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붙어있는 폴란드는 동유럽 국가 중 서유럽과 가장 가까운 나라로 유럽 시장 진출을 노리는 비유럽 국가들의 전초기지로 각광받는 나라다. 2005년 아일랜드에서 인턴십 과정을 밟은 후, LG전자 폴란드 생산법인 취업에 성공한 박용아(30)씨가 말하는 나의 취업 성공기.

 난 겨울, 한국에 강추위가 몰아쳤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살고 있는 폴란드도 수십 년만의 한파가 몰아쳐 무려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간 적도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추위가 어느새 한결 덜한 걸 보면, 이곳에도 봄이 찾아온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2005년 3월, 나는 인턴십 프로그램에 선발돼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유학은커녕, 해외 연수 경험도 없는 나에게 유럽은 배낭여행으로 한 달 남짓 다녀왔던 것이 고작이었다.   인턴십에 응모할 때만 해도 해외에서 멋지게 일하는 내 모습을 그리며 흥분하기도 했지만, 막상 지구 반대편의 아일랜드라는 생소한 나라로 간다고 생각하니 불안한 마음이 더 컸다. ‘과연 나는 잘 해 낼 수 있을까.’ 내 안에서 자꾸만 자라나려고 하는 불안감을 애써 누르는 사이 비행기는 더블린 공항에 착륙하고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보낸 ‘인턴십’ 6개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이었다. 6개월 인턴 기간을 마치고 난 뒤, 회사는 나를 계속 채용할 것인지, 혹은 내가 계속 근무하고 싶은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내가 지원했고 나를 선발한 회사는 브로데릭 그룹이라는, 자동 토스트기기 등 주방용 전자제품 판매회사였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아도 유럽 전역에 공급 체인망을 가진 글로벌 기업으로 내실 있는 회사였다.

 인턴십에 참여해 보니,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회사에서도 인턴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비교적 생소한 아일랜드라는 나라를 택했다. 우리나라를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묘사하듯 아일랜드는 ‘캘틱 타이거’라고 불릴 정도로, 놀라운 경제성장을 거듭하는 나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연하긴 했지만 ‘경제성장이 빠르게 이뤄지는 나라라면 기회가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내가 지원한 회사는 다른 회사들과는 달리 오직 한 명만을 선발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국비를 지원받아 해외 직장생활 경험을 쌓는 만큼, 영어는 물론이고 그 나라 모든 걸 제대로 배우려면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더블린의 첫 인상은 배낭여행 중 사흘 간 머물렀던 영국의 날씨처럼 바람이 많이 불고 구름이 잔뜩 낀, 마치 험악한 인상의 영국인처럼 느껴졌다. 날씨만큼이나 나를 당황스럽게 한 부분은 바로 넘쳐나는 동양인들이었다. 혹시 내가 중국으로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더블린에는 중국인들이 특히 많았다. (동양인에 대한 아일랜드인의 감정은 호의적이지 않아서 내가 머무는 동안 중국인 여성이 피살된 사건이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회사에서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회계’였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기본적인 회계를 배운 터였지만 실제 업무로 접하니 생소한 부분도,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도 겹쳐 있었다. 달리 나를 도와줄 한국인도 없었던 나는, 모르는 부분은 적극적으로 매달려 배우려 애썼다. 나를 담당한 아일랜드 직원은 비교적 친절하게 업무를 가르쳐 주었고 나는 금세 일을 배울 수 있었다.

 일단 일에 적응이 되자, 여유가 생겼다. 회계라는 업무가 매일매일 일정한 업무가 반복되는 것이다 보니 ‘어렵게 아일랜드까지 왔는데 뭔가 더 배울 걸 찾아보자’는 욕심이 생겨났다. 여기에, 더블린의 비싼 물가도 한몫 톡톡히 하게 했다. 나는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한편, 주말에는 여행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중에는 일이 끝난 뒤에 지역 초급대학에서 외국인 대상 어학 강의를 들었는데, 6개월이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었다.  인턴 기간이 6개월째 접어들면서 회사와 고용협상이 시작됐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에게 인턴 기회를 준 회사에서 나를 고용할 의사를 보였다는 점에서 일단 안도했다. 연봉을 비롯한 조건을 두고 밀고 당기기가 이뤄진 끝에 나는 입사하지 않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간단하게 말해 조건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회계 분야에서 일하기를 원했는데, 회사에서는 다른 분야의 일을 권했고, 결국 그 견해차이가 좁혀지지 않은 것이다.

