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은(45) 메가스터디 사장. 그는 강남의 스타 강사에서 일약 코스닥 주식 갑부로 변신했다. 세상은 코스닥 시가총액 ‘톱10’에 진입한 메가스터디를 향해 ‘황금주’로 부른다. 그런 영광 뒤엔 아이 둘을 한꺼번에 잃은 아픔도 녹아 있다. 강남 일대를 주름잡던 ‘손 사탐’이 ‘손 웰치’로 변신하기까지 20년 교육 인생을 이금룡 대표가 들여다봤다.

지난 9월28일 오후 3시30분 서울 서초동 메가스터디 본사서 만난 두 사람은 초면이다. 이금룡 대표가 이니시스 사장(2003-2004년)일 때 메가스터디가 온라인 결제를 이니시스에 맡겼던 인연이 전부다. 손주은 사장을 만난 이금룡 대표는 주식 얘기부터 꺼냈다.

“오늘(9월28일) 메가스터디가 최고가를 경신했더군요. 이제 시가총액도 6000억원대가 넘었다면서요?”(이) “네. 주당 10만8200원으로 마감됐네요.”(손)

그러나 인터뷰 후인 지난 10월 20일 메가스터디는 주당 11만6000원으로 뛰었고 시가총액도 사상 최초로 7000억원을 돌파했다. 손 사장의 주식 평가액은 10월4일 기준 1760억원에 달한다. 회사는 코스닥 시가총액 순위 빅10에 진입했고 자신은 코스닥에서 다섯 번째 갑부가 됐다.

“사실 저는 주식엔 한 번도 손을 안 대봤지만, 최근 강의서 메가스터디를 사라고 추천한 적은 있습니다. 온라인은 물론 오프라인서도 메가스터디 강세가 예상됐기 때문이죠.”(이)

‘주식 무경험자’ 이 대표의 ‘메가스터디 추천’에 “하하.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한 그는 “내년엔 대입 입시학원시장서 온오프 통합 챔피언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 대표가 비결을 묻자 “인문학적인 깊은 고민의 결과”라는 이색적 답변이 나왔다. 자신이 강남 족집게 과외 선생에서 학원가 스타강사로, 다시 주목받는 코스닥 기업 오너로 변신에 성공하기까지 늘 장고(長考)를 통한 결단의 결과였다고 했다.

말투는 조근조근했지만 상대를 바라보며 말하는 눈매는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손 사장은 요즘 3개월 전부터 강의는 주말에만 한다. 경영에만 힘쓰겠다는 표시다. ‘깨끗한 장사꾼’이 되겠다는 게 모토다. 강사 시절 연수입 50억원 중 16억원을 세금으로 냈듯이.

얼마 전 4500억원에 회사를 팔라는 유혹도 거절했다는 무용담(?)도 들려줬다. 당시 고민이 많았던 듯 이때 그의 표정은 ‘아쉬움’이 배어나오기도 했다.

그는 “솔직히 유혹이 컸지만 장차 2000억원 재단을 만들어 인재를 키우는 일을 하는 꿈을 더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됐다”고 들려준다. 인터뷰 내내 ‘사업’이란 단어보다는 ‘인생’이라는 말을 더 많이 했던 손 사장은 “요즘 자리에만 앉아 있다보니 살도 많이 쪘다”고 웃었다.

요즘 교육업계는 물론 주식시장에서도 메가스터디가 화제더군요. 매출액이나 회원 수 등 실적도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나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2000년 7월 회사를 세웠으니까 이제 6년이 조금 지났네요. 회원 수가 현재 140만 명 정도 되는데요. 사실 상상을 못했던 겁니다. 처음에 회원 1만 명 돌파했을 때 엄청 행복해 했습니다. 그 당시엔 서울과 경기 학생밖엔 없었고요. 그때 사무실에 ‘지방 학생 1명은 서울 학생 1000명’이라는 문구도 걸어 놨을 정도였으니까요. 지금은 회원이 전국 인구 분포에 비례하고 있습니다(실제 매출액은 설립 첫해 5억원 남짓에서 2001년 42억원 → 2002년 203억원 → 2003년 459억원 → 2004년 502억원 → 2005년 710억원대로 급성장했다. 올해 상반기엔 450억원 매출액에 122억원 흑자를 냈다).

