의였던 아버지 에르노 우드바하지는 1920년대 초반 섬유산업과 경정(競艇)사업에 투자했고, 그의 어머니 에텔은 부다페스트 외곽에서 종마장을 운영했다. 이 정도면 헝가리 국민들 가운데 중상류층에 속하는 가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이 이 모든 것을 앗아가버렸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히틀러의 나치가 헝가리를 점령했고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총살당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부다페스트 외곽에 주둔했던 독일군은 1944년 혹한을 넘기면서 어머니의 종마장 말을 다 잡아먹어버렸다. 나치가 물러가자 이번에는 소련 공산당의 지배가 시작됐다. 우드바하지 가족은 더 이상 헝가리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이들은 결국 소련이 헝가리에 탱크를 진주시킨 지 15개월 후인 1958년 조국을 탈출한다. 하지만 어렵게 미국 뉴욕에 도착한 네 식구 앞에 운명은 더 큰 시련을 던졌다. 재산을 다 날리고 죽음의 위기까지 겪으면서 류머티즘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던 선친 에르노는 미국에 도착한 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모친인 에텔이 섬유회사에 나가 벌어오는 60달러로 온 가족이 일주일을 버텨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도 소년 스티븐은 뉴욕의 다른 청소년들처럼 만화책을 돌려 보거나 야구장에서 선수들에게 열광하기보다는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퀸즈 지역에 있는 아이들와일드 비행장(지금의 JFK 국제공항)을 찾곤 했다.

 요즘같이 철통 같은 보안을 강조하는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할 방법으로 우드바하지 회장은 비행기 계류장에 몰래 들어가서 기술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몇 시간씩 지켜보곤 했다. 때로는 관제탑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거나 노트에 비행기의 궤적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우드바하지 회장은 <USA투데이>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때 어머니는 내가 숙제는 않고 비행장만 싸돌아다닌다고 화를 내시곤 했지요”라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급우들도 나를 ‘또라이’라고 부르면서 비행기에 미친 아이로 취급했어요. 걔들은 내가 왜 그렇게 어린 나이에 비행기와 항공산업에 빠져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겠지요.”

 그는 부다페스트 에어쇼에서 느꼈던 그 감동을 고스란히 미국에서도 유지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감동의 연장선상에 ILFC가 존재한다. “나는 그날 느꼈던 그 기쁨을 계속 만끽하기 위해 항공기 리스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며 “ILFC는 어찌 보면 내 취미를 확대시킨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대학 2년때 항공사 컨설팅 시작

 스티븐이 16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LA로 이사한다. 아무래도 캘리포니아의 기후가 아버지의 건강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티븐의 형 앤드류가 UCLA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분자생물학을 전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스티븐도 형과 함께 UCLA에서 경제학과 국제관계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그는 학교도 졸업하기 전 항공산업에 발을 들여놓고야 만다. 이미 ‘항공시스템 리서치 컨설팅 그룹’이라는 그럴듯한 작명도 해두었던 터였다. 그리고 고객들을 찾아 나섰는데 청년 스티븐은 자신이 너무 어려서 고객들을 놓칠까 염려해 직접 대면하거나 전화로 컨설팅을 하는 대신 텔렉스나 전보를 이용해 일을 시작했다. 요즘같이 인터넷이 존재하는 시대도 아니었으니 대면하지 않고 고객을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짐작할 수 있다. 드디어 2학년 말에 첫 고객이 나타났다. 아일랜드의 국적항공사인 에어링구스(AerLingus)에게 효율적인 경영방안과 최소의 항공기로 최대의 이익을 올릴 수 있는 방안을 조언했는데 회사가 그에게 선뜻 4000달러를 지불한 것이다. 에어링구스가 그의 보고서를 인정해준 것이다.

 그의 회상을 더 들어보자.

 “난 그들에게 어떻게 비용을 절감하고 좀 더 효율적으로 경영할 수 있을지,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등등에 대한 보고서를 지속적으로 보내줬다. 그런데 놀랍게도 에어링구스는 이 보고서에 대한 화답으로 나를 더블린으로 불러 4000달러의 컨설팅비를 지급했다.”