 당시 나는 회사와 협상을 벌이는 한편, 인터넷을 통해 아일랜드의 다른 회사 취업정보와 국내 취업정보도 함께 챙기고 있었다. 인턴십이라는 게 출국하면서 고용을 약속한 게 아니라 일단 일을 해보고 양측이 서로 조건이 맞으면 고용계약을 맺는 제도라 6개월 뒤에는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인턴 기간이 끝나갈 즈음, 9월 취업 시즌을 맞아 기업들의 취업 공고도 하루가 다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 때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바로 ‘LG전자 폴란드 현지법인 직원 모집’ 공고였다. 인터넷으로 서류를 접수시킨 뒤 나는 폴란드 현지 법인에서 영어 인터뷰를 한 뒤, 귀국했다. 6개월 만에 돌아온 한국은 이미 가을이 깊어 있었다. 인턴 기간 동안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다. 다만, 졸업한 동기들 중 절반은 여전히 취업을 하지 못했을 정도로 심각한 청년 취업난은 다시 한 번 나를 짓눌렀다.

 외국 생활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 무렵, 나는 현지 법인의 입사가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물론이고 가족들도 크게 기뻐했다. 일찍부터 해외에서 일하고 싶은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부모님은 ‘건강 조심하고 열심히 일하라’고 등을 두드려주셨다. 나는 막 풀었던 옷가방을 다시 챙겨 폴란드행 비행기에 올랐다.



 유럽의 공장 ‘동유럽’에서 21세기 유목민 꿈꾼다

 지금 내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무아바(Mlawa)’라는 곳이다. LG전자 폴란드 생산법인이 바로 내가 일하는 직장이다. 지난 해 10월부터 두 달간 수습사원을 거친 뒤 지금은 정식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가 속한 부서는 디스플레이 사업부로, 나는 유럽 전역의 LCD 납품 회사로부터 모니터를 구매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폴란드 생산법인은 연간매출만 1조원을 올릴 정도의 규모를 가진 회사로 현지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폴란드 직원 외에도, 한국 본사에서 출장 와 있는 분과 현지 주재원을 합쳐 한국 직원만 100여명에 달한다.

 이제 겨우 수습을 벗어난 상태지만 나의 하루하루는 무척 바쁘게 흘러간다. 유럽 회사에서 인턴을 해본 경험이 있는 나로선 이곳 한국 직원들의 업무 역량을 보면 ‘일당백(一當百)’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엄청난 업무를 순식간에 해치운다. 오는 여름 독일에서 개최되는 월드컵을 맞아 유럽 전역에서 신규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에 발맞춰 이곳 법인은 올해 매출 목표를 지난해의 두 배인 2조원으로 설정하고 일하고 있다.

 유럽 진출의 전초기지인 폴란드에는 향후 LG전자와 LG필립스LCD, 삼성전자가 공동출자해 새로운 생산라인을 만들 계획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폴란드를 비롯한 체코, 슬로바키아 등 동유럽은 유럽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대상으로 한 다국적 기업의 거대한 생산기지로 변해가고 있다. 나는 영어 외에 폴란드어를 아일랜드에서 만났던 폴란드 친구로부터 배우고 있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있는지, 내가 아일랜드를 떠날 때 후임자로 온 친구였는데 한국의 글로벌 기업인 LG, 삼성, 현대차에 대해 알고 있다며 기회가 된다면 한국 기업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이곳에 취업한 뒤 그 친구를 추천했는데, 운이 닿았는지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동료가 돼 있다. 그 친구로부터 폴란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는 물론 폴란드어까지 배우고 있는 중이다.(폴란드어는 체코, 러시아 등 동유럽 언어와 비슷한데 무척 배우기가 어렵다)

 이제 겨우 수습을 뗀 상태지만 나의 올해 목표는 명확하다. 정식 직원으로 자기 몫을 충분히 해내는 직장인이 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동유럽이 아닌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무리 없이 업무를 해내는 진정한 21세기 노마드(유목민)가 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아직 이루고 싶은 꿈이 많다. 기회가 된다면 MBA 과정을 배우고 싶기도 하고, 다양한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고 싶다.

 돌이켜 보면 더블린으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 막연히 불안해하던 시절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불과 1년 동안의 체험이었지만 나이 서른이 되도록 겪었던 그 어떤 경험보다 많은 일이 지난 1년 동안 일어났다. 1년간의 체험을 통해 내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부지런히 도전하는 자만이 목표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1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해외 취업 경험을 얻게 된 인턴 지원자 중에는 이력서에 인턴 경력 한 줄 올리려고 놀러온 건지, 일하러 온 건지 분간 안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일찍부터 향수병에 걸려서 일은 커녕,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도 있었다.

 인턴십을 통해 해외 취업을 생각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헝그리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유럽에는 이미 많은 한국인 유학생과 어학연수생, 배낭여행객을 비롯해 해외취업연수생들이 있다. 그 중에서 똑바로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은 매사에 적극적이어서 하다못해 맥도날드 햄버거 점에서 바닥 청소라도 하면서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간다. 그런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자세를 갖춘다면, 해외 취업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해외 취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행운이 함께 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