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남들이 보지 못하는 데서 가치를 찾아낼 때 \\\'쓰레기에서 진주를 건졌다\\\'고 한다. 그런데 진짜로 쓰레기에서 뭔가를 찾아내 굴지의 기업을 일군 억만장자가 있다. \\\'근면 성실의 대명사\\\' \\\'딜(Deal)의 제왕(帝王)\\\'으로 불리는 주인공, 웨인 희징가 회장이다.

 ‘해트 트릭을 기록한 창업가.’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천>이 ‘창업가 특집’에서 웨인 휘징가(H. Wayne Huizenga·68) 오토네이션 그룹(Auto Nation Inc) 회장을 지칭해 사용한 표현이다. 휘징가 회장은 지난 1968년 쓰레기 처리회사인 웨이스트매니지먼트(Waste Management, WM)사를 시작으로 비디오 대여업체인 블록버스터(Blockbuster), 자동차 딜러숍 체인 오토네이션까지 3개 기업을 ‘<포천> 500대 기업’에 포진시킨 유일한 창업가이다. 때문에 축구의 3점 득점왕을 지칭하는 ‘해트 트릭’이라는 찬사를 그에게 선사한 것이다.

 <포브스>의 ‘미국 400대 부자’에 따르면 2004년 말 현재 휘징가 회장은 18억달러(약 2조원)의 재산을 소유, 미국내 124위 부자로 기록됐다. 맨손으로 시작해 사업의 일가를 이룬 그가 평생 심혈을 기울인 분야는 서비스업, 그중에서도 ‘대여(貸與)업’이었다.

 휘징가 회장은 서비스업이 제조업보다는 수요 변동이 덜하기 때문에 선택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특히 쓰레기 수거사업은 웬만해서는 업체를 바꾸지 않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WM의 최고경영자 시절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일 당신이 실직을 했더라도 쓰레기는 누군가 치워야 하지 않는가?”

 휘징가 회장은 <포천>과의 인터뷰에서 “대여업이란 건 자본이 많이 들고 인내심을 요하는 업종이긴 하지만 일단 궤도에 오르면 현금흐름(캐시 플로)을 보장해준다는 장점이 있다”며 “블록버스터는 물론 WM도, 오토네이션도 사실상 대여업이었다”고 말했다. 휘징가 회장에 따르면 WM의 고객들은 쓰레기 수거용 컨테이너를 일정 사용료를 내고 빌리며 WM은 정기적으로 그걸 치워주는 일을 했다. 비록 컨테이너 한 대 가격이 300~500달러, 비싼 건 5000달러짜리도 있었지만 일단 계약을 맺고 나면 꾸준히 현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자동차 딜러숍 역시 최근에는 판매보다 리스에 더 치중하므로 대여업이라 할 수 있다.



 네덜란드 출신 이민자의 손자

 휘징가 회장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준 블록버스터도 비디오를 ‘빌려’ 주는 전통적인 대여업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꾸준히 무언가를 빌려가거나 빌려서 사용해야 하는 사업을 찾아내는 안목이 뛰어난 사업가였던 셈이다.

휘징가 회장은 1937년 미국 시카고 근교에서 네덜란드 출신 이민자의 손자이자, 건축업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만 해도 그의 가정은 다소 여유가 있는 편이었는데 청소년기에 부모가 이혼하면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16세 때 시카고에서 플로리다 로더데일로 이사할 때만 해도 온 가족이 함께했으나 1년 뒤 부모가 이혼한 뒤론 모친, 여동생과 함께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방과 후에 트럭을 몰거나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어주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생존의 의미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육군에 잠깐 입대, 연방 예비군으로 짧은 군대생활을 경험한다. 복무만료 후 전문대에 잠시 다녔던 청년 웨인은 억만장자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공부보다는 창업의 길을 택한다. 대학 중퇴 후 그가 선택한 첫 사업은 쓰레기처리업이었다. 친구가 플로리다 팜파노 비치에서 조그마한 쓰레기 수거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도 그곳에서 쓰레기 처리에 관한 기본적인 일들을 배웠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조부가 미국 이민 직후 시작했던 일이 쓰레기 관련 사업이었다는 사실이다. 뒤에 휘징가 회장은 ‘운명적으로’ 조부가 창업했던 그 회사를 다시 만나 미국 최대의 쓰레기 처리회사로 키우게 된다.