메가스터디가 이렇게 성장한 배경을 두고 한쪽에선 EBS 강의의 수능 출제 등 정부 정책이 한몫했다고 보는데요.

가장 큰 요인은 정보화 사회로의 가파른 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홈쇼핑이 빠른 속도로 확산된 것처럼 e-러닝도 함께 간 것이죠. 두 번째는 e-러닝 환경, 그러니까 2001년부터 광범위하게 깔렸던 ADSL 확산과 시의 적절하게 맞아떨어진 겁니다. 오히려 저희보다 먼저 시작한 회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사실 동영상에 대한 소비자 인식이 자주 끊어져 좋지 않았을 때였죠. 그리고 EBS가 무료 강의를 시작했죠. 처음 10개월 정도는 메가스터디에 큰 ‘위기’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온라인 교육의 보편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죠. 따지고 보면 정부 정책에 큰 덕을 입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하하)

온라인 교육시장엔 EBS도 있고 강남구청 인터넷방송 등 ‘무료’ 사이트가 많거든요. 소비자에게 ‘무료’는 엄청난 무기일 텐데, 그런데도 메가스터디가 잘 나가는 비결이랄까요.

콘텐츠 질에 있습니다. EBS는 사실 공급자 중심입니다. EBS가 기획해 놓은 강의에 강사가 끼워 맞추는 식이죠. 가령 ‘50분짜리 20개를 찍어라’ 하면 따를 수밖에 없죠. 극단적으로 말하면 ‘죽은 강의’입니다. 반면 저희는 강의실에서 생방송으로 일어나는 강의죠. 학생들 사이에선 ‘교재는 EBS, 강의는 메가스터디’라는 말로 표현하더군요. 그리고 무료를 말씀하셨는데, 사실 무료가 교육 상품에선 의미가 없습니다. 옷이나 게임과는 다른 시장입니다. 충동구매가 없다고 보면 됩니다. 철저하게 콘텐츠 질로 승부하는 시장입니다(이 때 손 사장은 초창기 겪었던 내부 논쟁을 마치 당시를 회고하듯 눈을 지긋이 감기도 하면서 들려줬다). 2000년 9월부터 동영상 서비스를 시작했거든요. 그때 대부분 강사나 경영진에서 나왔던 얘기가 ‘에듀테인먼트’로 가야 한다는 거였죠. 교육(에듀케이션)에 재미(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해야 한다는 겁니다. 가령 15분 강의 후 재밋거리를 삽입하는 식이죠. 그런데 저만 반대했습니다. 무슨 소리냐, 공부는 공부지, 재미가 아니라는 게 제 생각이었죠. 재미는 학업의 성취에서 오는 것이지,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넣어서 오는 게 아니란 거죠. 그랬더니 저보고 ‘컴맹 세대’라 무식해 그렇다고 몰아붙이더군요. 도저히 결론이 안 모아져서 제가 한마디 했죠. ‘주식 수로 (결론을) 내리자.’ 그 방법밖엔 수가 없었지요. 90분짜리 현장 강의를 그대로 가져가게 된 겁니다.

(그러자 이금룡 대표도 비슷한 경험담을 꺼내 놓았다. “제가 처음 옥션 사장에 취임했을 때 일입니다. 그때 옥션은 ‘중고’ 상품만 취급했습니다. 물론 모회사인 이베이도 그랬고요. 새 상품을 론칭하자고 했더니 난리더군요. 창업자 6명과 CEO인 제가 한강호텔서 한바탕 논란이 벌어졌죠. 결국 물컵을 던지기까지 하면서 ‘신상품을 하자’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삼보컴퓨터부터 판 것이죠. 그때 그 결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옥션은 없을 겁니다.”)

