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반 이후 권력을 좌지우지한 사림(士林) 세력은 대개 지방에 자신의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예를 들면 퇴계 이황은 경북 안동, 남명 조식은 경남 합천, 우암 송시열은 충북 괴산(옥천)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고 또한 정치적 활동을 했다. 이 때문에 사림을 일컬어 재지사림(在地士林: 영남사림, 근기사림, 호남사림 등)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중앙 관직에 있을 때는 도성에 머무르다가도 관직에서 물러나면 즉시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가 학문 연구(제자 양성)및 정치활동을 했다.

 그런데 이들 재지사림과는 다르게 누대(累代)에 걸쳐 서울(한양)에 살면서 중앙의 핵심 관직에 중용되어 정치 권력과 경제적 부를 동시에 획득한 양반 사대부가(兩班士大夫家)가 있었다. 경주 김씨, 반남 박씨, 풍산 홍씨, 달성 서씨 등이 그들인데, 역사에서는 이들 가문을 ‘경화거족(京華巨族)’이라고 부른다. 이들 경화거족은 재지사림과는 다른 독특한 학풍과 고급스럽고 세련된 문화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사제(師弟) 관계를 통해 학문 및 사상을 전수한 재지사림과 다르게 이들은 가학(家學)을 통해 학문을 다지고 사상을 전수했다. 18~19세기에 홍석주·홍길주와 같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를 배출한 풍산 홍씨가 ‘문장학(文章學)’을 가학으로 삼았다면, 서명응·서호수를 배출한 달성 서씨는 ‘농학(農學: 농업 경제학)’을 가학으로 전수했다고 할 만하다.

 19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의 농서(農書)들을 총망라한 <임원경제지>를 저술해 조선의 환경과 제도에 맞는‘농업 경제학’을 구축한 풍석(楓石) 서유구(徐有?)는 바로 ‘농학’을 가학으로 전수한 달성 서씨 가문의 자손이다.

서명응은 서유구의 할아버지고, 서호수는 그의 아버지다. 

경화거족 달성 서씨

 서유구의 가문은 정조 시대에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 서명응은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지내고 규장각 창설을 주도한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서호수 역시 규장각 직제학의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국가적 편찬 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학자 관료였다. 정조 시대 국가의 싱크탱크였던 규장각의 창설과 정비는 이들 부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른 말이 아니다. 또한 이 두 사람은 모두 우리나라 농서의 고전이라고 부를 만한 서적을 남겼는데, 서명응의 <고사신서(攷事新書)> ‘본사(本事)’와 서호수의 <해동농서(海東農書)>가 바로 그것 이다.

 특히 서유구는 할아버지인 서명응이 말년에 저술하고 서적을 편찬하는 작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고사신서> ‘본사’는 함께 편찬한 책이나 다름없었다. 이때 서유구는 이미 가학인 ‘농학’의 핵심 사항들을 익힐 기회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훗날 이 편찬 작업과 서호수가 저술한 <해동농서>는 서유구의 ‘농업 경제학’의 기본 뼈대를 이루게 된다. <고사신서>나 <해동농서>는 특별히 우리나라의 농학을 중국의 그것보다 우선적으로 이해할 것을 강조해, 서유구가 우리 현실과 환경에 맞는‘농업 경제학’을 완성해나가는데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지식과 문물 및 제도를 받아들일 때 반드시 우리나라의 현실과 환경에 맞게 채용하는 것, 이것은 바로 달성 서씨 가학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이 집안은 당시 조선을 뒤덮은 주자성리학의 지배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실학의 기풍을 갖출 수 있었다. 1782년(정조 6년)에 서명응이 박제가의 <북학의>에 붙인 ‘서문(序文)’을 보면, 당시 북학파 학자들이 주창한 ‘실학(이용후생)’에 그가 얼마나 적극적인 지지와 찬사를 보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책(<북학의>)에서는 규격에 대한 기술이 상세하고, 제작법에 대한 규명이 명료하다. 게다가 뜻을 같이 하는 동료의 견해까지 첨부하여 덧붙였다. 한번 책을 펼쳐서 읽으면 그 내용을 현실에 적용하여 시행할 만하다.

아! 그(박제가)의 마음 씀이 어쩌면 이렇게도 주도면밀하고 또 진지하단 말인가!”

- 서명응, <북학의> ‘서문’ 중에서

 이렇듯 우리나라의 현실과 환경에 맞는 실용적 학문을 강조하는 가풍 속에서 성장한 덕분에 서유구는 일찍부터 ‘실학의 대가’로 거듭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하겠다.