 쓰레기 사업을 밑바닥부터 익힌 그는 장인으로부터 5000달러를 빌려 트럭 한 대로 1962년 남부위생서비스(Southern Sanitation Services; SSS)를 설립한다. 한 달에 500달러를 버는 일이었지만 청년 웨인은 열심히 일했다.  당시 그는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정오까지 열심히 쓰레기를 모은 뒤 신사복으로 갈아입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자신의 회사를 알렸다. 비서도, 세일즈맨도 없이 혼자서 묵묵히 수행한 일이었다. 그의 근면과 성실은 보답을 받아 5년 만에 트럭은 20여대로 늘어나고 매출도 100만달러에 육박하게 된다.

 그러다 우연히 조부가 창업했던 회사를 인수하는 계기를 만나게 된다. 휘징가 회장이 처가 쪽 먼 친척인 딘 번트록을 만난 것은 1968년, 20여대의 트럭을 가지고 남부위생회사를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번트록은 시카고 근처에서 에이스라는 이름의 쓰레기 처리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회사가 바로 휘징가 회장의 할아버지가 세운 쓰레기 수거업체였다. 주인이 몇 차례 바뀐 뒤 번트록에게 이르렀던 것. 휘징가 회장은 번트록 대표와 의기투합, 두 회사를 합쳐 WM(Waste Management)이라는 이름의 대형 쓰레기 처리업체로 재탄생시켰고 1973년에는 이 회사를 뉴욕 증시에 상장시켰다.

 물론 이렇게 1인 회사에서 상장업체로까지 회사를 키우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여러 가지 난관에도 부딪쳤다. 하지만 고비마다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났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실전 경험도 하게 된다.

첫 위기는 WM을 만들기 전 개인회사 시절 자금압박으로부터 시작됐다. 남 부위생회사를 설립하고 나서 1~2년 동안 휘징가 회장은 쓰레기를 처리하는 일보다는 매일 자금을 막는 일이 더 급할 정도로 돈에 궁핍했다. 쓰레기 회사라 하여 기존의 금융회사들이 무시를 했던 것이다. 하루하루 연명하기 위해 친척들 돈까지 끌어다 대던 그에게 1963년 어느 날 기사회생의 기회가 찾아왔다.

 플로리다 팜파노 비치의 작은 은행 ‘퍼스트 내셔널 팜파노’ 은행의 짐 포크스(Jim Fowlkes) 부행장이 당시로서는 큰돈인 7000달러 대출 승인을 해준 것이다. 쓰레기 처리 트럭과 쓰레기 보관함을 더 구입해 사업을 늘리려 했지만 돈줄을 찾지 못해 고민하던 휘징가 회장에게는 하늘이 보내준 천사가 아닐 수 없었다. 포크스 부행장은 뒷날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대출 서류에 사인을 하니 웨인(휘징가 회장)의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사실 그 친구가 그때까지 그렇게 큰돈을 빌리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자선 사업가는 아니었고, 내가 보기엔 쓰레기처리 사업이 좀 더럽고 위험하긴 해도 부도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라고 회상했다.

 어쨌든 포크스 부행장의 결단이 휘징가 회장의 미래를 밝은 쪽으로 이끌어준 셈이다. 이 자금으로 트럭을 사고 설비를 늘려 회사 규모를 키우고 또 연이어 합병을 할 수 있는 자금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휘징가 회장은 대출 규모를 늘려가면서도 신용은 잃지 않았고 포크스 부행장은 개인 대출 한도를 넘기면서까지 계속 설비자금을 빌려줬다. 이 거래는 포크스 부행장이 은퇴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때 기반을 다진 덕택에 개인 사업을 WM이라는 상장업체로까지 성장시킬 수 있었다.

