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플러스>는 한국산업인력공단과 공동으로 해외 취업 특집을 진행한다. 외국어와 전문 지식으로 무장하고 세계를 안방처럼 넘나들겠다는 디지털 노마드 마인드로 무장한 이들의 도전 현장을 따라가 본다.

 기는 필리핀의 수도 매트로 마닐라에 위치한 마가티시티라는 곳이다. 한국으로 치면 종로나 광화문쯤으로 수도 매트로 마닐라 중에서도 중심부에 해당된다. 이곳에 나의 새로운 직장 ‘KLC학원’이 있다. 이 학원은 한국어 교육을 원하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이다.

 적지 않은 나이라 할 수 있는 31세, 나는 호텔 매니저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그만두고 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새로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다. “도대체 왜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우리나라보다 형편이 좋지 않은 나라에 굳이 가서 살겠다는 거야?”

 필리핀에 도착한 것은 3월10일, 생활한 지 두달이 지났다. 다들 조심스럽게 묻는다. “지내기 괜찮느냐?”고. 물론이다. 견딜 만한 정도가 아니라 무척 만족스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호텔 매니저에서 한국어 강사로 변신

 한국어 강사가 되기 전, 나는 호텔 식음료 부문 매니저로 일했었다. 성공적인 커리어 우먼을 꿈꿀 정도로 야심도 크지 않았다. 대학 나와서 취직을 했고, 수년간 직장 생활에 충실했다. 다만 건강에 이상이 생겨 회사를 잠시 쉬어야 했지만, 건강을 회복한 뒤 다시 취직을 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나에게 세상의 다른 길과 삶을 알려준 이들은 바로 한국에 와 있던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한국의 많은 호텔이 그러하듯, 내가 일하던 호텔에도 필리핀 가수와 밴드가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다 보니 접촉할 기회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친분이 쌓여졌다. 그들과 친하게 지내다 보니 한국에 취업해 있는 다른 필리핀 사람들도 만나게 됐다. 그 전까지 나는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실상이나 현실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을 알았고, 안타까움과 미안한 감정을 동시에 갖게 됐다. 직접 만나본 그들은 선하고 착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겪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 냉혹했다. 막연하나마 그들에게 힘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가치관에 적잖은 변화를 주었다. 뭔가 사회에 직접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그것이었다. 갈등 때문이었는지 몸도 약해졌고, 호텔에 사표를 제출하고 건강 회복에 일단 전념키로 했다. 호텔 생활 4년만이었다.

 건강을 회복하고 쉬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던 내 눈에 ‘한국어 강사’란 직종이 눈에 띄었다. 다른 직업의 길을 찾던 중 한국어 강사라는 직업이 ‘이거다!’ 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시행하는 해외 취업 연수생 모집 직종 중 ‘한국어 강사’ 공고를 본 것이다. 외국인들과의 접촉이 잦은 직업이라 영어와 일본어의 일상회화 정도는 구사하던 터라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연수생 모집에 응모했다. 결과는 좋았다. 1기 한국어 강사 모집에 합격한 것이다. 호텔에 근무할 당시 주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호텔에서 한국어 강좌를 개설, 그곳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 경험이 높이 평가를 받은 것 같았다.



 돈보다 ‘여유와 남을 돕는 가치’에 매력

 외국에 나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게 주 업무인 한국어 강사라지만, 1기 연수생들에게는 어느 나라에 가서 가르치게 된다는 조건이 없었다. 다만 한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고국이 될 것이란 사전 설명 정도였다. 다른 나라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내심 필리핀으로 갈 수 있길 바랐다. 호텔에서 만났던 필리핀 친구들을 통해 필리핀 사정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던 데다 성당에 다니는 나로선 국민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 사람들에게 끌렸던 것이다.

 2004년 3월부터 시작된 강의는 4개월(320시간) 동안 진행됐다. 하루 평균 4시간의 강의를 받았다. 한국어로 강의하는 법 2시간과 외국어 강의를 각각 2시간씩 받았다. 2005년부터는 해당 국가의 언어를 배운다고 하는데, 내가 배우던 작년만 해도 외국어는 영어를 주로 배웠다. 연수에 참여하면서 솔직히 불안했다. 교육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내가 과연 제대로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그런데 참여한 연수생들을 살펴보자 대부분 나처럼 교육학 전공과는 무관했다. 연수를 주관하는 공단 관계자나 연수를 위촉받은 교육기관 관계자들은 주로 “외국에 나가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열심히 살 수 있는지 여부”를 평가 기준으로 삼는다고 했다.

 한국어 강사 1기로 뽑힌 사람은 모두 60명. 나이도 해외로 취업코자 하는 의욕도 비슷한 우리는 금세 의기투합했고, 즐겁게 연수 과정을 보낼 수 있었다.

 취업 기회는 비교적 일찍 찾아왔다. 연수가 끝날 무렵 필리핀 한국어 강사를 선발하기 위해 현지 업체에서 인터뷰를 왔다. 뜻밖에 일찍 찾아온 기회는, 그러나 도중에 문제가 생겨 취소되고 말았다. 다소 의기소침해 있던 우리에게 관계자들은 “외국인 노동자는 지속적으로 선발될 테니 여유를 갖고 기다리라”고 위로를 해주었다.

