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플러스>는 한국산업인력공단과 공동으로 해외 취업 특집을 진행한다. 외국어와 전문 지식으로 무장하고 세계를 안방처럼 넘나들겠다는 디지털 노마드 마인드로 무장한 이들의 도전 현장을 따라가 본다.
 는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lina) 주(州)에 위치한 그린빌(Greenvill)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유치원(정확하게 표현하자면 ‘Child Developement Center’)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 1966년생인 나는 올해 마흔 살이고,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일반 유치원 교사와 영어 유치원 교사 생활을 했다.

 “마흔 살에 미국으로 취업을?” 아마도 이런 질문을 나에게 던지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나이에 미국 가서 뭘 어쩌려고?” 하고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마흔이 넘었고, 그러나 전문적인 분야에서 계속 일하고 싶기 때문에 미국 유치원 교사 생활을 선택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한국은 중요 직위가 아닌 이상 나이든 여자들이 일하기 어려운 구조이다. 한국의 유치원은 젊고 보다 저렴한 임금으로 고용이 가능한 교사를 선호한다. 교사의 경험이나 연륜, 본인이 일하고 싶은 의욕은 불행히도 반영되지 않는다. 내가 한국을 떠난 이유의 상당 부분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했다.

 미국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본 건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2004년 10월이었다. 당시 나는 영어 전문 유치원에서 교사로 일하며 주말에는 어린이 영어 교사로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 이때 ‘젊은이여, 넓은 해외로 나가자’는 캐치프레이즈가 붙은 해외 취업 공고를 보았고, 유치원 교사 부문이 포함돼 있었다. 내가 원하던 바로 그런 일이었다.



 생각보다 센 노동강도에 놀라

 2년제 전문대학 유아교육학과를 졸업한 나는 공부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4년제 대학에 편입하기도 했고, 1997년부터 1998년까지 1년간 호주 유학을 다녀왔고, 일본으로 일본어 연수도 다녀왔다. 내 또래 친구들이 대부분 결혼해 아이를 낳고 가정주부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동안 나는 공부와 일에 전념했다. 결혼도 지난 2000년에야 했을 정도로 내 일을 하며 당당하게 사는 커리어우먼을 꿈꿨다.

 4명 남짓한 교사 모집에 1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다. 경력은 많지만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게 단점으로 작용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응시연령 45세까지여서 결코 나이가 문제 되지는 않을 듯해 안심했다. 현지에서 면접관이 나와 면접과 인터뷰를 치렀다. 취업 과정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나중에 들으니 원장이 비자 담당부서에 독촉한 결과였다.  12월 초, 나는 취업비자를 받아 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를 포함해 모두 4명의 유치원 교사들이 같은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많은 응모자 가운데 나이도 많은 내가 뽑힌 건 영어를 좋아해 오랫동안 공부하고, 그 덕분에 영어 유치원 교사를 했던 경험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그린빌은 작은 규모의 도시로, 미국 전역에 흔히 있는 한인 가게 하나 없는 곳이다. 아니,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원장 선생님이 한국에서 온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미국의 학제는 한국과는 달리 유치원 과정도 정규 교육과정에 해당된다. 정확하게 나는 유치원 교사로 미국에 온 게 아니라 바로 전 단계인 ‘아동개발센터’의 교사로 온 것이다(한국의 ‘놀이방’과 비슷하다. 민간인이 운영은 하되 운영 허가와 감독은 주 정부에서 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일찍이 호주나 일본에 유학과 연수를 가서도 낯선 이질감이라거나 고립감을 거의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난생 처음 간 미국의 작은 도시였지만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문제는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하루 8시간의 근무 시간 내내 나는 유치원 가기 전의 낮은 연령대 아이들과 항상 함께 있어야 했다. 처음 3개월 동안은 너무 힘들어 집에 가면 그대로 쓰러져 잠들기 일쑤였다. 특히 정신적 긴장감이 심했다.

 한국과는 다르게 미국의 육아 시스템은 갓난아이 때부터 아동개발센터 같은 곳에서 탁아를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아이들이 일찍 남의 손을 타게 되는데 종종 ‘되바라진’ 아이를 만나게 된다. 이제 겨우 말문이 트인 아이들이 혹시라도 위험에 빠질까 싶어 본능적으로 제어를 한 적이 있는데, “내 몸에 손대지 마!”하는 소릴 들었다. 한·미간 교육 방식의 차이는 그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각종 교재부터 식사에 이르기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달랐다. 처음 적응기에 가장 곤혹스러웠던 점은 아이들이 적잖은 경계심어린 눈초리로 나를 볼 때였다.

 내가 일하는 아동개발센터에는 대부분 서민층 자녀들이 다닌다. 일찍부터 공공 탁아기관에 맡겨지는 서민층 자녀들은 동양인인 나를 무척 경계했다. 그 경계의 눈빛 속에 “당신은 또 얼마나 나를 담당하다 떠날 거지?”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높은 임금에 대한 환상은 버려야

 낮은 연령 아이들은 특히 손이 많이 가고, 준비할 일도 많다 보니 한국 유치원생을 가르칠 때보다 일이 몇 곱절 이상 힘들었다. 미국 보육센터의 교사 자격은 고등학교 졸업자가 커뮤니티칼리지(개방대학)의 6주간 교육 과정을 이수하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자격 획득은 쉽지만 실제로 일을 해내는 건 만만치 않다(유치원 교사 경험을 오래 한 나도 처음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쓰러져 잠드는 게 당연할 정도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 직업은 이직이 잦다. 교사들의 잦은 교체에 익숙해 있던 아이들은 생소한 동양인인 데다 새로 부임한 나에게 선뜻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아이들도 서로에게 익숙해졌고, 3개월쯤 지나자 비로소 여유가 생겨났다.

