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실학자들의 경제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 하나가 토지개혁 문제를 중심으로 경제사상을 펼친 ‘중농주의 학파’라면, 다른 하나는 상공업 발전 전략을 중심으로 경제사상을 전개한 ‘중상주의 학파’다. 중농주의 학파의 경제사상가로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을 들 수 있고, 중상주의 학파의 경제사상가로는 유수원, 박지원, 박제가를 꼽을 수 있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정약용이 중농주의를 대표하는 경제사상가라고 한다면, 박제가는 중상주의를 대표하는 경제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중농주의 학파와 중상주의 학파의 경제이론은 이 두 사람에 이르러 매우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됐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지은 <경세유표>와 박제가의 저서 <북학의>가 바로 그것이다.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좋다면

  오랑캐라도 스승으로 섬기고 배워야 한다”

조선의 경제발전과 부국(富國) 전략을 상공업 발전과 상업적 농업 경영에서 찾은 중상주의  경제사상가들은 대부분 북학파 계열의 실학자다. ‘북학(北學)’이라는 개념은 박제가가 최초로 사용한 이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실학자 그룹을 부르는 고유명사가 됐다. 이들은 매우 뚜렷한 목표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당시 지배 계층인 성리학자들이 오랑캐라고 배척한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 및 경제 시스템의 선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하고 부강(富强)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북학파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박지원은 이를 두고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좋다면 오랑캐라도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기고 배워야 한다”고 표현했다.

박제가의 삶과 학문적 궤적을 추적하다보면, 그의 경제사상의 큰 물줄기가 젊은 시절부터  이들 북학파 그룹과 교유해 얻은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가 18세 때 자신보다 13살이나 연상인 박지원을 처음 찾아가 밤을 새며 담화를 나눈 감회를 기록한 ‘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라는 글을 보면, 이 그룹의 학자들이 백탑(지금의 종로2가 탑골공원) 근처에 모여 살면서 매일같이 만나 문장을 지어 돌려 읽고 또 학문과 사회 현실을 토론한 모습이 잘 묘사돼 있다. 이들은 서로 만날 때마다 항상 며칠씩 함께 숙박하면서 과거 역사와 국가의 흥망사에서부터 농공(農工)의 이익과 폐단, 산업과 경제, 산천과 국방, 천문과 관상, 음악, 육서와 산수는 물론 심지어 초목과 새, 짐승에 이르기까지 함께 공부하고 토론했다.

이처럼 이 그룹의 학자들과 더불어 폭넓은 분야를 다루고 수많은 서적을 읽고 토론하면서 박제가는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나라의 실제적인 힘을 기르기 위한 경세지학(經世之學)의 줄기를 이루어갔다. 

당시 이 그룹의 모임에는 1737년생인 박지원을 좌장(座長)으로 1741년생인 이덕무, 1749년생인 유득공, 1750년생인 박제가, 1754년생인 이서구 등이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대부분 오늘날까지 18세기 문예부흥과 실학운동을 대표할만한 대학자로 거론되고 있는 인물이다. 특히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은 훗날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고 서얼 출신의 뛰어난 학자들을 검서관으로 등용할 때 수위(首位)로 발탁되기도 했다. 이것은 이 그룹의 출중한 학문과 식견을 증명해 보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관의  대혁명을  가져온  청나라  여행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 그룹과의 교류를 통해 얻은 경세지학이 박제가에게 사상의 큰 물줄기 역할을 했다면, 청나라 여행은 그의 세계관에 거대한 폭풍을 몰고 왔다고 할 수 있다.

1778년(정조 2년) 3월, 박제가는 29살의 나이에 이덕무와 함께 채제공을 수행해 청나라 사신 길에 나섰다. 당시 박제가와 이덕무의 청나라 행은 홍대용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평소 박지원을 둘러싸고 있는 젊은 학자 특히 서얼 출신 학자들의 탁월한 능력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홍대용은 넓은 세상을 보고 견문을 넓힐 기회를 주려는 목적으로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이때를 시작으로 박제가는 1801년까지 모두 4차례 청나라를 방문했다).

그런데 처음 청나라에 들어선 박제가는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다. 훗날 <북학의>을 저술하면서 그는 당시 청나라에서 받은 충격을 이렇게 밝혔다.

“수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평소에 듣지 못한 기이한 사실들을 새롭게 들었고, 중국의 옛 풍속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옛 사람이 나를 속이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박제가는 청나라의 발달한 문화와 물질적 풍요를 보고 조선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는 길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청나라를 배우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가난과 검소함’은 자랑할만한 일이 아니라 백성과 나라를 해치는 큰 적이라는 사실을 깨우쳤다. 그래서 조선으로 돌아가면 추진해 볼 목적으로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할 만한 풍속이나 문물, 제도를 발견하는 대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자세하게 기록해두었다. 이 기록들은 훗날 <북학의>를 저술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됐다. 