 첫 컨설팅 수주 2년 후 UCLA의 졸업반 시절 그는 처음으로 비행기 매매 중개에도 성공한다. ‘에어 뉴질랜드사에서 록히드 엘렉트라 기종을 구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알류션 에어라인즈가 갖고 있던 동일한 비행기를 찾아내 에어 뉴질랜드에 넘기는 거래를 성사시켰다. 그는 뉴질랜드까지 날아가 100만달러짜리 거래를 마무리한 뒤 5만달러의 수수료를 챙길 수 있었다.

 졸업 후 우드바하지 회장은 평소 하던 일을 계속해나갔다. 비행기 중개업에 계속 몰두한 것이다. 1972년 그는 항공기를 구입하려다 일이 꼬여 전전긍긍하고 있던 알래스카 에어라인에게 멕시카나가 리스하고 있던 보잉 727기를 인수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비행기를 중개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항공업계에 자신만큼 항공사들의 정보를 많이 가지고 누가 어떤 항공기가 필요하며 경영 상태는 어떤지를 아는 개인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또 예상외로 항공기를 리스하려는 항공사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항공사와 제작사 사이에서 자신이 할 일을 찾아냈다. 이것이 세계 최대의 항공기 리스사, ILFC의 시작이었다.

 우드바하지 회장은 같은 헝가리 출신 이민자이자 부동산 재벌이었던 레슬리 곤다를 만나 사업설명을 하게 된다. 헝가리에서 이민 와 베네수엘라에서 부동산으로 큰돈을 번 그에게 우드바하지 회장이 소개한 것은 이전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오퍼레이팅 리스’란 개념이었다. 이는 현재 자동차 딜러 업계가 운용하고 있는 리스 개념과 흡사하다. 항공사들은 항공기 가격의 9~12%에 해당하는 금액을 1년 월부금으로 정하고 이를 12개월로 나눠 내면서 5~7년 동안 비행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이다. 보증금 없는 단기 임대여서 그만한 현금흐름을 확보할 자신이 있는 창업가들에게 언제든지 항공산업에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셈이다.



 ILFC 설립 10년만에 찾아온 ‘천재일우’

 우드바하지 회장이 ILFC를 설립하기 이전인 지난 1973년까지만 해도 모든 항공사들은 반드시 비행기를 사야만 영업을 할 수 있었다. 법이 강제했다기보다는 비행기를 이런 식으로 ‘빌려’ 주는 곳이 극히 드물었던 데다 업계 분위기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어떤 항공사가 비행기를 사지 않고 대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도산위기에 몰린 회사’라는 낙인이 찍히기 십상이었다. 또 비행기를 빌릴 경우에도 15~20년이 지나면 항공사가 그 비행기를 되사는 계약을 맺는 등 사실상 임대가 아니라 할부판매 개념이 강했다.  이 경우 할부구매와 마찬가지여서 항공사로서는 비용부담이 큰 편이다. 오늘날 염가 항공권을 제공함으로써 항공업계의 지평을 바꾸고 있는 저가항공사들은 ILFC가 시장에 선보인 오퍼레이팅 리스 기법이 없었다면 아마 출범 자체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어쨌든 이 사업모델 설명을 듣고 ‘돈이 되겠다’고 판단한 레슬리 곤다는 아들 루이스까지 참여시켜 3인 동업회사로 ILFC를 시작했다. 이들이 ILFC를 설립한 지 10년 뒤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찾아온다. 미국은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선 뒤 대규모 규제완화를 실시했는데 특히 항공업계의 규제완화로 항공사들이 우후죽순 설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저렴한 비용으로 항공기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고 이미 10여년간 항공기 리스에 대한 노하우를 쌓아둔 ILFC로서는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ILFC는 현재 350억달러 규모의 세계 최대 ‘항공기 리스 제국’을 건설했다. 이 회사는 미국의 항공사들이 320억달러라는 기록적인 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던 2000년부터 올해까지 20억달러의 이익을 올렸다. 그의 회사는 현재 820여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많은 비행기를 소유한 항공사나 다름없다. ILFC의 고객은 에어프랑스, 에어차이나, 베트남항공 등 전세계 120개 항공사에 달한다.

