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무·회계 파트 임원의 지위가 격상되거나 그 분야의 임원들이 회사의 대표이사에 오르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 같은 이유는 미국의 엔론사태, 한국의 외환위기 등으로 인해 기업 회계 기준이 크게 강화됐으며, 기업경영전산화 시스템의 도입으로 비용 발생 단계부터 자금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기업의 재무담당 임원은 총수의 오른팔 역할을 해왔습니다. 특히 기업 혹은 총수의 돈줄을 관리하는 ‘금고지기’역할이 대표적인 예로 총수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이 재무담당 임원으로 선출됐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단지 총수의 ‘예스맨’이 아닌 기업회계 분야의 전문성과 경영 전반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인물들이 재무파트에 포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임우돈 한국CFO협회 사무총장은 최근의 변화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AFP(미국재무인협회)의 정의에 따르면 CFO란 ‘재무 분야와 통제 분야를 총괄해 담당하는 최고임원’을 뜻한다. 이중 재무 분야(Treasurership)에는 기업금융, 자금 조달과 운용, IR, 투자 및 위험관리가 포함되고, 통제 분야(Controllership)에는 회계, 성과평가, 예산 및 사업계획수립, 경영정보 시스템(MIS) 구축 및 내부통제로 정의한다. 기존 한국 기업의 재무담당 임원이 자금 조달과 회계 등 기업 활동의 일부분에 참여하는 것에 그쳤다면 최근 각광받는 CFO의 개념은 이 모든 것을 총괄하는 것이다.

CFO의 권한이 점점 강화되고 있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임 사무총장은 CFO의 지위가 급상승하게 된 계기를 미국의 ‘엔론사태’에서 찾고 있다.

“사베인-옥슬리법 이후 모든 기업의 공시자료에 CEO의 사인과 함께 CFO의 사인도 꼭 포함돼야 하게 됐습니다. 분식회계 발생 시 CEO와 더불어 CFO에게도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지요.”

사베인-옥슬리법은 2001년 발생한 엔론사태 이후 미국 기업의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법안이다. 당시 미국 기업순위 7위였던 엔론은 하버드 출신 CEO 제프리 스킬링이 미국 5대 회계법인인 아서앤더슨과 공모해 보유자산은 불리고 빚은 줄이는 분식회계로 투자자에게 600억달러의 손해를 안겨줬다. 이 같은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투자자 보호를 위해 감사인의 독립성이 강화되고 기업공시제도의 개선을 골자로 하는 ‘사베인-옥슬리법’이 제정됐다. 

“IMF 이전의 한국 기업에도 이런 사례가 많았습니다. 제가 알던 한 기업의 예를 들어보면 당시 회계 부정이 터지자 5층의 영업담당 임원과 7층의 회계담당 임원이 서로를 비난했죠. 영업담당 임원은 ‘우리는 정확히 영수증을 회계파트에 올렸다’고, 회계담담 임원은 ‘우리는 비용을 정확히 처리해 장부에 올렸다’고 말이죠. 그래서 CFO가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예 비용 발생 당시부터 회계 처리까지 아우르는 재무담당 임원, 즉 CFO를 두자고 말이죠.”

현재 한국의 기업회계와 관련한 법률의 뼈대는 이 같은 사베인-옥슬리법의 요소를 많이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를테면 기업공시자료에 대표이사와 더불어 신고업무담당 이사(CFO)의 서명을 꼭 넣는 것이 그 예다.

주식회사의 특성상 책임이 늘어나면 권한도 늘어난다. CFO는 문제 발생 시 CEO와 동등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비용 발생 시점은 물론 전략의 수립단계에서부터 경영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권한도 가질 수 있게  됐다. 오너의 결정에 반대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CFO에게 주어진 것이다.

글로벌 환경에서 CFO가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가 엔론사태 이후라면 한국에선 ‘외환위기’이후다. 이재술 딜로이트컨설팅 대표는 그 이유를 ‘리스크 관리’와 ‘경영정보  시스템’에 주목했다.

“외환위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기업들은 확장 위주의 경영을 해오면서 기획파트와 영업통이 우대받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환란 이후 유동성 위기에 빠진 기업들이 재무와 회계 금융 부문의 중요성을 절감하면서 CFO 출신들을 잇달아 경영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죠.”