‘농업과 일상생활의 경제학’ 집대성해 완성

 경화거족의 자손답게 서유구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이때 그는 정조의 어명을 좇아 농업에 관한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를 내놓았는데, ‘수리(水利)시설과 농기구의 개량, 농서의 편찬 보급, 한전론(限田論)으로의 토지제도 개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앞선 시대의 학자인 이익이나 박지원 등이 내놓은 농업 개혁론의 범위를 넘지 못하고 있다. 이전 시대의 경제학자들과 어깨를 겨루고도 남을 만한 대학자로서의 독창적인 면모를 아직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조선경제학의 대가’로 거듭나는 계기는 정치적 불행과 뒤이은 집안의 몰락으로부터 찾아왔다.

 서유구 집안의 정치적 후원자나 다름없었던 정조가 급서(急逝)한 지 6년째 되는 1806년(44세), 당시 달성서씨 가문을 이끈 작은 아버지 서형수가 ‘김달순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된다. 할아버지 서명응은 1787년에, 아버지 서호수는 1799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집안의 ‘옛 영광’을 다시 찾을 희망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옛 영광은커녕 자칫 세도 권력에 의해 정치적 화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유구는 스스로 홍문관 부제학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에 들어 간다. 이때부터 1824년 조정에 복귀할 때까지 무려 18년 동안 서유구는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경화거족의 신분에서 직접 논밭을 갈고 나무를 하면서 먹고살아야 하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치적 불행과 가문의 몰락 앞에서 서유구는 어떻게 처신했을까?

 우리나라 사람 치고 -초등학생 수준의 역사 지식만 갖추고 있다면- 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 18년(1801~1818년) 동안 이룩한 거대한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 모르는 경우는 없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1806~1824년)와 동일한 기간(18년) 동안 서유구가 성취한 ‘거대한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드물다. 더욱이 정약용이 남긴 저술은 거의 대부분 국역(國譯)되어 일반 독자들도 어렵지 않게 대할 수 있는 반면 서유구의 저술은 국역된 것이 거의 전무한 형편이다.

여하튼, 지금부터 서유구가 18년 은둔생활 동안 이룩한 실학(경제학)의 거대한 봉우리를 찾아 올라가 보자.

 서유구는 18년 동안 여섯 차례나 거처를 옮기는 어려움 속에서도 아들 서우보의 유일한 도움을 받아 무려 113권 52책, 250만 자에 달하는 <임원경제지>를 저술했다. 그가 이토록 방대한 서적을 저술하는 작업에 매달렸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할아버지 서명응 때부터 3대째 내려오는 가학인 ‘조선의 농업 경제학’과 더불어 “향촌과 시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 즉 농사와 의식주 등 일상의 경제생활에 필요한 실용의 학문을 집대성해 완성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나아가 벼슬하고 물러나 거처하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세상에 나아가 벼슬할 때는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어야 하고, 물러나 거처할 때는 스스로 의식주에 힘쓰고 뜻을 길러야 한다.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정치와 교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서책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향촌으로 물러나 거처하면서 자신의 뜻과 생업을 돌볼 수 있는 서적은 거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겨우 <산림경제> 한 책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책도 수집한 정보나 자료가 충분하지 못하다. 이에 나는 향촌과 시골 마을에 널리 흩어져 있는 모든 서적을 두루 모아 서책을 저술하기로 했다.”

- 서유구, <임원경제지> ‘예언(例言)’ 중에서

 서유구는 여기에서 모든 서적을 두루 모아 서책을 저술했다고 했는데, 그럼 실제 그가 모아 참고하고 인용한 서적은 얼마나 됐을까? 그가 <임원경제지>에 인용하고 있는 서적은 약 900종(자신의 저술 7종을 포함해 정확하게 893종)이지만, 실제 이 책을 저술·편찬하기 위해 참고한 서적은 수천 종에 달했다. 그렇다면 가문의 몰락에도 서유구는 어떻게 이토록 엄청난 규모의 서적을 소장하고 저술 및 편찬 활동에 활용할 수 있었을까?