 ILFC가 시작한 오퍼레이팅 리스 개념은 외견상 어렵지 않아 보여서 이후 여러 기업이나 개인이 속속 항공기 리스 산업에 뛰어들었다. 현재도 여러 경쟁자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대표적인 회사가 제너럴 일렉트릭 계열사인 GE 캐피탈(GE Capital)이다. GE는 ILFC의 가장 큰 경쟁자였던 GPA사가 도산하자 이 회사를 인수, 제너럴 일렉트릭 캐피탈 항공 서비스(GE Capital Aviation Services)라는 이름으로 항공기 리스업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 회사는 ILFC에 버금가는 비행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ILFC만큼 이익을 올리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ILFC가 선전하는 이유는 뭘까? 먼저 우드바하지 회장은 일찍부터 회사채를 통해 자금을 조달, 조달 코스트를 현저하게 낮추는 기법을 활용했다. 주식발행이나 담보대출이 아니라 회사채로 항공기 구입자금을 조달한 만큼 어떤 항공사가 부도를 내더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ILFC는 종업원 수를 최소화했다. 이런 내핍과 검약정신으로 인해 ILFC는 종업원이 151명에 불과한데도 지난해 ‘1인당 매출액 330만달러’라는 놀라운 생산성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자금조달 비용을 철저하게 낮춰 이익의 폭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AIG가 인수한 뒤에는 이익률이 더 상승했다. 1992년 이후 2004년까지 영업이익률은 22%대에 이른다.

 1990년 보험업계의 거물인 AIG가 우드바하지 회장이 소유한 ILFC의 지분 등 개인지분 모두를 13억달러에 인수하면서 소유권이 AIG로 넘어갔다. 그러나 우드바하지 회장은 여전히 ILFC의 최고경영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주주인 AIG가 그만한 전문가를 찾을 수 없었던 데다 그 역시 비행기와 관련된 일을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한 개념의 리스였지만 우드바하지 회장이 없었다면 ILFC가 대성공을 거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어릴 때부터 축적한 정보력은 어떤 항공사와 리스 협상을 할 때 가장 최적의 월부금을 찾아내게 했다. 재무적으로 불안정해 보여서 시장에서 신용도가 낮은 업체라면 고가의 월부금을 책정해도 순순히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 회사가 도산의 위험이 없어야 ILFC로서도 이익을 올릴 수 있다. 우드바하지 회장은 이런 회사를 찾아내는 데 귀재였다.



 항공산업의 무서운 협상가 명성

 아울러 보잉, 에어버스 등 항공기 제작업체로부터 비행기를 구입할 때도 그의 ‘공력(功力)’은 위력을 발휘했다. 우드바하지 회장이 제작회사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한도 내에서 최저의 가격을 찾아내 협상자를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물론 ILFC는 항공기 제작업체에게 최대의 고객이기 때문에 그만큼 협상력이 강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협상과정에서 작용하는 우드바하지 회장의 개인역량을 결코 가볍게 볼 수는 없다. 공동창업자가 은퇴한 이후 지금까지 우드바하지 회장은 최종 비행기 구매만큼은 꼭 자신이 결정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01년 우드바하지 회장은 향후 10년간 납품을 조건으로 에어버스 최신기종 111대를 일괄구매하는 계약을 맺기도 했다. 에어버스 최신기종을 한 번에 이만큼 주문할 수 있는 고객이 세계 어디에 또 있겠는가.

 그래서 우드바하지 회장은 항공기 제작업체들 사이에서 ‘무서운 협상가’로 불린다. 어린 시절 프로야구 선수 프로필이나 경기 결과보다는 비행 스케줄에 더 관심을 가질 정도였던 그의 항공산업에 대한 열정은 그를 지금도 항공산업에 대한 백과사전으로 불리게 한다. 그래서 그와 비행기 가격을 놓고 협상을 벌이던 항공사들은 번번이 그의 페이스에 말려 압도당하고야 만다.

