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 플러스>는 물려받은 재산 없이 자수성가로 부자의 반열에 올라선 해외의 경제인들을 탐색하는 ‘북미 억만장자 열전’ 시리즈를 연재한다. “경제가 어렵다” “일자리가 없다”는 아우성이 곳곳에서 들리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하지만 ‘해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는 격언처럼 지금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봐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진 것 없이 시작해 수천억, 때로는 수조 원대의 재산을 쌓은 사람들의 경험담은 독자들에게 훌륭한 ‘부자학 교과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꿈이 작은 것은 죄악이다.”  캐나다 짐패티슨그룹(Jim Pattison Group)의 제임스 패티슨(James Pattison, 76) 회장의 사무실에 걸려 있는 액자에 적힌 구절이다. 이 액자는 그가 43년 전 첫 사업으로 자동차 딜러 숍을 열었을 때 모친이 기념으로 직접 만들어 준 수제품이다. 그는 이 구절을 가슴에 담고 “40세 이전에 백만장자가 되겠다”는 어릴 적 꿈을 넘어 억만장자가 됐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브스>에 의해 세계 94위 부자로 선정된 패티슨 회장의 재산은 지난해 말 현재 약 46억 달러(약 5조5000억 원). 1961년 뷰익자동차 판매로 시작된 그의 사업은 지난 6월 말 현재 8개 계열군, 65개 계열사로 성장했다. 직원만 전 세계 9개국에 2만6000명에 이른다. 총매출은 42억 달러(약 5조 원), 자산은 28억 달러(약 3조4000억 원)에 이른다. 짐패티슨그룹 계열사들은 패티슨 회장이 개인으로 출자한 자동차그룹이 상호 출자하는 방식으로 지분이 얽히고설킨 비공개 개인 기업들이다. 이런 이유로 패티슨그룹은 북미 지역에서 드물게 ‘재벌’(conglomerate)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패티슨그룹은 실제로 한국의 재벌처럼 제조업에서부터 서비스업까지, 금융에서 식료품 체인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패티슨 회장이 자주 인용하는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처럼 경기 변동에 관계없이 어느 계열사에서는 이익이 나고 있다.

 패티슨그룹의 식품 체인은 현재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British Columbia)주 식료품 유통망을 석권하고 인근 알버타(Alberta)주로 확대하고 있다. 식료품 체인이 직접 판매하거나 소형 마트에 식료품을 공급함으로써 올리는 매출액만 20억 달러(약 2조4000억 원)에 이른다. 또 간판 제작 업체 네오넥스(Neonex)는 북미에 4만 개의 네온사인을 밝혔고, 옥외 광고 업체 패티슨 아웃도어(Pattison Outdoor) 역시 캐나다 전국의 대형 옥외 광고 시장의 42%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특히 대형 쇼핑몰의 옥외 광고물 90%를 패티슨 아웃도어가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포장용기 업체가 만들어 내는 제품은 치약 튜브에서부터 스티로폼 용기, 쇼핑백까지 다양하다. 자동차 계열사(Pattison Auto Group)는 북미에서 내로라하는 자동차 판매 및 리스 그룹으로 발전했다. 또 미디어 계열사 중 패티슨뉴스그룹(Pattison News Group)은 북미에서 팔리는 정기 간행물 4권 중 한 권을 공급하고 있고, 3개 TV와 19개 라디오 방송국을 소유하고 있다. 석탄 부두는 브리티시 콜럼비아주에서 생산되는 석탄의 72%를 움직이고 있다. 전 세계 10여 개 나라의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Ripley’s Believe It or Not!) 전시장을 찾는 관광객은 연간 1200만 명에 이른다. 

 패티슨 회장은 “거래(deal)가 없으면 밥맛이 없다”고 할 정도로 창업 이래 기업을 사고파는 일에 열중해 왔다. 하나의 사업에서 거둔 이익으로 다른 분야의 기업체를 인수하는 일이 그에게는 일상사였다. 지난 1961년 창업 이래 한 달 평균 한 개씩 기업을 사거나 팔았다. 성사된 거래 건수만 383건이다. 이런 인수 작업의 결과가 오늘의 패티슨그룹이다.



 어린시절부터 탁월한 사업수완 발휘 빈둥대는 직원 가차없이 해고

 패티슨 회장은 1928년 캐나다 중부 평원지대 서스캐처원(Saskatchewan)주 루스랜드(Luseland)라는 인구 1000명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장사가 실패하면서 그가 7살 되던 1935년 캐나다 서부 태평양 연안의 브리티시 콜럼비아주 밴쿠버로 이사했다. 밴쿠버에서 자라난 ‘땅꼬마 지미’(키가 작아 그런 별명을 얻었다)는 장사 수완이 뛰어났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채소 씨앗이나 잡지를 팔아 용돈을 마련한 것은 물론 신문 판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일즈 경험(?)을 쌓았다.