경화거족들은 경제력과 더불어 높은 학식 및 문화 수준을 갖춘 덕에 서화나 골동품 수집은 물론 각종 서적 수집에도 열을 올렸다. 특히 서유구의 집안은 할아버지 서명응과 아버지 서호수 때부터 장서가로서 그 명성을 널리 알리고 있었다. 이들은 청나라 사신행을 통해 엄청난 규모의 서적들을 구입해 돌아왔다. 서명응은 1755년과 1769년 두 차례 청나라를 다녀왔는데, 두 번째 청나라 여행길에서는 천문학과 역법 등 중국 및 서양의 과학기술과 관련된 서

적을 포함해 500여 권에 달하는 서적을 가져왔다. 당시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였던 황윤석이 서명응의 집에서 책을 빌려갈 정도로 이 집안은 최신 정보와 지식을 담은 귀중한 서적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서호수 역시 1776년(정조 즉위년)과 1790년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특별히 학자 군주였던 정조의 특명까지 받아 서적을 구입하기도 했는데, 임금의 명령을 수행함과 동시에 자신과 집안사람들에게 필요한 수많은 책들을 함께 가져왔다. 장서가 집안의 학풍 속에서 성장한 탓에 서유구 역시 어렸을 때부터 즐겨 서적을 모은 장서가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듯 수집된 수천 권의 장서들이 서유구가 <임원경제지>를 저술·편찬할 때 ‘학문의 저수지’ 역할을 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1806년 홍문관 부제학을 사퇴하기 전까지 서유구의 관료생활은 대부분 서적의 편찬과 교열 등 학술과 관련되어 있었고, 또한 그는 규장각에서 생활하는 동안 풍부한 서적과 자료들을 마음껏 열람하면서 지식의 폭을 엄청나게 넓힐 수 있었다. 이때 서유구는 조선과 중국은 물론 일본, 더 나아가 서양의 각종 지식과 학문까지 종합적으로 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장서가 집안의 학풍과 높은 학문적 식견을 길러준 관료생활 덕분에 가문의 몰락과 온갖 간난 속에서도 조선 최고의 ‘농업 및 일상생활의 경제학’서적인 <임원경제지>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앞서 지적했듯이, 가학과 향촌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실용의 학문’을 집대성해 완성하겠다는 서유구의 확고한 신념이 ‘근본 에너지’가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겠다.

‘농업 및 일상생활의 경제학’을 위한 백과전서

 교과서적 역사 지식을 동원해 <임원경제지>가 농학, 즉 농업에 관한 서적이라고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은 필자가 줄곧 이 책을 두고 ‘농업 및 일상생활의 경제학서’라고 밝히고 있는 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한번 단언하건대, <임원경제지>는 농업은 물론 일상생활의 경제활동을 종합적으로 밝혀 놓은 ‘경제학 서적’이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살펴보자. 먼저 다소 지루할지 모르지만 <임원경제지>가 16가지로 분류해 담고 있는 정보와 지식의 내용부터 알아보겠다. <임원경제지>는 보통 <임원십육지>라고도 부르는데, 그 까닭은 서유구가 이 책에서 ‘농업 및 일상생활의 경제’에 관해 모두 16가지 분야로 나누어 저술했기 때문이다.

(1) 본리지(本利志): 13권으로, 농사 및 전제(田制)와 경작 등 농업 일반에 관한 내용으로, 농업 생산의 이로움과 새로운 농사 기술과 영농법을 다루고 있다.

(2) 관휴지(灌畦志): 4권으로, 야채 및 약용식물의 재배에 관해 다루고 있다.

(3) 예원지(藝志): 5권으로, 화훼류 66종을 소개하고 그 재배 방법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4) 만학지(晩學志): 5권으로, 과수와 차·대나무·담배 등 특용작물의 재배와 수확 및 관리 방법을 다루고 있다.

(5) 전공지(展功志): 5권으로, 누에치기와 길쌈·비단 직조와 염색 방법 등 향촌 여성들의 농사 및 일상의 경제활동을 다루고 있다.

(6) 위선지(魏鮮志): 4권으로, 농업과 관련한 기상 및 천문 관측을 다루고 있다.

(7) 전어지(佃漁志): 4권으로, 축산 및 사냥 그리고 강과 바다의 수산에 관해 다루고 있다.

(8) 정조지(鼎俎志): 7권으로, 각종 음식과 요리 방법 및 조미료 그리고 술과 계절 음식을 다루고 있다.

(9) 섬용지(贍用志): 4권으로, 집의 건축과 가재도구 및 장식품 그리고 의복과 각종 교통 및 운송수단을 다루고 있다.

(10) 보양지( 養志): 8권으로, 건강한 생활을 위한 섭생 및 양생법과 어린아이를 위한 육아법을 다루고 있다.

(11) 인제지(仁濟志): 가장 많은 분량인 28권으로, 인체 질병의 원인과 치료에 관한 한방의약 전반을 다루고 있다.