청나라에서 세계관의 거대한 폭풍을 경험한 박제가는 조선으로 돌아온 후,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청나라가 미개한 오랑캐에 불과하다는 믿음은 허구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박제가가 청나라의 발달한 문화와 물질적 풍요에 대해 얘기해도 사람들은 ‘오랑캐’라는 단 한 글자로 묵살해버릴 뿐이었다. 심지어 박제가를 나무라고 비방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그가 청나라에서 돌아오면서 야심 차게 구상한 청나라를 배워 조선의 백성을 이롭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체제개혁 및 부국강병 전략은 ‘청나라는 오랑캐’라는 거대한 이념(?)의 장벽에 막혀 도대체 먹혀들지 않았다. 아니 사람들은 그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온 사실을 말해도, 오랑캐를 미화한다거나 지나치게 과장한다고 비난했다. 그것은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오로지 성리학의 가르침에 갇혀 산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편협함과 고루함이 낳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박제가의 학문적 동지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박지원은 훗날 <북학의>에 남긴 자신의 글에서 이렇듯 실정에 어두우면서도 세상의 모든 정보와 이치를 아는 양 거만을 떠는 지식인들의 허상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우리 조선의 선비들은 세상 한 모퉁이 구석진 땅에서 편협한 기풍을 지닌 채 살고 있다. 발로는 청나라 땅을 단 한 차례도 밟아보지 못했고, 눈으로는 청나라 사람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조선 땅을 벗어나 본 적도 없다. 긴 다리의 학과 검은 깃털을 가진 까마귀가 제각각 자신이 타고난 직분을 지키며 사는 꼴이고, 우물 안 개구리와 작은 나뭇가지 위의 뱁새가 자신이 사는 곳이 최고라고 자랑하며 사는 꼴이다.”

<북학의> ‘박지원의 서문’ 중에서

이러한 답답한 현실 앞에서 박제가는 자신의 주장을 적극 변호하고, 청나라에서 직접 보고 온 사실을 널리 알리는 한편, 조선이 ‘가난과 무지’로부터 벗어나 부유하고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사상과 경제발전 전략을 취해야 하는 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저술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책이 바로 북학파의 바이블이자 중상주의 경제사상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책, <북학의(北學議)>다.      

중상주의의  바이블,  <북학의>

보통 박지원과 박제가를 일러 북학파의 양대 산맥이라고 하는데, 박지원이 이 그룹을 이끄는 리더였다면 박제가는 브레인 혹은 싱크탱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박제가가 북학파의 학문 및 사상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박제가의 경제사상은 자신의 문집(文集)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북학의>에 집약돼 있다.

박제가는 청나라에서 돌아온 지 3개월 만인 1778년 9월 <북학의>를 1차 완성한 다음, 저자 서문까지 써 놓았다. 자신의 생각을 하루라도 빨리 세상에 알려 백성의 ‘가난’과 나라의 ‘쇠퇴‘와 지식인의 ‘무지’를 벗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1차로 <북학의>를 세상에 내놓은 다음에도 박제가는 수년 동안 내용을 수정·보완하는 작업을 했고, 마침내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의 체계를 갖추어 완성했다. 그리고 십수 년이 지난 1798년(정조 22년)에 정조에게  <북학의>의 핵심 내용을 간추리고 새롭게 보완하여 ‘진소본 북학의’를 올렸다. 이렇게 해서 현재 전해오는 <북학의>는 ‘내편’과 ‘외편’ 그리고 ‘진소본’의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서 박제가는 발상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자못 충격적인 방식으로 ‘북학(北學)’ 즉 청나라의 선진 문물과 제도 그리고 경제정책과 시스템을 배워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먼저 박제가는 올바른 윤리와 도덕이 선 다음에야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질 수 있다는 주류 성리학의 정통 학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백성들의 삶과 생활이 부유해야 비로소 올바른 사회 윤리와 도덕을 세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라 정책의 최우선 과제를 ‘민생과 경제발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박제가의 생각이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청나라를 미개한 오랑캐라고 취급하는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청나라는 매우 발달한 문물과 제도를 갖춘 ‘선진국’이고 조선은 한참 뒤떨어져 있는 ‘후진국’이라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그는 냉철하게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단지 ‘오랑캐’라는 한 마디 말과 허울뿐인 ‘소중화’ 의식에 사로잡혀 청나라를 배척하려고만 한다면, 나라의 후진성과 백성의 가난을 구제할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절절하고 피 끓는 자신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밝혀 놓았다. 

