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학력 청년 실업이 경제에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열정과 의욕이 넘쳐나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백수’로 지내야 하는 현실은 본인에게도 고통이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의 다른 말이라고 한다. 눈을 밖으로 돌려 해외에서 인생의 비전을 발견하고자 하는 젊은이들도 많다. 외국어와 전문 지식, 세계를 안방처럼 넘나들겠다는 디지털 노마드 마인드로 무장한 이들의 도전 현장.

  이름은 정세영(25세). KCH 글로벌 로지스틱(GLOBAL LOGISTICS. CO., LTD)라는 회사에 입사, 현재 5개월째 근무 중이다. 우리 회사는 한국-중국 간의 물류 서비스를 하는 회사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한국과 중국 합자회사로 중국 내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화물 운송 업무를 대행하는 물류 회사다. 한·중 특송 물량 부문에서는 2000여개 업체 중 1위일 정도로 알아주는 회사다.

 지금 나는 중국 상하이의 소주 지역에서 일하고 있다. 10여 명 중국 직원들의 업무 관리가 주요 업무다. 고객 업체들의 대부분이 한국 업체인데, 실무자의 경우 중국인들로 구성돼 있어 한국의 서비스 정신과 중국어 구사 능력이 동시에 요구된다.

 5개월 전인 2004년 8월16일, 나는 직장인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2003년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에서 제공하는 6개월의 국비 ‘해외 지역 전문가 과정’을 이수한 뒤 얻게 된 첫 직장. 중국 비즈니스 전문가를 꿈꿔 왔던 나였기에 취업의 기쁨은 하늘을 찔렀다. 연수를 하면서 욕심에 못 미치는 실력 때문에 눈물을 쏟았던 일, 취업할 회사를 찾기 위해 밤새 인터넷 검색을 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서울이 고향인 나는 작은 회사를 운영하시는 아버지와 친구처럼 좋은 어머니의 딸만 셋인 집안의 막내딸로 어려움 모르고 자랐다. 별다른 생각 없이 덕성여대 중어중문학과를 다니던 나는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야 비로소 ‘이제 곧 진짜 어른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철부지였다. 대학 졸업반이던 2002년 7월, 중국 베이징으로 언어 연수 길에 올랐다. ‘내가 중국어를 전공으로 선택하길 정말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고, 그 자체로 나에게 많은 기회를 줄 땅이라는 자각이 들었던 것이다. 뒤늦게 욕심이 발동한 나는 짧은 기간 안에 최대한 많은 것을 배우기로 했고, 욕심껏 공부를 했다. 그러나 대학 3년 반 동안 배웠던 중국어는 초급에 불과했다. 중국어는 배우면 배울수록 어려웠고, 힘에 부쳐 울기도 여러 번 울었다.



 취업난 속 밤새 취업정보 찾으며 방황



 중국에는 나와 같은 생각으로 유학을 온 학생들이 많았다. 덕분에 외로운 유학생활에 적잖은 힘이 됐다. 무엇보다 중국어만 할 줄 알고 중국을 모르는 내게 삼성의 ‘현지 전문가 과정’을 밟고 있던 ‘아저씨’(지금도 나는 그 분을 아저씨라 부르고, 자주 만나 도움을 받는다)는 특히 좋은 선생님이 돼 주었다. ‘졸업을 하면 나도 아저씨처럼 중국을 제대로 아는 중국 전문가가 돼 중국 현장에 나와 일하는 주재원이 되고 싶다’는 구체적인 꿈을 그때 갖게 됐다.

 2003년 졸업을 앞두고 나는 취업과 대학원 진학을 사이에 두고 많은 갈등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취업을 위해 학교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며 밤을 새기도 하고, 또 하루는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온 대학원 서류 전형을 살피면서 보내기도 했다.