(12) 향례지(鄕禮志): 5권으로, 집안에서 반드시 치러야 할 관혼상제와 가정의례를 다스리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13) 유예지(遊藝志): 6권으로, 독서법·실용수학·활쏘기·서예·서화 등 자기 개발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14) 이운지(怡雲志): 8권으로, 취미생활과 관련한 도구 와 문방구 그리고 예술품 감상과 장서 및 서적 관리는 물론 여행 등 경제적으로 여가생활을 누리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15) 상택지(相宅志): 2권으로, 전국의 지리환경을 살펴서 삶의 터전으로 삼을 만한 주거 공간을 선택하는 방법

에 관해 다루고 있다.

(16) 예규지(倪圭志): 5권으로, 상업 활동과 재산 증식 및 관리 그리고 전국 팔도의 시장경제에 관해 다루고 있다.

 농업을 다룬 ‘본리지’에서 시작해 상업과 시장을 다룬‘예규지’로 마무리하고 있는 책의 구성과 서술 방식에서 알 수 있듯이 <임원경제지>는 농업은 물론 의식주를 비롯한 당대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제생활 전반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백과전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농업은 오히려 향촌의 경제생활의 한 분야로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물론 당시 농업 경제의 중요성 탓에 ‘본리지’는 첫 시작 페이지를 장식할 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져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본리지(13권)’보다 한방 의약 및 처방법을 다룬 ‘인제지(28권)’가 2배 가까이 많은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더욱이 여기에다가 건강한 삶과 생활을 다룬 ‘보양지’가 8권을 차지하고 있다. 농사보다 의료 및 건강에 관한 내용이 훨씬 많은 셈이다. 백성들이 가정 및 일상의 생활경제를 다스릴 때 생계나 의식주 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건강 및 의료 문제라는 사실을 실제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유구는 ‘인제지’와 ‘보양지’에 그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상업과 재산 관리 및 증식 방법은 물론 팔도의 시장에 대해 다룬 것은 당시 시장경제와 상품- 화폐 관계의 발전에 걸맞은 향촌의 경제생활을 특별히 강조한 서유구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임원경제지>가 ‘농업에 관한 실학 서적’ 즉 농학서라는 교과서적 상식(?)은 이 순간부터 말끔히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 서유구의 경제사상 1

실용의 경제학: ‘도덕과 윤리’보다 ‘물질생활’이 우선

 경제학이란 아주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재화가 인간 생활에 가져다주는 이로움’을 논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도덕이나 윤리적인 가치보다는 재화의 생산-유통-분배, 즉 물질생활의 가치를 우선해서 다루는 것이 경제학이다. 조선을 지배한 학문이자 이데올로기였던 주자성리학은 ‘도덕과 윤리’, 곧 정신적 삶의 가치를 유독 강조했다. 성리학자들에게 ‘도덕과 윤리’는 세계와 인간을 다스리는 근본 규범이었다. 물질생활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혹은 도덕과 윤리적인 가치보다 하위에 두는 한, 경제사상의 싹은 결코 자라날 수 없다. 서유구는 이러한 성리학의 가치관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그의 경제사상은 바로 그곳에서 출발했다.

“나는 유독 농학에 힘을 쏟아 늙어서 기운이 다 하도록 중단하지 못했다. 왜 그러했겠는가? 나는 일찍이 유학의 경전을 공부했는데, 말할 만한 것은 이미 옛 사람이 모두 말해버렸다. 내가 다시 말한들 무슨 보탬이 될 것인가? 또한 내가 일찍이 세상을 다스리는 학문을 공부했는데, 글줄이나 읽었다는 선비가 머리를 싸매고 궁리하거나 짐작해 하는 말은 모두 ‘흙으로 끓인 국’이요,‘종이로 만든 떡’일 뿐이었다. 아무리 잘한들 실제 생활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 서유구, <행포지> ‘서문(序文)’ 중에서

 이 때문에 서유구는 성리학의 가치를 앞세워 정신적인 삶의 고귀함을 내세우는 이른바 사대부들을 향해 “헛되이 곡식만 축낼 뿐 세상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 자로는 저술하는 사대부가 진실로 우두머리”라고 하는 한편 “나는 사대부들이 앉아서 논(論)하고, 일어나서 행(行)한다는 도(道: 도덕과 윤리)가 무엇인지를 도대체 모르겠다”는 비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생활에 절실하게 필요한 학문 곧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이 아닌 학문은 모두 정신을 낭비하는 쓸모없는 짓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실용에 도움이 되는 학문만이 그에게는 진정한 학문이었다.