“오늘날 백성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곤궁해지고, 나라의 살림살이는 날이 갈수록 고갈되고 있다. 현실이 이러한데도 사대부라는 사람들이 팔짱만 낀 채 바라보고 있을 뿐,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과거의 인습과 풍속에 갇힌 채 편안한 생활을 누리면서 현실을 외면만 할 것인가?”    <북학의> ‘자서(自序)’ 중에서

이처럼 박제가에게 ‘북학’은 나라와 백성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그렇지 못할 것인가를 가늠하는 절박한 문제였다. 따라서 <북학의>에 드러나 있는 박제가의 경제사상은 모두 나라와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과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사상 ①  중상론 : “가난하면  상업에  종사하라”

<북학의>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나타난 박제가의 경제사상 및 경제발전 전략은, 크게 상업을 중시하라는 ‘중상론(重商論)’, 소비를 중시하라는 ‘소비론(消費論)’, 문호를 개방하라는 ‘통상론(通商論)’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박제가는 백성들이 가난을 모면하고 나라가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상업을 중시하는 경제적 마인드’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가난하면 상업에 종사하라”는 것이다. 그는 “중국 사람은 가난하면 장사를 한다. 비록 장사를 하고 먹고살아도 사람만 현명하다면 훌륭하게 대접받고 살 수 있다. 사대부라고 할지라도 거리낌 없이 시장을 출입하고 물건을 거래한다”고 당시 청나라의 풍속을 소개한다.

반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장터에 나가 물품을 사고팔거나 혹은 기술을 갖추어 먹고사는 일을 아주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그는 이러한 경제적 마인드의 차이가 청나라는 풍요롭고, 조선은 가난한 근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또한 박제가는 조선이 상업을 중시하는 경제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는 개국 초기부터 나라 경제의 근간을 이루어 온 ‘농본상말(農本商末)’과 노비를 제외한 백성 가운데 상인을 가장 하류로 취급한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양반 사대부의 생활방식과 사고체계를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박제가는 당시의 시각에서 볼 때는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는 ‘양반 상인론’을 제기했다. 그는 밥을 빌어먹을망정 농사나 장사에 종사하는 것을 부끄러운 짓이라고 여기며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양반 사대부들을 두고 장터의 장사꾼보다 못한 존재라고 비판하면서, 차라리 중국인들처럼 떳떳하게 장사에 나서라고 했다. 그것은 신분과 체면 때문에 사대부라는 허울에 갇힌 채 살기보다는 자신과 나라의 부강을 위해 경제활동에 나서라는 뼈아픈 주문이었다. 

경제사상 ② 생산과  소비론 :  “소비가  일어나야   생산이  발전한다

박제가는 상업의 발달 못지않게 공업 곧 물품을 생산하는 활동을 중시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그는 매우 독특한 경제발전 전략을 내놓는다. 그는 활발한 생산 활동이 풍요로운 소비를 일으킨다는 생산 → 소비의 경제 순환 시스템보다는 적극적인 소비만이 활력 넘치는 생산 활동을 불러온다는 소비 → 생산의 경제 순환 시스템 이론을 내놓았다.

또한 ‘양반도 상업을 하라’는 양반 상인론 못지않은 파격적인 주장을 했는데, 그것은 ‘근검절약이 미덕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이라는 것이다. 박제가는 농업을 근간으로 한 조선사회가 미덕으로 여겨온 근검절약보다는 소비를 장려해 생산을 촉진하고 상업을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선은 검소함 때문에 반드시 쇠퇴할 것이라고 하면서, 소비는 물품의 생산과 재생산을 자극하고 유통을 활성화시켜 나라와 백성을 부유하게 만든다고 했다.

특히 박제가는 재물을 우물에 비유해, 퍼내면 퍼낼수록 가득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말라버리는 것이 재물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화려한 비단옷을 입지 않는 나라에는 비단을 짜는 사람이 없어 직조 기술이 나날이 쇠퇴하고, 튼튼하고 수려한 물건을 만드는 일을 높여 칭찬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장인(匠人)과 기술자의 솜씨가 형편없어 날로 기술이 도태된다고 주장했다. 소비가 없으면 생산도 없고, 생산한 물품이 없으면 상업도 발달할 수 없어서 나라와 백성은 가난과 곤궁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반면 소비를 촉진하면 생산 역시 활기를 띠고 상업은 나날이 발전해 나라와 백성은 풍요로워진다는 얘기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경제적 사고는 근대 자본주의의 발생 이후에 보편화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박제가는 시대를 앞서 다가올 미래 사회의 흐름을 읽는 통찰력을 보여준 셈이다.      