 에어버스와 보잉의 세일즈 담당 임원들은 종종 ILFC 본부로 동시에 불려들어가 다른 회의실에서 대기하며 무작정 기다려야 할 때가 많다. 보잉사의 마케팅 담당 부사장인 니콜 피아세키씨는 10여년 전 처음으로 ILFC와 협상을 벌였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졸아붙는다고 고백한다. “우드바하지 회장은 나를 방 하나에 가둬놓고(?) 8시간 동안 물 한 방울도 주지 않았다”며 “아마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그랬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물론 이후 ILFC는 보잉사의 777 시리즈도 대량 구매했다.

 그의 협상 스타일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우드바하지 회장은 곤다 공동대표가 현업에 있을 당시 협상 도중 수시로 상대방을 앞에 앉혀둔 채 헝가리어로 곤다 대표와 빠른 말로 의논을 하곤 했다. 보통 협상의 경우 잠깐 양해를 구하고 옆방으로 가는 게 상례지만 제작사가 깐깐하게 나올 경우에는 협상 테이블에서 그냥 헝가리어로 아군끼리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은 흙 씹은 표정이 되지요. 헝가리어 대화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페이스가 우리 쪽으로 넘어오더군요.” 곤다 전 대표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우드바하지 회장은 협상과 관련해 ‘항공기 매매는 10억달러짜리 포커판’이라고 표현한 일이 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1억달러도 순식간에 날아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여기에다 항공기 리스업에 있어서 10년 앞을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다. 비행기를 제작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만일 이 예측이 잘못될 경우 재고를 지나치게 떠안고 전전긍긍하거나 아니면 항공사에 대여할 비행기를 확보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우드바하지 회장이 AIG로부터 밀려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드바하지 회장이 항공사들이나 제작사들의 ‘피를 빨아먹는 냉혈한’은 아니다. 일례로 지난 2001년 9·11테러가 터졌을 때 전세계 항공사들이 도산 위기에 처하자 즉시 리스료를 30% 깎아주기도 했다. 물론 이 조치는 3개월 뒤 원상복귀 됐지만 필요할 때는 이렇게 과감한 베팅도 마다 않는 것이다.

 우드바하지 회장은 항공업계에서는 톰 크루즈만큼이나 유명인사다. 하지만 절대 그런 티를 내지 않는다. 최근 애리조나주에서 열린 국제 항공기 페어에 그는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에 수행원도 없이 나타났다. 지난 1995년 현업에서 은퇴한 ILFC의 공동창업자 루이스 곤다는 “우드바하지 회장은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우드바하지 회장이 낮은 자세로 경영한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특히 그가 어떻게 종업원을 관리하고 비용을 절약하는지를 보면 그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의 가난했던 이민자 시절의 일화와 추억을 네 자녀들에게 그대로 전수하는 것도 유명한 얘기다.

 우드바하지 회장은 자녀들에게 겸손과 절약을 직접 가르치는 아버지다. 그래서 여름캠프에 보내기보다는 방글라데시, 인도차이나 등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을 가진 나라에 직접 데리고 가서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게 하는 훈련을 시킨다. 그 자신이 소련 지배하의 헝가리를 탈출했던 이민자로서 자녀들에게 이민자의 모범을 보이는 동시에 아이들이 제3세계 국가들에서 시련을 간접체험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드바하지 회장이 유일하게 사치를 부리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그의 자가용 비행기 걸프스트림 V다. 자가용 비행기의 롤스로이스라고 불리는 이 비행기를 그는 1년에 300시간 이상 직접 조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의 인생 대부분은 겸손과 검약으로 점철돼 있다. <포브스>지가 10년 전 처음 그를 ‘미국내 400대 부자’에 등재할 때 “제발 내 이름을 빼달라”고 사정한 일화는 유명하다.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면이 있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항공기 리스업은 돈만 있으면 누구나 진출할 수 있는 업종이지요. 그래서 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항상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드바하지 회장이 <USA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강조한 그의 경영철학이다.

박형진 미주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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