 서유구가 <임원경제지>의 서문에 해당하는 ‘예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철저하게 앞선 시대의 실학자인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를 모델로 삼아 저술한 책이다. 그것은 유학의 ‘도덕과 윤리’보다는 재화의 이로움을 추구하는 삶, 즉 ‘물질생활’을 더 중요하게 다루는 <산림경제>의 경제철학을 추구하겠다는 뜻이었다. 도덕과 윤리를 비롯한 정신적 삶의 가치를 앞세운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부터 해방되어 재화의 이로움, 즉 물질생활의 가치를 논하는 것이야말로 근대 자본주의와 더불어 탄생한 경제학의 모토였다. 이런 점에서 서유구의 경제사상은 근대 경제학의 징후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른 말이 아니다. 만약 조선이 일본 및 서양의 제국주의에 의해 이식된 자본주의가 아닌 자생적인 자본주의의 길을 걸었다면, 일찍부터 서유구는 봉건시대의 경제이론과 근대 자본주의 경제학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한 위대한 경제사상가로 자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 서유구의 경제사상 2

농업 개혁론: “농업 기술 및 영농 방법의 개선과 더불어 둔전제를 실시해야 한다.”

 서유구의 경제사상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농업 개혁론’은 크게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농업 기술 및 영농 방법을 개선해 농업 생산력을 크게 향상시키고자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농업의 근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토지제도를 ‘둔전제(屯田制)’로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부국안민, 즉 튼튼한 국가 재정과 백성들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반드시 실현해야 할 일이라고 서유구는 생각했다. 농업 개혁론에 관련한 서유구의 경제사상을 알 수 있는 문헌 및 자료는 정조 시절에 쓴 <농대(農對)>와 <순창군수응지소(淳昌郡守應旨疎)> 그리고 18년간의 향촌 생활동안 저술한 <임원경제지>와 <의상경계책(擬上經界策)>이다. 이 가운데 향촌의 경제생활에 필요한 농업 기술과 영농 방법의 개혁론은 <임원경제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 책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점은 ‘조선의 환경과 조건에 맞는 농업 개혁’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은 효율과 이익을 중요시해,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모인다.’고 여긴 서유구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사람이 사는 지방은 제각각 다르고, 생활 습관과 풍속도 또한 같지 않다. 생활하는 방식도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있고 우리나라와 외국의 구별이 존재한다. 어찌 중국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해 그대로 우리나라에서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필요한 방법들을 취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렸다.”

-서유구, <임원경제지> ‘예언(例言)’ 중에서

 토지제도의 개혁에 관한 서유구의 입장은 <농대>나 <순창군수응지소>에서처럼 초기 ‘한전론(限田論)’을 주장 하다가 이후 <의상경계책>에서는 ‘둔전론(屯田論)’으로 바뀐다. 서유구는 토지겸병(대토지 소유)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곤란과 백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는 모든 토지의 국가 소유와 경자유전을 원칙으로 하는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해야 한다는 이상을 말년에 이르기까지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그가 주장한 ‘한전론’은 당장 정전제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현실과 타협한 토지 개혁론으로, 우선적으로 대토지 소유의 폐단부터 없애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조 사후 세도정권(그들자신이 대토지 소유자였음)이 득세하는 바람에 ‘한전론’조차 실현 불가능한 정치적 상황이 되자 최소한의 토지개혁 방안으로 서유구가 주장한 것이 바로 ‘둔전론’이다.

 서유구가 주장한 둔전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국가가 주도해 설립하는 ‘시범농장’ 혹은 ‘협동농장’이라고 할수 있다. 이때 둔전은 크게 국가에서 재정을 출자하여 설치하는 ‘국둔(國屯)’과 부민(富民)으로 하여금 개인 재산을 출자하게 해 설치하는 ‘민둔(民屯)’으로 나뉜다. 앞의 것이 ‘국영 농장’, 뒤의 것이 ‘민영 농장’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싶다.