경제사상 ③ 통상론 : “외국과 통상해야  부국이  될 수 있다”  

조선이 직면하게 될 미래 사회의 흐름을 읽는 박제가의 통찰력은 ‘해외 통상론’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박제가는 자원이 부족하고 백성이 가난한 조선은 “전답을 경작하고, 현명한 인재를 기용하며, 상인들에게 장사를 허용하고, 장인들에게는 일정한 혜택”을 주는 등 나라 안에서 이용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경제발전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나라와 백성이 풍요롭고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 나라에서 생산되는 물품과 조선에서 만든 생산품을 거래하는 해외 통상(通商)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외국과 통상하지 않아 생겨난 조선사회의 폐단을 이렇게 분석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조선이 개국한 이래로 거의 4백 년이 지났는데 여태껏 다른 나라와는 배 한 척 왕래한 적이 없다. 이에 어린아이가 낯선 사람을 보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입을 삐죽거리며 울음을 터뜨린다. 원래 본성이 그래서가 아니라 세상에 관해 보고들은 것이 적다보니 의심이 많아서 생겨난 일에 불과하다. 이렇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쉽게 두려워하고 의심을 잘한다. 풍속과 기상이 우둔하고, 재주와 식견이 확 트이지 못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오로지 다른 나라와의 통상이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풍속이다.”

<북학의> ‘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 중에서

다른 나라와 통상하지 않아 백성들은 매우 폐쇄적인 성향을 갖게 됐고, 견문과 지식은 물론 상업 활동과 물품 제조 기술이 더욱 쇠퇴하게 됐다는 얘기다.

그럼 해외 통상을 통해 얻게 되는 이익은 무엇일까? 박제가는 다른 나라와 통상해 얻는 이득은 비단 경제적 부유함에 그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해외 통상이 새로운 문명에 대한 개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가 가지 않아도 그들이 스스로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의 기술과 문물을 배우고 풍속을 물어 나라 사람들이 견문을 넓히고 세상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또한 우물 안 개구리로 사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일은 세상을 개화하기 위한 밑바탕이 될 것이므로,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얻는 경제적 이익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북학의> ‘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 중에서

만약 일찍이 문호를 개방하고 해외 통상을 추진했을 때 얻는 이로움을 간파한 박제가의 통찰력이 받아들여졌다면, 조선은 일본보다 몇 십 년을 앞서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우리나라는 20세기를 식민의 역사가 아닌 전혀 새로운 역사로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제사상의 계승자들 : 박규수와 통상개화파

그러나 정조의 죽음으로 시작한 조선의 19세기는 박제가가 꿈꾼 개혁과 부국강병의 모든 가능성을 빼앗아 가버렸다. 서인(노론) 세력의 반발과 저항 속에서도 개혁정치를 편 정조가 1800년, 49세의 젊은 나이에 너무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았다. 자신과 같은 서얼 출신 등을 중용해 정치적·학문적으로 후원해준 정조의 죽음은 곧 박제가에게는 비극의 시작을 의미했다.

다시 권력을 장악한 노론 벽파 세력은 정조의 총애를 받던 개혁 관료들을 하나 둘씩 조정에서 제거해나갔다. 박제가 또한 사돈인 윤가기의 ‘동남 성문 밖 흉서 사건’에 연루됐다는 죄를 뒤집어 쓴 채 결국 유배형에 처해졌다. 4년이 지난 1805년 죄인의 신분에서 풀려났지만, 개혁과 부국강병에 대한 불타는 열정은 이미 물거품이 돼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이때 죽음을 눈앞에 둔 그가 남긴 한 편의 시는 수십 년 후에 닥칠 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예견한 듯하다.

“선왕(정조)의 뜻은 낡은 제도를 개혁하여

새롭게 하는 데 있었네.

악의 뿌리를 씻어내고 나라의 기강을 회복하고자 하셨네.

선왕의 향기가 중도에서 끊겨 버렸으니

수척하고 나약해진 나라의 운명을 누가 다시

일으켜 세울까.

나를 부르실 때마다 왕안석에 비유하셨는데

선왕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네.”

그런데 박제가와 그의 동료인 북학파 그룹이 꿈꾼 조선의 개혁과 부국강병이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19세기 후반 박제가와 북학파의 경제사상을 이어받은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가 서양의 근대 제도와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문호개방을 통해 조선의 자주적인 개화와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다.

특히 박규수는 쇄국정책을 버리고 천주교 박해를 중단하는 한편 서양에 문호를 개방할 것을 내세운 자신의 요청이 흥선대원군에게 번번이 거절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젊고 유능한 개혁 인재를 양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당시 박규수 문하에 모인 사람들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김윤식 등이다. 이들은 박규수로부터 북학파의 사상에서부터 중국에 대한 견문과 지식 그리고 서양의 근대 제도와 선진 문물은 물론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박규수에게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훗날 통상개화파의 핵심 인사가 됐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렇듯 박제가의 경제사상과 부국강병책은 박규수를 통해 통상개화파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고 이들 젊은 개혁 그룹은 전날 박제가와 북학파가 젊음을 불살랐던 열정 그대로 조선의 자주적인 개화와 근대화를 위해 자신들을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