 유례없는 취업난 속에서 좋은 조건의 직장을 구하는 것은 어려웠다. 게다가 나의 마음속에는 ‘중국 관련 일을 하고 싶어도 나는 많이 부족해’ 하는 열등감,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것과 중국어로 실무 업무를 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취업에 대한 불안감과 회의는 컸다. 그러던 중 12월 초, 조간신문에서 한국산업인력공단 주최 국비 지원 ‘중국 비즈니스 전문가 양성 과정’ 서류 전형 모집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좋은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

 비즈니스 과정 서류 심사를 위해 원서를 낼 무렵, 나는 여러 기업체에 입사 원서를 내놓은 상태였다. 당연히 준비가 부족했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원서를 제출하고 몇 주가 지나고 인터넷을 통해 서류 합격 통지를 받았다. 대학 입학 후 ‘합격’이란 말을 처음 듣는 순간이었다. 취업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기뻤다. 그러나 또 다른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200여 명의 서류 전형 합격자 중에서 다시 60명만이 ‘중국 비즈니스 전문가 양성 과정’ 엔트리에 포함된다고 했다. 최종 면접 심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졸업사진을 찍고 난 뒤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정장을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준비한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 장소로 들어갔다. 조금 깐깐해 보이는 심사위원은 진땀나는 질문을 퍼부어댔다.

 “면접을 통과하고 교육생으로 뽑히게 되면 하루 24시간 끊임없이 공부해야 할 겁니다. 준비돼 있습니까?”

 “중어중문과를 졸업했는데, 중국어는 어느 정도 할 수 있나요?”

 “중국어 회화 능력란에 ‘현지인과 같은 회화 가능’이라고 했는데, 이건 본인의 생각인가요?”

교과서에나 나옴직한 답답한 대답을 겨우 내뱉은 뒤 불안한 마음으로 면접장을 빠져나왔는데 며칠 후 합격했다는 통지가 왔다. 합격 통지를 기다리는 동안 몸이 불편한 상태였지만 나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연수는 매일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4시까지 비즈니스 중국어, 중국 일반 무역, IT 중국어 등이 이어졌다. 오후 4시 이후에도 교육원을 개방해 학생들은 자유롭게 팀 스터디를 할 수 있었다. 팀별 과제도 주어졌다. 팀을 이루어 무역 거래에 관한 상담 과정 시나리오를 작성해 발표해야 하는가 하면, 마케팅에 관한 실무 수업, 중국 전문가 초청 강연, 다양한 과외 활동 등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이어졌다.

 부지런히 무언가를 배우기는 하지만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고, 불안감은 모두에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했다.

 “우리말이야. 6개월 후 중국 여기저기서 일하면서 연락하면 얼마나 신날까? 베이징에 가도, 상하이에 가도, 선전에 가도, 어디에 가든 우리들 중 누군가가 있다면 참 신기하겠지?”



 뚜렷한 목표의식이 가장 큰 힘

 술자리에서 웃으며 했던 이 말이 현실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정진했다. 6개월이 또 눈 깜짝 할 사이 지나갔다. 그 와중에 몇 명의 친구들이 취업의 꿈을 이뤄 중국으로 떠나갔다. 함께 공부하던 사람들이 취직이 되자 불안감에 조급증이 다시 도져오기 시작했다. 중국 현지로 나가 해외를 누비는 전문가가 되길 꿈꿨고, 그렇게 되자고 다짐을 했지만 과연 내가 그렇게 될 수 있을지는 나 자신도 믿지를 못했다.

 때문에 중국어 관련 국내 취업을 알아보기도 했고, 연수 과정과 상관없는 취업이라도 일단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초조함에 몇 개 업체에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았다. 합격 통지를 받기도 했다. 합격 사실은 기뻤지만 이내 내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수원 과정을 거치면서 이미 굳어진 ‘해외 주재원’이라는 꿈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불안했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연수 과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상하이-소주 지역에 있는 KCH 글로벌 로지스틱스라는 한중 합작 기업으로부터 취업 의뢰가 들어왔다. 중국 상주 직원을 뽑는다고 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면접에 임했다.