 여유가 생겨나자 내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과 한국에 두고 온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갑작스럽게 밀려왔다. 미국 취업의 기회가 생겼다고 말하자 두말 않고 등을 떠밀어 준 남편이 새삼 보고 싶었다. 호주 유학 가서 만난 연하의 남편은 2000년 결혼 후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한 번도 반대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결혼한 몸으로 미국으로 홀로 취업을 갈 수 있던 데에는 이런 남편의 배려가 가장 크게 작용을 했다. 하루아침에 달려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보고 싶은 마음은 전화통화, 인터넷 메신저 등으로 달랬다.

 아동개발센터는 비교적 일찍 제도화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이 1명당 필요로 하는 공간의 크기, 필요한 장난감과 교육교재, 교사 1인당 아이들 숫자까지 주 당국의 철저한 관리감독 아래 이뤄진다. 오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일과를 마친 아이들도 아동개발센터를 찾는 경우가 있다. 방과 후 관리를 이곳에서 해주는 것이다.

 막상 이곳에 와 보니 정식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드물고, 대부분 시간제로 이 일을 하고 있었다. 현재 나는 3세(한국 나이 5세) 아이들을 맡고 있는데, 연령이 어릴수록 교사가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이 많아서 높은 체력이 요구된다. 대신 월급은 많은 편이 아니다. 원래 모집 광고에도 연봉은 1만 8000~2만달러로 적혀 있었다. 실제 내가 이곳에서 받는 임금은 하루 56달러다. 2주마다 급여를 받는데 560달러 정도 된다. 그 중 실수령액은 440달러 정도 된다.  여기에 주 정부에서 지급하는 연간 보조액이 3000달러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다.



 한국인의 성실성 이곳에서도 ‘대환영’

 노동의 강도나 급여 수준으로 볼 때 유치원 교사는 그다지 끌리는 직종은 아니다. 그러나 취업 비자가 쉽게 나오는 데다 이 일을 하면서 초·중등 교사가 될 기회가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이다. 솔직히 돈을 벌려는 목적만으로 본다면 미국에 오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한국에서 영어과외 하면서 한 달 200만원 이상 벌던 것에 비하면 미국 취업은 고생길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내가 미국에 온 이유는 나이 들어서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환경과 보다 큰 꿈을 위해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기회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것이 내 계획이다. 막상 미국에 와 보니 정규 교사들도 태부족한 상태다. 공공개발센터 교사도 일정 교육 과정을 이수하면 정규 교사가 될 수 있다. 아직 결정하지 않았지만 정규 교사직에 도전하는 걸 적극 검토 중이다. 통상 2~3년간 일을 해야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 신분이 안정된 다음이라면 충분히 전직을 고려해 볼 만하다.

 주 5일제 근무가 완전 정착된 나라인 만큼 토·일요일은 확실하게 쉰다. 이제는 여유를 갖고 주변 도시 여행에 다닐 정도로 제법 이곳 생활에 적응이 된 상태다. 봄에는 워싱턴으로 벚꽃축제도 다녀왔고, 라이트형제가 최초로 시험비행을 한 곳도 다녀왔다. 한인 가게도 없을 정도로 작은 소읍이지만 한인 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그러나 난 현지 미국인과 교류가 더 절실한 상황이기 때문에 미국인 교회에 나가고 있다.

 이곳에서 일한 지 아직 1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몸담고 있는 아동개발센터에서는 한국인이라면 ‘대환영’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관공서나 근로자들이 일하는 태도를 보면 형식적으로 마지못해 일한다는 냄새를 풀풀 풍긴다. 정해진 시간만 일하다 가면 그뿐이라는 분위기는 일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꺼번에 자르면 금방 할 일을 하나씩 천천히 오리고 있는 식이다. 나와 또 다른 한국인 선생님 한 분이 이곳에 왔는데, 한국인 교사들의 빠른 일처리와 야무진 솜씨에 현지 사람들은 무척 놀란다. 내가 있는 센터만 해도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피아노를 놀리고 있었다. 내가 가서 피아노를 치면서 아이들과 놀아 주자 다들 놀라는 눈치가 역력했다. 이후 흑인들이 은근히 우리를 경계하는 눈치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마흔 살의 나이에 새로운 꿈을 펼치고자 미국 땅에 온 지 10개월. 생각보다 힘든 육체적·정신적 스트레스로 고생도 했지만 “앞으로 한국인 선생님이라면 대환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미국 취업이 하루아침에 대단한 사회적 성공이나 부를 가져다주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 쉬운 예로, 휴가는 무급이라 방학 중인 교사가 공공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일상적인 곳이다. 그럼에도 나는 누군가 미국 유치원 교사가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지금까지 일해 본 결과, 일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고 다른 기회를 갖기에도 충분한 땅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미국은 내게 ‘기회가 충분한 나라’다. 이제 그 기회를 잡고, 살리기 위해 내가 노력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