CEO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참 많죠. 트렌드를 읽는데 어떤 직관이나 영감 같은 게 있는 겁니까(이 물음에 손주은 사장은 지난 20년간 자신의 ‘인생’을 10여 분에 걸쳐 얘기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제게는 두 가지 차별성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의사결정을 내릴 때 인문학적인 고민을 한다는 점이죠. 요즘 너무 기능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제 인생 전체를 놓고 생각을 합니다. 다행히 저는 오랜 개신교 집안에서 자랐고 대학에서도 인문학(서울대 서양사학)을 전공했고요. 처음엔 1988~1989년 딱 2년만 (과외를) 하려고 했어요.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 유학은 포기하고 사법고시 준비에 들어갔죠. 그런데 1주일 만에 고시도 포기했죠. 도저히 앉아서 공부하는 것이 체질에 안 맞더라고요(하하). 그래서 좀 더 (강사를) 하고 있는데, 1991년 큰 불행이 닥쳤습니다. 교통사고로 자식 둘을 잃는 사고였지요.(그는 몇 달후 아내는 회복됐고 자식 2명을 새로 낳았다고 들려줬다.) 그때 나를 ‘구원’해준 게 강의였습니다. 일주일에 60시간씩 강의에 몰입했습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탈출구였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전 과목 강사였죠. 짧게 몇 년 안에 돈 벌겠다는 생각이었죠. 충격에서 깨어나 보니 1995~1996년께이더군요. 그때 제 나이가 서른여섯이었습니다. ‘인생이 40세 이후가 상당히 중요할 텐데….’ 1년간 참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2000년이면 제가 나이 마흔이더군요. 그래서 1996년 12월31일에 ‘2000년대 구상’을 위해 경기도 이천으로 무작정 떠났죠. 저는 그걸 ‘이천 구상’이라고 부르는데요. 어떻게 살아왔나 곰곰 생각해보니 이룬 건 없지만 돈은 많이 벌어 놨더군요. 당시 한 50억원 조금 넘었으니까요. 그래서 ‘사립고를 만들자’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깊이 고민해보니 그건 본질상 교육이 아니라 돈으로 ‘명예’를 사겠다는 거였습니다. 한때 목사를 꿈꿨던 내가 이렇게 타락했나 반성도 했고요. 결국 ‘강의를 계속하자’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뀐 게 있다면 그 당시까지는 강남 부자들을 위한 특수 계층에 한정된 강의만 했더라고요. 그래서 대중강사로 변신하자고 해서 학원에 들어간 거죠. 그리고 2000년, 제 나이 마흔 살 이후엔 기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2000년 7월에 메가스터디를 창업한 것이죠. ‘깨끗한 장사꾼’이 되자고 결심한 겁니다. 그때 제가 아주 독특한 생각을 했는데요. ‘Root 1997, 신화 창조의 원년’이라는 걸 만들어 왔죠. 1997년을 루트(뿌리)로 해서 기업을 할 때 4가지를 신조로 삼겠다는 겁니다. R은 합리적(Reasonable), O는 조직적(Organic)과 열린 마음(Open-minded), T는 함께(Together) 성공하겠다는 뜻이죠. (책상 위를 가리키면서) 저기에 ‘음애(陰崖)에 이온 풀을 다 살와 내여라’는 말이 보이시죠. 관동별곡에 나온 말로 저의 기업 철학입니다. ‘그늘진 벼랑에 시든 풀을 다 살려내고 싶다’는 뜻으로 결국 경세제민(經世濟民)을 뜻합니다. 이게 바로 경제입니다. 저는 CEO가 갖춰야 할 덕목 중에 (제가 살아온 것처럼) ‘인문학적 고민을 깊게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너무 기능적 판단만 많이 하거든요. 얼마 전엔 대기업 등에서 저보고 ‘먹튀’가 되라는 제안도 하더군요. 지분 2500억원에 경영권 프리미엄 2000억원을 얹어 4500억원을 주겠다는 겁니다. 강력한 유혹이었지만 뿌리쳤지요. 인생이 어차피 시한부인데, 누리면 얼마나 누리겠다고요. 그때 든 생각이 지주회사 체제로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두 번째는 제가 가르치는 사람이었기에 세상 변화에 잘 대처해 왔다고 봅니다.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사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다 나옵니다. 학생들은 단어를 외우지만 저는 그 행간의 의미를 보는 셈이죠. 사실 이 사업의 계기도 우연히 홈쇼핑을 보다 착안했습니다. 과거에 쇼핑은 백화점이든, 재래시장이든 소비자가 찾아갔지만 홈쇼핑은 반대로 상인이 집으로 찾아가는 서비스거든요. 저는 ‘혁명적 변화’라고 봅니다. 현상을 현상으로 보지 않고 제 나름대로 ‘본질’을 꿰뚫어 보려고 노력했다고 할까요. 교육도 학원이 찾아가는 서비스로 바꾼 게 e-러닝입니다.