 그런데 둔전론은 앞선 시대 중농주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균전론, 한전론, 정전론, 여전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둔전론이 전체 토지에 대한 개혁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일부 한정된 지역에서 한정된 규모로 둔전을 설치하자고 주장한 점이다. 아마도 서유구는 세도정권 하에서는 전반적인 ‘토지 개혁’의 희망은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듯싶다. 그러나 그는 세도정권의 ‘보수 반동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시범농장의 성격을 띠는 둔전을 일부 지역에서라도 설치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농업 기술을 적용해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또 상업적 농업 경영을 통해 국가 재정과 백성들의 경제력을 튼튼하게 할 수 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줄 수 있다고 여겼다. 당시 그가 둔전설치를 주장한 곳은 한양의 동서남북 4곳과 북쪽 국경지대 및 서남해안의 도서지역 등이었다. 그리고 전국 8도의 감영과 지방 고을에도 한양의 사례를 모방해 둔전을 설치해야 한다고 했다.

 둔전은 서유구가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가학으로 익힌 농학과 그 후 숱한 간난에도 힘써 갈고 닦은 ‘농업 개혁론’을 시험해볼 수 있는 무대였다. 비록 둔전론은 국가적 차원에서의 토지 개혁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서유구 자신은 세도정권 하에서 실현 가능한 유일한 ‘농업 및 토지 개혁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말년에 이르도록 경자유전을 원칙으로 삼은 ‘정전제’의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보더라도 둔전론은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나온 차선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외척벌열(外戚閥閱)이 권력을 독점·전횡한 세도정권 하에서는 ‘둔전론’과 같은 제한적 개혁론조차 발붙일 수 없었기 때문에 서유구의 ‘농업 개혁론’ 역시 다른 토지 개혁론과 마찬가지로‘실현 불가능한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책을 맡아 보관할 자식도, 아내도 없으니…”

 1806년 정계에서 축출당한 후 18년이 지난 1824년 마침내 서유구는 관직을 되찾는다. 그런데 관직생활을 다시 시작한 이후에도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의 저술·편찬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1827년에 이르러서야 <임원경제지>의 방대한 작업은 일단락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보완 작업은 계속되었다. 서유구가 이토록 오랜 기간 방대한 규모의 저술·편찬 작업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외아들 서우보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현재 전해오는 서유구의 전 저술에는 아들 서우보가 교열자였음이 밝혀져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서우보는 1827년 33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서유구의 아내는 그보다 훨씬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말년의 서유구는 자신이 애써 이룩한 학문적 성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과 걱정의 나날을 보내야했다. 그러한 비통한 심정을 담은 글이 현재 남아 있는데, 그곳에서 서유구는 “나는 수십 년 동안 저술에 공을 들여 <임원십육지> 백여 권을 최근에야 겨우 끝마쳤다. 그러나 책을 맡아 보관할 자식도 아내도 없으니 한스럽기 그지없다”(안대회, <산수간에 집을 짓고>에서 재인용)고 했다.

 실제 그는 죽을 때까지 <임원경제지>의 보완 작업을 계속하면서, 이 대저작의 간행을 위해 무던히 애를 썼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임원경제지>를 비롯한 수많은 그의 저술들은 필사본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다 흩어졌다. 다만 손자 서태순과 증손자 서상유 등 후손들이 서유구의 뜻을 잇기 위해 그 저술들을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 혹은 ‘풍석암서실(楓石巖書室)’이라고 찍은 종이에다 필사했기 때문에 그나마 대부분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그럼 후대의 학자들 중 서유구의 사상을 계승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서유구는 젊은 시절 연암 박지원에게 드나들면서 학문을 배운 탓에, 일찍부터 그 손자인 박규수 등과도 절친하게 교류했다. 서유구가 1845년에 82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박규수(1807년 출생)는 이미 30대 후반에 접어들어 있었다. 따라서 서유구의 사상이 박규수의 근대 개화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 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제 박규수는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읽고 받은 감명을 자신이 지은 시를 통해 표현하기도 했다.

나라의 병폐를 치유하는 심오한 경륜을 지녔지만 향촌에서 농사짓고 나누는 일을 좋아할 뿐이네 <임원십육지>를 직접 구해 읽었는데 책에 온갖 보배 넘쳐나 신기루 속처럼 헤매게 되네 요즘 사람들은 사업(事業)과 공업(工業)을 천하다고 여겨 정치와 경제를 다스리는 서책에 곰팡이가 필 지경인데 유독 공(公: 서유구)의 의론(議論)을 익히 들어보니 학문이 실용에 적합하지 않다면 진실로 부끄럽게 여겨야 하네

- ‘환재 박규수 연구(2)’

<민족문화사연구 8호>에서 재인용

 비록 서유구의 경제사상을 온전하게 전승한 학자는 없었지만 그의 큰 뜻만은 박규수를 비롯한 근대 개화파 학자들에 의해 일부나마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