더불어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의 빗장이 풀린 것도 M&A 전문가들인 CFO의 역할 증대의 한 축이다. 그룹 오너의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CFO의 주가가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SK는 사모펀드인 소버린과의 경영권 쟁탈전에 휘말리면서부터 재무파트를 부쩍 강화하고 있다. 김중혁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자본시장의 힘이 부쩍 커지면서 CEO가 환율 변동이나 M&A, 회계 등 전반적인 재무활동을 모르고서는 경영하기 어려워졌다”며 “삼성, LG, SK, KTF, KT&G 등 기업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재무구조가 비교적 투명하고 재무파트의 권한도 강한 것이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경영정보 시스템(MIS : Management Information System), 전사적자원관리 시스템(ERP : Enterprise Resource Planning) 등 기업경영 전산화 시스템 등도 CFO의 위상 증대에 큰 역할을 한다.

“기업경영 시스템이 전산화하면 현금의 흐름을 앉은 자리에서 곧바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제품이 소비자에게 팔리는 즉시 CFO가 컴퓨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예전의 재무담당자가 모든 일을 마치고 그저 보고 받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의 CFO는 전략 수립 단계에서부터 바로 참여할 수 있는 ‘속도’와 ‘정보’라는 무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이재술 딜로이트컨설팅 대표)

진정한 CFO 전성시대 이루려면

“2010년부터 모든 상장회사들은 국제회계기준에 따라 해외법인을 포함한 연결재무제표를 작성해야 합니다. 또 금융상품과 부동산 등 투자자산 가치를 시가로 공시해야 합니다. IMF사태로 회계기준안이 도입된 이후 기업회계 분야의 두 번째 혁신이 일어날 예정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업의 자금을 관리하는 데 전문성을 가진 CFO의 역할은 더 강화되겠죠.”

권성수 한국회계기준원 조사연구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2006년 11월 한국회계기준원은 '국제회계기준 전면수용 로드맵(안)' 공청회에서 국제회계기준 도입안을 공개했다. 로드맵에 따르면 모든 상장사는 2010년부터 종속회사와 해외법인을 포함한 연결기준으로 재무제표를 작성해야 한다. 현재는 해외사업장 등을 제외한 개별 재무제표를 주로 쓰고 있다.

또한 사업보고서와 분·반기보고서 등 비재무에 관한 사항도 모두 연결기준으로 공시해야 한다. 2010년부터 자산 규모 2조원 이상인 상장사들은 재무제표를 작성할 때 연결재무제표를 작성해야 하며 자산 2조원 미만인 상장사들은 2012년부터 의무화 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기업들은 “대의에는 긍정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당연히 도입돼야 한다”면서도 “문제는 이 같이 까다로운 회계기준에 부응할 수 있는 전문성 있는 CFO 인력이 부족하다”는 반응이다.

최근 들어 전문적인 CEO만큼이나 ‘능력 있는 CFO 찾기’에 대한 기업들의 수요가 늘고 있다. 이를 방증이나 하듯 CEO 시장에 이어 CFO 시장도 형성돼 적임자를 선별해 기업에 소개하는 헤드헌터업체들도 우후죽순 늘고 있다.

하지만 헤드헌팅업체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인재가 없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전통적인 재무능력을 갖춘 CFO면 비즈니스마인드와 전략적 사고가 부족하고, 비즈니스마인드와 전략적 사고가 있으면 재무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CFO 전성시대’를 열기 위해선 이 두 가지 모두를 갖춘 CFO들이 늘어나야 한다.

다른 문제는 지금의 CFO들이 ‘수동적’이라는 반응이다. 한 관계자는 “기존의 2인자 자리에 머문 기간이 길어서 그런지 아직 오너의 눈치를 살피는 CFO들이 많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관계자는 “CFO 출신들은 경영활동의 리스크를 지나치게 회피하려는 측면이 있다”며 “지나치게 방어적인 경영은 투자 기회를 놓칠 수 있는 부작용도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분야에서 오래 일한 임직원들이 최근의 ‘CFO 부흥’에 대한 거부감도 적지 않아 기업마다 미묘한 대립 기류가 생기고 있다는 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