 외국어 강사가 되어 필리핀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하자 다시 호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남들은 한국보다 여러 면에서 낙후된 나라에 왜 가서 살려고 하느냐고 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필리핀 사람, 내가 가본 필리핀이란 나라는 그런 잣대로 재단해선 안되는 나라였다. 2002년 20일 동안 필리핀의 마닐라, 보라카이, 수빅 등지를 혼자 여행하면서 나는 착하고 여유로운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던 터였다.

 연수 기간을 거치면서도 부모님께는 차마 “필리핀으로 한국어 강사가 되어 나가는 연수를 받고 있다”고 말씀드리지 못했다. 결혼도 안한 딸이 외국에 공부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취업하러 간다면 걱정하고 말리실 게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냥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현지 관계자가 인터뷰를 왔던 8월, 용기를 내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부모님은 한국어 강사를 하더라도 한국을 떠나지 않고 이 땅에서 외국인을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 계셨다. 엄격한 스타일의 아버지는 예상대로 못마땅해 하셨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가 우군으로 나섰다. “네가 하고 싶고, 무엇보다 스스로 즐거울 수 있다면 해보라”고 등을 밀어주신 것이다.

 연수가 끝나고 다시 ‘백수’가 된 나는 한국에 있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며 취업 기회를 기다렸다. 불안정한 신분 때문에 가끔은 초조하기도 했지만, 이미 마음을 굳히고 방향을 정한 탓에 그리 힘들지 않았다. 올해 초, 필리핀 현지 교육 기관에서 한국인 강사 채용을 의뢰했고 나를 비롯한 5명의 연수생 출신 한국인 강사들은 기다리던 해외 취업 길에 올랐다.



 아버지뻘 근로자의 열성에  뭉클해지기도

 새로 바뀐 고용허가제 규정에 의해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 취업하려면 일정 수준의 한국어 능력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 임무는 필리핀 노동청에서 위탁받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일정 수준 이상의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규정은 8월17일부터 적용된다. 하지만 학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노동자들은 아직 많지 않다. 따라서 수업이 많은 편도 아니다. 규정상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주 5일을 근무하는 게 원칙인데, 주당 강의 시간을 채우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이유는 한국과 필리핀 당국 관계자 사이에 업무 협약이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날짜는 촉박한데 당국간 협의 문제로 제대로 수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 솔직히 초조하기도 했다. 그러자 필리핀 교육 담당 기관에선 단기간에 수업 효과를 내고자 2~3시간 연속 강의, 심지어 6시간이나 8시간 연속 강의를 요청하던 실정이었다. 한국어 강사로 파견돼 불과 두달밖에 지나지 않은 나도 6시간 강의를 맡은 적이 있었다. 말이 6시간 강의지, 6시간 내내 강의를 하다 보니 나중엔 입과 턱이 마비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 겨우 두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르치는 일은 힘들면서도 즐겁고 보람이 있다. 나이 어린 학생부터 아버지뻘 되는 분까지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눈에 불을 켜며 열심히 적고 따라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 한켠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이곳에선 여자 선생님을 ‘마마’라 부른다. 나이 많은 분이 나에게 ‘마마’라고 부를 때면 몸둘 바 몰라 하는 초보 선생님이기도 하다.

숙소는 학원에서 자동차로 10~20분 거리에 있다. 학원측에서 제공한 기숙사인 셈인데, 복층 아파트 구조로 생겼다. 1층엔 거실과 주방이 있고 2층에 침실이 있다. 다른 선생님 한 분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집 앞에는 공원이 있어 일이 끝나거나 주말이면 동료 강사나 성당 친구들과 함께 나들이를 하기도 한다.

 무더위와 교통 체증. 필리핀에 와서 나를 가장 괴롭히는 두 가지다. 5월이 필리핀에선 가장 더운 시기인데, 습도가 높아 ‘찜통’이란 표현이 실감난다. 출근 시간엔 택시를 주로 이용하는데 교통 정체가 한국의 러시아워 뺨친다. 또 노후 차량이 많아 도로를 달리던 택시 차문이 벌컥 열리는 경험도 두 차례나 했다. 너무 놀라 항의를 했더니 택시기사가 더 놀라 차를 세우더니 차문을 닫아 주기도 했다. 비록 가난하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대부분 착하다는 점을 새삼 실감했다.



 ‘빨리빨리’에서 ‘천천히’로 변화

 경제적 수준 차이로 필리핀에서 받는 보수는 한국보다 한참 적다. 그러나 필리핀에서 생활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다. 물질적인 보수의 감소를 감수할 수 있는 건 여유로운 리듬 속에 산다는 점이다. 빨리 빨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속 터질 일이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모든 게 여유롭다.  기후 환경이 그런 문화를 만든 것이기도 하겠지만, 덕분에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어 기쁘고 행복하다. 같이 일하는 분 중에는 신혼 생활 중 신부 혼자 와서 강사로 일하는 분도 있다. 그분 또한 필리핀의 여유로운 환경이 좋아 신혼의 단꿈도 포기한 채 왔다고 했다.

 한국어 강사 채용 기간은 계약서상 1년이다. 그러나 문제가 없고 서로 만족하는 한 재계약은 별로 문제가 없다는 게 나보다 먼저 한국어 강사를 시작한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서른한살에 필리핀에서 새롭게 시작한 내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 별로 걱정되거나 조바심이 나질 않는다. 내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착한 사람들과 여유롭게 사는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오성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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