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오른쪽 두번째) 장군이 1950년 9월 미 해군 상륙지휘함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사진 : 위키피디아>
맥아더(오른쪽 두번째) 장군이 1950년 9월 미 해군 상륙지휘함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사진 : 위키피디아>

벼랑 끝에 몰려 있다가 적의 배후를 통타한 인천상륙작전의 결과는 실로 엄청났다. 단 한방으로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켰기 때문이다. 이후 중공군의 참전으로 통일에 대한 꿈이 무참히 깨져 버렸지만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1950년 9월 15일부터 한 달 정도 이어진 북진은 한마디로 꿈같은 시간이었다.

모두의 반대를 물리치고 고집스럽게 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의 명성은 전쟁사에 뚜렷이 각인됐다. 그런데 이후 전과를 따져 보면 맥아더 장군은 1950년 9월 15일까지만 지휘를 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6·25전쟁 발발 초기에 즉각적인 대응으로 북한군을 저지시키고 극적으로 반전을 이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반대 무릅쓰고 작전 성공시킨 맥아더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결정적인 실책을 연이어 범했다. 가장 먼저 인천항에서 불과 40여㎞ 떨어진 서울을 탈환하는 데 보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는 점은 두고두고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많다. 당시 국내 교통망을 고려할 때 경인 간 도로 여건은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하루 평균 3㎞ 정도의 느린 속도로 전진했다.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당시 북한군 주력 대부분이 낙동강 전선에 몰려 있었기에 경인지역에 배치된 전력은 그다지 강한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 북한군 주력을 섬멸하는 데 실패하고 38선 이북으로 도주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뒀다. 결론적으로 탈환보다 퇴로를 먼저 차단했어야 했다.

최근 시리아 내전에서 보듯이 시가전은 승패와 관련 없이 일단 치르기 힘들다. 더구나 민간인이 교전 지역 내에 많이 거주한다면 더욱 어렵다. 당시 북한군이 서울을 제2의 스탈린그라드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을 만큼 곳곳에 상당한 방어 시설을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서울을 탈환한다고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특정 지역의 장악보다 적의 섬멸이 중요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당시 유엔군은 서울 탈환 이후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우리 정부나 국군은 북진을 당연시했지만 전쟁 전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목표였던 유엔은 38선을 넘지 않도록 단속했다.

그렇다면 일단 서울 도심을 포위해 놓고 좀 더 외곽으로 진출해 낙동강 일대에 몰려있는 북한군 주력의 퇴각로를 차단했어야 했다. 당시의 교통 여건을 고려할 때 남북으로 연결되는 통로는 그다지 많지 않아서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 다음 서울에 몰려 있는 잔적을 소탕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이처럼 적의 섬멸을 먼저 노렸다면 추후 북진이 이뤄졌을 때 보다 쉽고 빠르게 전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군이 서울 도심을 미끼삼아 격렬히 저항하자 아군이 여기에 말려들었고 그러는 동안 상당수의 적군이 38선을 넘어 북으로 도주했다. 마지막까지 학살극을 벌이고 납북자까지 끌고 갔을 만큼 공산군은 여유가 있었다.

북진이 개시된 후 또다시 실수를 범하는데, 바로 원산상륙작전이다. 다시 상륙작전을 선택한 것이 잘못이라 할 수 없지만 그 방법은 두고두고 비난받아야 할 만했다. 인천으로 상륙해 서울을 탈환하고 38선 부근까지 북상한 미 10군단을 인천으로 회군시켜 배에 태운 후 한반도를 한 바퀴 돌아 원산으로 보내는 자충수를 뒀기 때문이다.

당시 낙동강에서부터 전진해온 미 1군단은 오산 근처까지만 북상한 상태였다. 그래서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미 10군단을 그냥 평양으로 진격시키고 미 1군단은 경원가도를 따라 원산으로 후속 진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이 미 10군단을 원산에 상륙할 부대로 낙점했고 이들이 회군하자 커다란 문제가 벌어졌다.

미 1군단이 전선을 인계받기까지 열흘 가까운 공백이 발생했고 그렇게 얻은 시간을 틈타 적들은 추격을 받지 않고 안전하게 후퇴했다. 게다가 인천을 출발한 미 10군단이 바다 위에 떠 있던 10월 10일, 동해 축선을 따라 북진하던 국군 1군단이 원산을 점령했다. 결국 10월 26일 적군이 이미 지나간 자리에 미 10군단은 무의미하게 발을 디뎠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노키아의 휴대전화. 최강자라고 자만하던 그 순간 위기가 시작됐고 결국 역사의 뒷길로 사라졌다. <사진 : 위키피디아>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노키아의 휴대전화. 최강자라고 자만하던 그 순간 위기가 시작됐고 결국 역사의 뒷길로 사라졌다. <사진 : 위키피디아>

성공 바로 뒤의 위기

6·25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은 그야말로 역사를 바꾼 위대한 승리였다. 하지만 그 이후 한 달 동안 벌어진 서울 수복과 북진은 그야말로 실책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 동안 적은 안전하게 도주하고 중공군이 은밀히 남하해 전선에 배치될 수 있었다. 그리고 달콤했던 기억은 막을 내리고 겨울 폭풍 속에 다시 후퇴해야 했다.

이런 안타까운 결과가 나오게 한 책임은 연이은 오판을 한 맥아더 장군에게 물어야 한다. 그다음으로 조언을 제대로 하지 못한 참모와 부하들의 잘못도 크다. 그렇게 반대했던 인천상륙작전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그 누구도 이후 맥아더 장군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즉 대성공이 비극의 단초가 됐던 것이다.

2007년에 노키아는 휴대전화 시장의 40%를 점유했던 공룡기업이었다. 하지만 2013년 휴대전화 사업을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했다. 이때 최고경영자(CEO)였던 스티븐 엘롭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망했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성공에 취해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간과했던 것이다. 노키아가 정점에 오른 2007년 바로 그해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스마트폰 ‘아이폰’을 선보였다.


▒ 남도현
럭키금성상사 근무, 현 DHT에이전스 대표, 군사칼럼니스트, ‘무기의 탄생’ ‘발칙한 세계사’ 등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