 두 번째 큰 위기는 WM이 출범하고 난 뒤 외부에서 날아왔다. 1968년 말 텍사스주 휴스턴의 28세 청년 톰 파치오라는 회계사가 트럭 4대로 쓰레기 처리회사를 설립한다. 이 회계사는 휘징가 회장과 달리 자금시장 사정에 능통했다. 1년여 만에 매출규모를 100만달러 대로 키운 뒤 하버드 MBA 출신의 파트너를 영입, 뉴욕 증시에 상장돼 있던 기계 제작업체인 BFM을 인수한다. 그리고 자신의 회사와 합병하는 소위 ‘우회등록’ 방식으로 월스트리트에 자신을 알렸다. 회사 이름을 BFI(Browning-Ferri's Industries)로 바꾼 이들은 무서운 속도로 주변의 소규모 쓰레기 처리회사를 합병해 들어오기 시작한다.



 타이밍에 민감한 ‘인수의 천재’

 이들의 합병 시도는 마침내 WM에게까지 이르렀다. 비록 우회등록했지만 상장업체라는 신용도와 자금력을 바탕으로 WM의 지분도 인수하겠다는 오퍼를 낸 것이다. 빨리 응하지 않으면 다른 회사들을 합병해 WM을 고립시키겠다는 협박도 함께 해왔다. 며칠을 고민하던 번트록과 휘징가 회장은 이 위기를 기회로 돌린다. 합병 제안을 거절하는 대신 WM을 상장시키기로 한 것이다.

 BFI처럼 우회등록할 수 있는 길이 찾아지지 않자 이들은 직상장의 길을 모색한다. 휘징가 회장은 재무전문가들을 영입, 뉴욕 증시로 가는 길을 닦게 되는데, 당시 재무담당 최고책임자로 영입한 돈 플린(Don Flynn) 부사장은 1년여 만에 상장을 성사시키고 휘징가 회장과 평생 동지이자 사업 파트너가 되어 나중에 블록버스터 투자에도 동참한다.

 1973년 마침내 뉴욕 증시에 입성한 WM의 앞길에도 BFI와 마찬가지로 소형업체 인수와 합병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문제는 누가 더 빨리 정상에 도달하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휘징가 회장이 그 일을 해냈다. 그는 엄청난 속도로 영역을 확장해나가 9개월 만에 무려 100여개 소규모 회사들을 인수, 미국 동부의 쓰레기 수거 유통망을 대부분 장악하게 된다.

 BFI를 따돌리는 데 성공한 WM은 쓰레기 수거업계에서 독보적인 기업으로 올라선다. 뉴욕 증시 상장 이후 자금력과 인지도를 바탕으로 해외에도 눈을 돌려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쓰레기처리 사업권을 따낸 데 이어 아랍권에 본격 진출했으며 1991년 걸프전 때 쿠웨이트시티에 현지사무소를 설립, 이라크군이 떠난 뒤처리를 맡기도 했다.

 위대한 창업가들은 단순히 ‘사업을 시작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계속 발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룩하는 것이다. 휘징가 회장 역시 ‘쓰레기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눈을 갖고 있었다. ‘인수의 천재’ ‘딜의 제왕’이라는 명성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일례로 블록버스터를 인수할 때 그가 어떤 부분을 주목했는지 들어보자.

 “인수가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만일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이게 결실을 맺을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또 종업원은 물론 주주들까지 지속적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나갈 것인지 설득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이미 시작한 사업 가운데 알짜배기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시간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다. 물론 겉으로는 문제가 있어도 내용이 알찬 회사를 골라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내가 블록버스터를 인수했을 당시 사람들은 내가 돈만 날리고 실패할 거라고 했다. 심지어 어떤 지인들은 집에 VCR도 없으면서 어떻게 블록버스터를 인수할 생각이냐며 말렸다. 도대체 비디오가 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비디오 대여업체를 경영하겠느냐는 것이었다. 난 이렇게 답했다. ‘WM 시절에도 나는 경영에 열심이었지 쓰레기 수거라는 내용에 집중한 게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돈 버는 일에 집중하겠다는 것이지 비디오 대여라는 내용에는 관심 없다’고 말이다. 비디오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난 블록버스터가 대여업이란 좋은 본질을 가지고도 여러 가지 전술적 측면에서 오류를 범했다는 걸 간파했다. 예컨대 블록버스터의 창업자는 임대료가 싼 곳만 찾다 보니 쇼핑몰의 뒤쪽이나 출입구에서 먼 쪽에 작은 가게를 내거나 간선도로에서 떨어진 곳을 입지로 삼는 등 위치 선정에서부터 문제가 많았다. 인수 후 점포 위치는 물론 내부 장식, 간판 크기 등도 내가 다 뜯어고쳤다. 이후 블록버스터는 큰 길가, 밝은 곳에 주차장도 크게 확보된 곳에만 들어갔다. 대부분 비디오는 밤에 빌리러 오는데 차에서 내려 가게로 오는 길이 어두워서야 누가 올 맛이 나겠는가.” (<포천> 2003년 3월23일자)