 이 시기 지미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2차대전 끝 무렵인 1945년 5월8일 새벽, 소년 지미는 신문 보급소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보급소장은 지미에게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실렸으니 잘 팔릴 거다. 이 신문을 너한테 3센트에 넘길 테니 너는 5센트를 받고 사람들에게 팔아 봐라”고 말했다. ‘다 팔기만 하면 거의 곱절 장사’라는 계산이 선 지미는 가진 돈을 모두 투자해 500부를 받아 시내에 나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별로 신문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를 통해 이 소식을 알고 있었던 것. 말하자면 ‘구문(舊聞)을 돈 받고 팔려 했던’ 셈이었다. 하지만 지미는 좌절하지 않고 그 다음날 “독일군, 무기를 놓다. 처칠과 트루먼, 승리를 선포하다”라는 헤드라인이 찍힌 신문을 다 팔고야 말았다. 지미는 “이 신문을 기념품으로 사라”고 사람들을 설득했던 것이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UBC)에 입학해서도 지미는 학업보다 장사에 열심이었다. 신형 자동차를 타고 등교해서는 그 차를 학생들에게 팔고 버스로 집에 오는 일이 자주 있었다. 타고난 장사꾼 지미는 자신에게 학사모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대학을 중퇴하고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입문한 지 9년 만에 은행 대출을 받아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건 딜러 숍을 열었다. 이 딜러 숍이 패티슨그룹의 모체다.

 패티슨 회장이 경영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사람’이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라도 사람이 망쳐 놓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한 번 신임을 얻은 사람은 오랫동안 곁에 두고 중용한다. 지금도 그림자처럼 그를 수행하는 사람은 자동차 딜러 숍을 열었을 때부터 그의 비서 역할을 맡아온 모린 챈트(Maurin Chant, 65)라는 인물이다. 40여 년 동안 회장님을 모신 그녀는 지금은 ‘비서’가 아니라 ‘그룹 자문역’ 직함을 달고 있다.

 그렇다고 패티슨 회장이 적당한 온정주의로 사람을 쓴 것은 아니다. 개업 초기 자동차 딜러 숍을 경영하던 시절 실적이 좋지 않은 세일즈맨을 매달 한 명씩 해고한 일화는 캐나다에서 유명하다. 그는 빈둥거리는 자동차 세일즈맨은 해고했지만 신규 사업에 실패한 직원은 내보내지 않았다. 지난 1983년 한 중역이 석유 사업에 뛰어들어야 한다며 250만 달러를 쏟아 부었지만 결국 실패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패티슨 회장은 이 중역을 계속 중용해 1990년대 식료품 체인을 인수할 때 대표이사를 맡겼다.

 패티슨 회장이 만든 독특한 기업 문화로 1976년 이후 매 분기마다 열리는 ‘계열사 사장단 회의’(Partners in Pride)가 있다. 지난 2월 2004년의 첫 회의가 열린 캐나다 밴쿠버의 회의실을 현지 언론의 기사를 통해 살짝 엿보자.

 “꽁지머리를 한 중역이 청바지 차림으로 나와서 비디오테이프를 플레이어에 걸고 들어간다. 이내 조명이 꺼지고 회의실에 앉은 사람들은 화면에 몰입한다. 이날 비디오테이프를 상영해 실적을 알린 곳은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회사였다. 패티슨그룹의 전 계열사 사장단이 참석하는 분기 회의는 축제처럼 진행된다. 매해 첫 분기별 회의는 전년도 실적을 보고하는 자리. 그런데 이 회의는 수십 명의 계열사 대표와 중역들이 각자 경영 실적과 관련된 숫자를 보고하는 자리가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로를 알리고 설득하는 자리로 변했다. 파워포인트를 활용해도 무방하고 위와 같이 정성스럽게 비디오를 만들어 자신의 한 해 동안의 활동과 경영 실적을 자랑해도 좋다. ‘청중’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도 세심하게 관찰된다.”(<리포트온비즈니스> 4월호)

 이런 자유분방한 분위기는 패티슨 회장의 개인 스타일과도 연관이 깊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낙관주의자다. 최근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공황이 북미를 덮쳤다. 그러니 난 인생을 바닥부터 시작한 셈이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자본이익률로 계열사 경영 평가 비윤리적 사업은 즉각 손 떼