 KCH에서는 면접 대상자를 선정했고 총 20여 명의 면접자 중 6명의 신입사원을 채용키로 했다. 사장님이 직접 면접을 보았다. 면접은 특별히 부담스럽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의 면접을 했던 경험의 힘이었다. 사장님은 자신의 회사와 일에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계신 분이었다. 내가 찾던 오너의 전형이었다. 면접이 끝난 후 사장님은 응시생들과 점심을 함께 했다.  메뉴로 고등어 백반이 나왔다. 스커트 차림의 나는 무릎을 꿇고 팔뚝만한 생선 한 토막과 밥 한 그릇을 비워야 했다. 점심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진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며칠 후 입사를 축하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중국 전문가로의 첫발을 마침내 내딛게 됐다는 기쁨도 잠깐, 막내딸을 타지로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다. 나 역시 부모님과 떨어져 외국에 나가 산다는 두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부모님의 걱정은 나의 그것보다 훨씬 컸던 것이다. 나는 진지하게 나의 꿈과 포부를 부모님께 전했다. 여전히 못 미더운, 물가에 어린 자식 내놓은 눈빛이었지만 부모님은 결국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일주일 동안 한국 본사에서의 교육을 마치고,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 현지의 각 지사 탐방과 교육이 시작됐다. 현지의 담당 주재원을 만나 교육을 받게 되자 ‘정말 내가 중국에 왔구나. 회사원이 됐구나’ 하는 실감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설렘과 책임감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9월 초, 나의 근무지는 상하이 지사로 결정됐다. 상하이 화동지역의 한국 업체들을 방문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상하이 지사에는 다섯 명의 한국 주재원이 상주하고 있는데, 타지에서 함께 생활하다 보니 총경리님과 과장님께서 가족 같은 분위기로 도와주어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주요 업무는 한국 상하이(소주, 우장, 쿤산 등 화동지구)의 물류 관련 각종 업무(통관, 배송), 고객 업체 방문과 상담, 소주 사무소의 업무 지원, 중국 직원 관리 등이 나에게 주어졌다.

 입사 후 한 달쯤 지난 10월1일 국경일, 처음으로 혼자 당직을 서게 됐다. 대부분의 업체가 휴무인데다, 바로 위 상사인 과장님이 잘 정리된 업무 인수 인계표를 주셨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긴장감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의외의 전화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상사인 과장님이 건네준 업무 인수 인계표에 없는 돌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다급하게 울려대는 전화를 받은 다음, 휴일을 맞아 한국으로 떠난 과장님께 전화로 상황을 알리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결국 국경일 연휴가 끝나고 상황이 정리될 즈음엔 급기야 내 입술은 오리처럼 부풀어 올라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그때의 긴장되던 순간을 생각하면 머리가 다시 어지러워지는 것 같다.



 우왕좌왕, 좌충우돌 5개월

 눈앞이 캄캄해지던 순간도 있었다. 업체를 방문하기 전날, 나는 몇 시간 동안 공들여 자료를 준비했다. 업체별로 나누어 클립을 끼우고 메모를 해 파일에 넣어 깔끔하게 준비를 마쳤다. 다음날, 윗분들과 함께 상하이에서 2시간 이상 걸리는 무석이라는 곳에 도착해 고객 업체를 찾았다. 업체 문 앞에서 가방을 연 순간, 나는 공들여 준비했던 자료를 상하이 사무실 회의 탁자에 놓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행히 과장님이 따로 준비한 자료가 있어 상황이 무마되긴 했지만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마음, 그뿐이었다.

 “일을 처음 배울 때는 엄격한 사람에게 혼쭐이 나면서 배우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세영 씨가 이런 실수를 하는 건, 제가 세영 씨에게 부드럽게 대해 주니까 신경을 덜 써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꾸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떻게 세영 씨를 믿고 일하겠어요?”

 부드러운 질책은 차라리 매를 맞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 느껴질 정도로 아팠다. 그때의 아찔함을 교훈 삼아 나는 2005년의 목표를 ‘마음과 주변을 정리하자!’로 정했다.

 보람을 느꼈던 일도 있었다. 앞의 무석이란 지역의 한 업체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스피커를 제조하는 업체인데,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여온 샘플 스피커를 공장에서 생산하기 위해 무석의 공장으로 보냈는데 통관이 되지 않아 한 달이 넘도록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외국계 큰 물류업체에서도 거의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업체에서도 거의 포기를 한 상태였다. 나와 상사인 과장님은 필요한 서류와 화물 사진을 받고, 자료 조사에 들어갔다. 과장님은 공교롭게도 그와 유사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다. 마침내 필요한 서류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던 우리는 그것을 고객에게 제공했고 며칠이 지나 화물 통관이 끝났다는 반가운 소식이 왔다. 업체로부터 고맙다는 메일이 도착했을 때 나의 기분 또한 날아갈 듯했다.

또 한 번은 소주의 한 전자업체에서 급한 부탁 전화가 왔다. 부자재가 급히 필요한데 그날까지 배송이 안 되면 공장의 라인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소주에 있던 나는 소주의 해관으로 달려가 통관 담당자를 만나 통관, 세금 지불, 보세창고 화물 찾기까지 함께 했다. 결국 다음날 저녁에나 배송 가능하던 그 화물을 당일 오후 5시 업체의 공장으로 들여보낼 수 있었다. 고마워하던 고객의 모습에서 보람을, 그리고 몸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다.