 그는 소위 ‘가방 끈이 긴’ 경영자는 아니지만 현장에서 연마된 예리하고 날카로운 안목을 갖고 있다. 맨손으로 일구다시피한 세 회사를 뉴욕 증시에 상장시키고 ‘<포천> 500대 기업’에 등재시키는 것이 쉬운 일이었겠는가. 휘징가 회장은 남들이 잘 주목하지 않는 부분에서 본질을 유추해내려 노력했다.

 일례로 그는 블록버스터의 대표이사를 맡던 시절 직원들로부터 ‘화장실에 간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무실로 출근하거나 계열 점포를 방문할 때 반드시 화장실부터 찾았기 때문이다. 직원들의 정신상태를 간접적으로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화장실이 깨끗하게 유지돼 있다면 직원들의 마음가짐이 문제없다는 증거이고 만일 화장실이 더러우면 다른 사무실은 물론 마음까지도 정돈돼 있지 않다는 게 그의 경영비결이었다.

 휘징가 회장은 또 ‘속도전의 명수’다. 그는 천성적으로 속도를 즐겼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기회가 주어지면 전광석화처럼 실행에 옮겼다. 블록버스터의 경영을 맡은 7년 동안 그는 경쟁자가 정신을 차릴 겨를도 주지 않고 광속(光速)에 가까운 속도로 점포를 늘려나갔다.

 속도전은 쓰레기 수거사업을 하면서 터득한 것이다. 그는 “쓰레기를 제때 치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마찬가지로 기업 인수에도 타이밍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WM을 확장할 때 역시 경쟁 쓰레기 수거업체가 접근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먼저 행동에 옮겼다. 그리고 인수한 업체들의 대표와 직원들은 그대로 유지한 채 이름만 WM을 붙이는 방법으로 조직내 반발을 미연에 막고 안정적인 경영을 이룰 수 있었다

 자금난을 일찍부터 겪었던 그는 상장기업이 된 뒤에는 이 지위를 백분 활용, 대출보다는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을 주로 구사했다. 그리고 끊임없는 확장을 임직원들에게 주문했다. ‘확장만이 살 길’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막대한 부를 그에게 안겨준 블록버스터 인수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1984년 47세 되던 해 WM사의 경영에서 손을 뗀 그는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새로운 인수대상을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인 존 멜크가 시카고 근교에서 운영하고 있던 블록버스터 비디오 대여점을 방문하게 된다. 휘징가 회장은 처음에는 비디오 대여사업에 비관적이었지만 WM사의 재무담당 임원이었던 돈 플린과 함께 검토한 결과 승산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일단 결론이 나자 일은 전광석화처럼 진행됐다. 1987년 휘징가 회장은 다른 파트너 두 사람과 함께 당시 체인점 8개를 갖고 있던 비디오 대여점 블록버스터를 인수한 뒤 곧바로 확장전략을 펼친다. 1988년 본사를 플로리다  포트 로더데일로 옮긴 블록버스터는 1년 만에 500개의 점포를 확장한다.  1990년에는 영국에도 진출, 유럽 진출의 발판을 닦는다. 1990년말 캐나다를 포함, 전 세계에 1000개 점포를 확보한다.

 이어 1991년에는 미국의 3위 비디오 대여체인인 에롤즈 비디오를 인수, 그 해 말에 점포  수를 1500개로 늘린다. 1994년에는 미국 남동부의 음반 비디오 도매업체인 수퍼클럽 엔터테인먼트를 인수했으며 바이어콤이 경영에 참여한 1995년부터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페루 등 남미 및 이탈리아, 뉴질랜드, 이스라엘 등 전 세계 곳곳에 점포를 열었다.