 패티슨 회장이 회의를 축제 분위기로 이끌어 간다고는 하지만 사업은 사업이다. 비록 분위기는 딱딱하지 않지만 계열사 사장들의 실적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있어야 할 터이다. 패티슨 회장은 나름대로 계열사의 경영을 평가하는 잣대를 가지고 있다. 본인이 공개한 이 비결을 살펴보면 먼저 ‘자본 이익률’로 번역될 수 있는 ROIC(Return on Invested Capital)가 있다. 이는 쉽게 얘기하면 ‘투입된 자본금이 얼마나 이익을 냈는가’를 나타내는 수치다. 그는 “ROIC가 은행 정기예금 이자보다 낮다면 굳이 그 사업을 계속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차라리 은행에 그 돈을 넣어 두는 게 낫다”고 설명한다. 물론 이 ROIC 측정에도 업종별 편차를 인정하기는 한다. 그래서 자동차 판매 회사와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동일한 ROIC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계열사 사장으로서는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숫자인 셈이다. 2월의 첫 분기별 회의에서는 자동차 판매 그룹이 높은 ROIC를 기록했다고 칭찬을 받았다.

 그 다음은 시장 점유율이다. 이날 회의에서도 밝혔지만 패티슨 회장의 시장 점유율에 대한 의지는 확고하다. 그는 “시장 점유율은 기업의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다. 시장 점유율이 하강 곡선을 그리느냐, 상승 곡선을 그리느냐에 따라 기업의 전략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품질 관리. 패티슨 회장은 제조업이 주력 업종이 아닌데도 ‘품질 관리’를 강조한다. 그가 1980년대 초반 일본 도요다자동차의 딜러 숍을 계약하면서 도요다의 품질 관리를 보고 감명 받은 후 도입하게 됐다. 그는 도요다의 ‘품질 관리 모임’(Quality Circle: QC)을 본 딴 품질 관리 시스템을 그룹에 구축한 뒤 직접 현장에서 채근했다. 도요다자동차에서 유명해진 ‘종업원 제안 제도’도 만들었다. 그 결과 다양한 고객층을 가진 패티슨그룹의 고객 불만 접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1980년부터 3년간 QC 프로그램을 구축하기 위해 매년 100만 달러를 투자한 패티슨 회장은 그 결실을 3년 안에 거둘 수 있었다. 일례로 밴쿠버 올즈모빌(Oldsmobile) 딜러 숍에서 이 같은 품질 관리를 실시한 결과 연간 14만 달러의 매출 신장을 기록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후 품질 관리는 패티슨그룹의 절대 명제로 자리 잡게 됐다. 경영진에게 ‘ROIC’와 ‘시장 점유율’을 강조했다면 직원들의 뇌리에는 ‘품질 관리’를 심어 주었던 것이다.

 매년 연말의 분기별 회의가 끝난 뒤에는 특별한 행사가 열린다. 계열사의 사장들과 중역들이 자리를 함께 한 기회를 이용해 친목을 도모하는 한편, 그룹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이벤트로 컨퍼런스(Partners in Pride Conference)를 여는 것이다. 장소도 캐나다뿐 아니라 미국의 유명 휴양지를 두루 돌아다닌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사유지였던 캘리포니아주 팜스프링 저택(Palm Springs Estate)을 1995년 매입한 이후 이곳도 자주 찾는 컨퍼런스 장소가 됐다.

 이 컨퍼런스에서 패티슨 회장은 친목 도모를 위해 파티만 벌이는 게 아니라 국내외 정·재계 유명 인사를 연사로 초대해 특별 강의를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 주제는 ‘세계 경제 전망’에서부터 ‘원하는 걸 가져라’(You Gotta Wanna) 등 자유분방하다. 주요 참석 연사로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 거물급 인사들이 즐비하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패티슨 회장과 오랜 친분이 있어 1977년 컨퍼런스에 연사로 참석하기도 했다. 현재 패티슨 회장은 로널드레이건재단의 신탁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패티슨 회장은 오래 전부터 북미 정계 실력자들과 친분을 쌓아 왔으며, 이 네트워크를 활용함으로써 유명 인사들을 연사로 초청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는 조지 부시 미 대통령 부자, 브라이언 멀로니 전 캐나다 총리 등 유명 정치인들과 격의 없이 만날 정도이다.

 계열사가 50여 개를 넘어선 1990년대 들어서는 이 컨퍼런스를 그룹을 알리는 홍보의 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지난해 컨퍼런스가 열렸던 밴쿠버의 한 호텔 앞에는 ‘Jim Pattison Group’이라는 거대한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있었으며, 패티슨자동차그룹의 자동차가 전시된 로비 한편에는 패티슨뉴스그룹의 잡지가 비치돼 호텔의 일반 투숙객도 패티슨그룹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

 패티슨 회장은 지금도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한번은 다니던 교회의 헌금함에 100만 달러짜리 수표를 넣은 일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릴 때는 트럼펫 연주자로 순회 전도단을 이끌기도 했다. 이런 그의 신앙심이 바탕이 되어 그룹의 중역들에게 그는 지금도 다른 어떤 것보다 ‘도덕성으로 무장할 것’을 요구한다. 모든 간부에게 불법적인 거래에는 일절 끼어들지 말라는 지침을 내리면서 “일간지의 1면 톱을 장식할 만한 일은 아예 만들 생각도 말라”고 강조한 바 있다.