 2005년 1월1일 나는 베이징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을유년 첫날, 중국 비즈니스 전문가 양성 과정을 함께 했던 연수생 출신 중국 주재원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약 1년 전 우리가 상상했던 그 모습 그대로 베이징, 텐진, 상하이, 동관, 칭타오, 선전, 홍콩 등 중국의 각 지역에서 이 모임을 위해 베이징으로 모여 들었다. 식사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하지 못한 지난 반 년 동안,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났던 6개월 동안의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었다. 우리는 서로의 고충을 들어주고 위로하며 우리의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다. 헤어지며 우리는 중국 전문가라는 꿈이 생각처럼 쉽지 않지만 끝까지 버텨 마침내 해내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1년 후, 다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각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사회생활 5개월 만에 얻은 교훈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첫 번째 깨달음은 돈을 버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다른 나라에서 돈을 번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어려울땐 취업 전 상황 되새겨

 꿈을 실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다른 나라에서 꿈을 실현한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중국이 무작정 좋아서 별다른 고민 없이 시작한 주재원 생활이지만 낯선 땅에서 신입사원으로 일한다는 건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든다.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문화와 마인드가 다른 중국 직원들을 새파란 신입사원인 내가 관리하는 일이 때론 버겁게 느껴진다. 이해하기 힘든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다른 친구들처럼 모여 수다를 떨거나 영화를 보러 가는 즐거움을 누리지도 못하는 스트레스도 있다. 가족과 떨어져 매일 저녁 수신자 부담으로 집으로 전화를 거는 어리광 많은 막내딸이기도 한 나이다.

 그럴 때면 내가 얼마나 이곳에 오고 싶었고, 지금의 이 일을 하고 싶어 했던가를 생각한다. 중국의 정세, 중국의 환경, 중국의 날씨, 중국인의 특성 등. 무엇보다도 일을 해 돈을 벌면서 몸으로 부딪히며 알아간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가 꿈꾸던 일이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을 하고 나면 한순간이나마 나약하고 감상적이었던 마음엔 전투의지가 타오른다.

 한국의 어려운 경제 사정과 달리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중국에서의 사회생활은 중국과 함께 발전하는 나의 청사진을 그릴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내가 종사하고 있는 물류업은 중국의 10대 발전 지향 업종으로 선정됐다. WTO 가입 이후 다양한 업종이 개방되고 있는 지금, 아직은 자국 업체의 보호를 위해 폐쇄적인 물류 사업에, 탄탄한 기반을 잡고 정진한다면 기업과 나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 밖에도 가장 기본이 되는 중국어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다는 점, 저렴한 비용으로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점, 주재원 수당, 독립적인 생활 등의 이점이 있다.

 하지만 주재원 생활이 언제나 자유롭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주재원이란 한 기업의 외국 지사를 대표하는 직원이기 때문에 언제나 무거운 책임감이 함께한다. 그리고 함께 일하는 중국 직원을 신입사원의 신분으로 관리한다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생긴 모습은 비슷하지만 한국인과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그들을 인정하고 함께 업무를 하다 보면, 이해가 가지 않아 답답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다. 중국에서 성공하는 비결 중 한 가지로 ‘중국 현지인의 관리’가 꼽힐 정도로 현지 인력 관리는 쉽지 않다. 또한 타지에서 가족과 떨어져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결정하고 처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가끔은 외롭기도 하고, 한국이나 집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내 또래 친구들이 누리는 문화생활이나 만남이 그립기도 하다. 그 밖에도 업무 지시를 내리거나 업체 실무자와 상담을 할 때에도 중국어로 진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에 한 치의 실수 없이 나의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대외 업무가 많다 보니 고객 업체의 총경리를 만나는 경우가 잦다. 그분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 년, 또는 10여 년 넘게 중국에서 쌓은 그분들의 연륜 배인 교훈을 배운다. 그분들이 하는 공통적인 조언 한 가지는 ‘중국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중국을 사랑해야 중국, 중국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중국에서 1년을 보내면 ‘중국을 조금 알겠다’고 하고, 2년이 지나면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 헷갈린다’고 하고, 3년이 지나면 ‘중국을 전혀 모르겠다’고 하고, 5년이 지나면 ‘이제 중국을 조금 알겠다’고 말한다.”