 얼마나 확장속도가 빨랐던지 인수 직후 19개 점포에 매출액 700만달러짜리 기업이었던 블록버스터는 10년도 되기 전에 전 세계 11개 국가에 3700개 점포를 거느리고 연매출 40억달러를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휘징가 회장이 CEO로 일하던 1988년부터 1994년 사이 평균 17시간에 한 개꼴로 점포가 늘어났다. 휘징가 회장이 대표이사로 블록버스터의 경영에 참여해 바이어콤에 지분을 넘길 때까지 이 회사의 주가는 ‘4000% 상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그는 인수한 지 3년 만에 블록버스터를 뉴욕 증시에 상장시켰으며 7년 만에 84억달러(당시 주가 기준) 규모의 주식 교환 방식으로 바이어콤에 매각할 수 있었다.

 블록버스터는 현재 비디오, DVD 그리고 컴퓨터 게임 대여업체 중 세계 최대다. 프랜차이즈 체인을 포함해 27개국에 8900여개 점포를 두고 있다. 하루에 거래되는 비디오 개수만도 100만개를 넘어선다. 비록 휘징가 회장이 떠난 뒤이긴 하지만 이 회사는 지난 2003년 매출액만 59억달러를 기록했다.



 호텔과 리조트 사업에 관심 많아

 블록버스터는 고객들의 충성도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일례로 월 일정액만 납부하면 언제 어느 때나 비디오나 DVD, 게임 등을 대여해갈 수 있으며 반납기일이 따로 없고 따라서 연체료도 물지 않는다. 최근 들어 비디오나 DVD 대여사업은 사양화되는 추세지만 블록버스터는 틈새시장을 잘 찾아냈다 할 수 있다.

 블록버스터가 최초로 출범한 텍사스주 댈러스는 1997년 이 회사가 세계본부를 댈러스로 다시 옮겨오자 5월16일을 ‘블록버스터의 날’로 지정해 환영했다. 이 모든 것이 휘징가 회장이 뿌린 씨앗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블록버스터 매각이 끝난 뒤 휘징가 회장은 오토네이션(AutoNation Inc)을 창업한다. 이 회사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전국 체인망을 갖춘 자동차 딜러 회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통 지역의 재력가들이 GM, 포드 등 자동차 메이커로부터 딜러권을 인수받아 많아야 20여개 안팎의 딜러숍을 열지만 휘징가 회장은 처음부터 전국적인 체인망으로 성장시킬 계획을 세웠다. 현재 오토네이션은 미국 전역에 385개 점포를 보유하고 있으며 지난 2003년 뉴욕 증시에 상장됐다.

 오토네이션의 역사는 1997년 휘징가 회장이 ‘국내 최대의 중고차 슈퍼마켓을 열겠다’는 구상에서 출발했다. 물론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뒤부터는 신차도 취급하기 시작했다. 오토네이션의 발전도 휘징가 회장의 장기인 ‘인수와 확장’을 통해 가능했다. 우선 플로리다주 등 소위 선벨트(Sun Belt : 미국 남부 은퇴자들이 많이 몰려 사는 따뜻한 지역)부터 시작해 지역 딜러숍을 인수하거나 신규 점포를 하나씩 개설해나갔다.

 휘징가 회장은 처음에는 모든 딜러숍을 동일한 브랜드 아래 묶었으나 독점에 대한 반발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자 지역별로 서로 다른 브랜드로 바꿔버렸다. 예를 들어 플로리다주에서는 오토웨이, 콜로라도주 덴버에서는 존 얼웨이,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는 파워라는 브랜드를 다는 식이다.

 오토네이션은 또 미국 딜러업계에서는 드물게 ‘전국 체인점 가격 단일화’ 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소매업계의 월마트나 코스트코처럼 전 지점 가격단일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그래서 오토네이션 딜러숍 계열사를 찾는 고객들은 가격에 대해서는 믿고 거래할 수 있게 된다.

 휘징가 회장은 최근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동차 가격이란 게 딜러숍별로 천차만별인 게 현실”이라며 “하지만 처음부터 나는 전국의 오토네이션 계열 점포들이 동일한 차에 대해서는 동일한 가격을 유지하도록 방침을 정했다”고 말했다.