패티슨 회장은 그래서 돈이 된다고 뛰어든 사업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손을 뗀다. 지난 1980년대 초반 잡지 보급 사업을 확대할 때의 일화다. 패티슨 회장은  뉴스그룹이 인수한 이 업체가 고급 잡지만 배포하는 줄만 알았지 도색 잡지도 함께 소매상에 넘기고 있었던 것을 사전에 알지 못했던 것이다. 여성 단체와 교회에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패티슨그룹이 포르노 잡지를 유통시킨다”며 항의를 시작하자 자초지종을 알게 된 패티슨 회장은 당장 그 도매상을 다시 매각해 버렸다.

 패티슨 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치밀한 계획보다는 순간순간 임기응변식의 대응이 많은 편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개인 기업이어서 일일이 보고할 일반 주주가 없는데다 워낙 머리 속에 떠오른 구상을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기는 성격이다 보니 그런 평가가 나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이 스타일 덕택에 자동차 판매로 시작한 패티슨그룹이 식료품, 어업, 나중에는 레저 산업에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패티슨 회장이 수많은 인수 작업에서 항상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33년 전인 1971년 캐나다 굴지의 육류 가공 회사인 ‘메이플 리프’(Maple Leaf Mills) 인수에 실패하면서 거의 부도 직전에까지 몰린 일도 있다. 패티슨그룹이 비공개이다 보니 증시를 통한 자금 조달은 불가능했고 은행에서 패티슨그룹의 자금 동원 능력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인수로 야기된 자금난을 또 다른 인수로 해결하는 ‘뚝심’을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런치(Crunch)라는 오렌지주스 회사를 인수했다 되팔면서 유동성을 확보해 위기를 넘긴 것이다. 그래서 패티슨 회장은 언제나 직원들에게 ‘뭔가 시도할 것’을 주문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실패할 것도 없다”는 말은 그가 늘 입버릇처럼 되뇌는 좌우명이다.

 세자녀엔 엄격한 부친 임업에 마지막 승부걸어

 패티슨 회장은 자식들에게 엄격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아예 세 자녀들에게 “절대 아버지 유산을 바라지 말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아울러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만한 일은 돈도 직장도 아니고 너희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두 딸은 지금 아버지 사업과는 전혀 관계없는 직업을 갖고 있고, 외아들 지미 패티슨 2세(52)는 34살이 돼서야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아’ 패티슨그룹의 신입 세일즈맨으로 입사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현재 그는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회사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 물론 그동안 창업주 아들이라고 해서 특별 대우는 없었다.

 패티슨 회장은 칠순이 넘은 지금도 현장을 찾는 ‘현장주의자’다. 직원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인수 대상 기업을 직접 둘러보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일을 게을리 않는다. 창업 이후 지금까지 하루 12시간, 일요일도 없이 매일 일하는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휴가도 별로 간 적이 없다. 그는 한창 일하던 70년대부터 지금까지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점심을 패스트푸드점에서 프렌치프라이와 밀크셰이크로 때울 정도로 검소하다. 53년을 해로하고 있는 아내 메리는 남편에 대해 “아이들 기저귀 한 번 갈아 준 일 없었고 가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사업에만 열중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이런 ‘가부장적’인 패티슨 회장도 최근 한 인터뷰에서 “아내가 가사에 전념해 줬기 때문에 사업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패티슨 회장은 돈 버는 일 외에 사회에 이익을 환원하는 재계 인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지난 4월에는 미국 호레이쇼 알거 상(Horatio Alger Awards: 사회적으로 크게 기여한 박애주의자들에게 수여하는 상, 주요 수상자로 빌리 그레함 목사 등이 있다)을 받았다.

 패티슨 회장은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딜(deal)을 추구하며 달리고 있다. 항상 거래의 한가운데 서 있는 그를 두고 일각에서는 ‘일 중독자’니 ‘독재자’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하지만 “여전히 일이 좋다”는 게 그의 대꾸다.

 패티슨 회장은 이제 마지막 남은 관심 분야라 할 수 있는 임업에 뛰어들려 하고 있다. 금융 계열사를 통해 이미 20% 이상의 지분을 장악한 임업, 목재 가공 회사 캔포(Canfor)와 슬로칸 임업(Slocan Forest Products)을 합병해 인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캐나다 재계에 파다하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각 패티슨 회장은 8인승 전용기인 ‘Lear 35호’를 타고 북미 하늘을 날면서 울창한 삼림을 내려다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박형진 캐나다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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