 아직 나는 중국을 조금 알 처지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들 말씀대로라면 5년 후엔 ‘중국을 조금 알겠다’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의 나를 그리면서 오늘도 나는 서류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 없는 5층 아파트 계단을 뛰어 회사로 향한다.



 인터뷰



 최병기 한국산업인력공단 해외취업지원부장



 “더 많은 일자리 확보 위해 해외 취업자 사후관리 절실”



 2004년 한 해, 한국산업인력공단 해외취업지원부는 1566명에게 국비를 지원, 해외 취업 연수 과정을 수료케 했고, 1268명의 인턴사원을 선발, 해외로 보냈다. 또 5000명에게 해외 취업을 알선, 571명이 해외 취업에 성공했다. 2005년, 청년 실업률이 8%를 위협하는 현실은 한국산업인력공단의 2005년 해외 취업 지원 사업에 더욱 눈길이 쏠리게 한다.

 해외 취업 지원 사업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가?

 “크게 3개 부분으로 나뉜다. ‘해외 취업 연수 프로그램’, ‘해외 인턴’, ‘해외 취업 알선’이 그것이다. ‘해외 취업 연수 프로그램’은 대학 졸업자 중 미취업자를 대상으로 해외 취업에 관심이 있는 이들을 모아 어학과 전문 업무 능력을 기르게 한다. ‘해외 인턴’은 대학 졸업 예정자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프로그램으로, 기본적으로 어학과 업무 능력을 갖춘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인턴 기간이 끝난 후 서로 의견이 맞으면 채용을 하거나 입사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마지막으로 ‘해외 취업 알선’은 이미 능력과 경험을 가진 분들을 적당한 회사와 연결시켜 주는 일이다. 이 세 가지가 주요 사업이다.”

 교육과 해외 기업 알선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해외 취업이나 교육에 노하우가 있는 기관의 도움을 받고 있다. 교육 프로그램과 취업 계획서를 제출하면 일정 심사를 걸쳐 위탁 기관으로 선정을 한다. 우리는 정부(노동부)의 실무를 대행, 중간에서 알선하는 역할을 한다. 외국의 고용 박람회 등에 나가 한국의 고급 인력이 있음을 알리고, 세계적인 영업망을 가진 취업 알선 회사를 통해 일자리 수요를 만들기도 한다.”

한국 인력에 대한 해외 기업의 인식과 수요는 어느 정도인가?

 “과거 60~70년대, 80년대의 광부, 간호사, 단순 노무자 등이 해외 취업을 하던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기본적으로 어학과 전문 업무 능력을 가진 이들을 구한다. 한국의 경제적 수준이 올라간 만큼 취업 희망자들의 눈높이도 매우 높아졌다. 현재는 IT 전문가, 간호사, 항공 승무원, 중국 비즈니스 전문가에 대한 수요가 많다.”

 현재까지 연수·인턴 프로그램을 통해 취업한 해외 취업자는 얼마나 되는가?

 “2004년 말까지 연수를 마친 사람 중 41%가 취업을 했다. 그러나 보통 연수 과정을 수료하고 취업까지는 6개월에서 1년 정도가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취업률은 이보다 훨씬 높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2005년 사업 계획과 전망은?

 “상반기 중에 2004년만큼의 성과를 낼 계획이다. 올 3월 1차 해외 인턴 모집을 목표로 사업을 진행 중이다. 현재 정부나 입법부에서도 청년 실업 해소에 뜻을 모으고 있는 상황이라 보다 많은 해외 일자리 창출을 위해 해외 순회 설명회도 확대하려 한다.”

 해외 취업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취업에 나서는 젊은이들의 적극적인 자세와 언어 능력, 그리고 전문 지식이나 업무 능력이 필수다. 취업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취업하기 힘든 상황이다.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실력을 길러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현재 해외 취업에 나간 해외 취업생에 대한 사후 관리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이들이 성공적으로 업무 활동을 하고, 회사에서 인정받아야 한국 인력에 대한 수요가 계속 있을 것 아닌가. 새로운 해외 일자리 창출과 함께 이미 한국인을 받아들인 업체가 계속 한국인을 고용할 수 있도록 해외 취업생을 현지에서 관리하고 도와줄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