 물론 가격이 동일하다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된 건 아니었다. 휘징가 회장은 이 인터뷰에서 “가격 단일화의 가장 큰 약점은 경쟁업체가 우리 가격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것”이라며 “단일화된 가격으로 동네에서 가장 싼 값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휘징가 회장은 가격을 하나의 수준으로 묶어놓은 뒤 고객 서비스에 주력하 도록 기업문화를 만들어나갔다. 가끔 지역에서 최저가를 제시하지 못할 경우가 있는데 이럴때는 서비스로 고객들을 만족시키겠다는 방침이었다. ‘저가 단일화’와 ‘고객만족’은 위력을 발휘해 오토네이션이 짧은 시간에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현재 미국 17개 주, 281개 도시에 385개 체인점을 둔 오토네이션은 2004년 매출액이 194억달러(약 20조원)에 달한다. 플로리다주에 위치한 상장기업 중 매출액 1위 기업으로 기록됐다. 뉴욕 증시에 상장된 오토네이션의 주가는 최근 15~20달러 사이를 오가고 있어 시가총액이 50억달러에 달한다.

오토네이션은 지난 3월1일 창업 이후 500만 번째 자동차를 팔았다. 이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올해 말 200억달러에 육박하는 매출액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오토네이션의 뒤를 잇는 2위 자동차 딜러업체인 유나이티드 오토그룹의 두 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오토네이션은 <포천>이 올해 초 선정한 ‘미국의 가장 존경받는 기업’상에서 4년 연속 자동차 소매분야 1위로 기록됐다. 이 상은 같은 업계의 동료회사들이 투표를 해 선정한다는 점에서 오토네이션이 딜러업계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휘징가 회장은 지난 40여년 동안 사업을 하면서 논쟁에 휩싸인 적이 많다. 특히 쓰레기 수거회사를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지자체와 마찰도 많았고 심지어는 마피아와 연계됐다는 의혹까지 받았다. 그러나 미국 증권관리위원회는 물론 FBI의 조사에서도 마피아 건을 포함, 단 하나의 의혹도 사실로 밝혀진 적이 없다. 쓰레기 수거사업의 특성상 일반 대중들이 ‘마피아와 손을 잡았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 작용한 데다 단기간에 급속도로 기업을 성장시키다 보니 주위의 질시를 받아 의혹에 시달린 것일 뿐이다.

 그러나 휘징가 회장은 ‘깡’으로 이 난관과 어려움을 견뎌냈다. 1960년대 쓰레기 수거회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 부당하게 자신을 밀어붙이던 보안관의 사타구니를 걷어찬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형사상으로는 큰 제재를 받지 않았으나 민사소송에서는 1000달러를 배상해야 했다. 또 1970년대 플로리다주의 한 신문이 ‘마피아 연계설’을 기사화하자 ‘우리 할아버지는 저를 자랑스럽게 여기실 겁니다’란 제목으로 ‘19세기 말에 쓰레기 처리회사를 설립한 조부의 유지(遺志)를 잇고 있을 뿐 불법을 저지르지는 않았다’는 요지의 공개서한을 다른 신문에 내기도 했다.

 휘징가 회장은 최근 호텔과 리조트 사업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현재 그는 익스텐디드 스테이 아메리카(Extended Stay America : ESA) 이사회 의장을 한 경험을 살려 카리브해 보카 리조트에 경영 자문을 해주고 있다. 뉴욕 증시 상장업체인 ESA 체인은 현재 457개 호텔을 보유하고 있는데 단기 투숙객보다는 사업, 여행 등 중장기 투숙객 위주로 영업하고 있는 업체다. 그는 2004년 3월 ESA의 지분을 1억8000만달러(약 2000억원)에 블랙스톤 펀드에 넘기고 보카 리조트로 발길을 옮겼다.

 ‘뭔가 빌려주는’ 사업으로 성공한 그의 노년의 행보가 ‘방을 빌려주고’ 돈을 받는 호텔 리조트업이라니, 휘징가 회장의 초지일관(初志一貫)을 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