궁금증이 생기는데요. 대성이나 종로학원은 수많은 강사진에 수십 년 전통이 있는데, 온라인 교육에 발 빠르게 대처했더라면 시장 판도가 달라졌을 텐데요.

두 가지라고 봅니다. 하나는 창업주나 CEO가 트렌드를 읽는 ‘눈’이 부족했다고 봅니다. 두 번째가 큰 이유일 텐데, 사업은 항상 본업이 중심입니다. 오프라인 학원이 ‘짱짱’한데 그것을 유지하는데 집중한 것이라고 봐요. 온라인에 매달리면 본업에 타격을 받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교도 마찬가지죠. 학습지에서만 8000억원 매출을 올리는데, 만약 온라인 학습지에 손을 대면 위험할 수도 있거든요. 현재 메가스터디는 초등학교 쪽으로 가도 분명히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습니다(시기를 묻자 그는 “시점은 정하지 않았다”고 말을 멈췄다).

시가총액 면에선 대교를 현재 넘어선 것 아닙니까. 오프라인 학원도 7개를 하고 있는데요. 시장 판도를 어떻게 보십니까.

온오프 교육이 공급자 입장에선 ‘대체재’ 관계이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보완재’ 성격이 강합니다. 바로 이 점이 메가스터디의 강점이고요. 메가스터디는 온라인 독점력이 워낙 강하고 대한민국 최고 브랜드 파워를 가진 강사들이 있기에 오프라인서도 통하는 것이죠. 실제 저희가 들어간 7개 지역(목동, 강남. 송파, 강북, 서초, 대치, 노량진)을 서서히 장악해가고 있습니다. 그 힘을 재수종합반시장에 쏟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 빅2 자리에 왔다고 보고 내년이면 시장 1위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특히 내년에 논술 위주로 입시 환경이 바뀌는데요. 현재 국내 주요 논술 강사에 대해 최근 독점을 완료했습니다.(그는 이 대목에서 “요즘 강사들 사이에서도 ‘메가에 들어오는 게 살길’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기 있다”면서 자신감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메가스터디가 교육업계의 ‘공룡’이 되면서 역작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참교육 보다는 시험을 잘 보는 테크닉 교육에 집중한다든지 아니면 날로 늘어나는 사교육비 문제가 대표적이죠.

일단 통계로 보면 사교육비는 분명 줄어듭니다. 국내 사교육시장은 사실 초등학교와 유아시장이 가장 큽니다. 대입 입시학원(오프라인)시장이 1조원이라면 온라인으로 대체했을 경우 3000억원으로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선 순기능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아직 저소득층 교육비 감면은 섣불리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창업 후 3년까지는 이익이 아닌 매출액 1%를 사회공헌에 써왔습니다. 상장 후에는 주주 이익 때문에 그만큼은 못하고 있지만서도요. 앞으로 노력할 부분입니다.

메가스터디가 ‘굿 컴퍼니’에서 ‘그레이트 컴퍼니’로 가려면 사회공헌 프로그램도 짜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도 개인적인 소망은 있습니다. 한국 사회가 잘 되려면 인재가 중요합니다. 아주 뛰어난 1명이 100만 명을 먹여 살리는 세상으로 점점 가고 있잖습니까. 처음에 대학도 생각해봤는데, 희망이 없는 것 같아요. 대학은 산업사회 모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2000억원 규모 재단’을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연 수익률 10%로 보면 200억원은 사람을 키우는 데 쓸 수 있지요. 대학원 이상 인재에 1인당 2억원씩, 100명은 지원이 가능하겠죠.

요즘 <굿바이 잭웰치>란 책도 나왔는데요. 손 사장님은 유난히 목숨을 건다, 몰입한다, 집중하라, 이런 말을 강조하는데요.

아주 성실한 사람은 ‘몰입’을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아주 모범적인 학생이 크게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지 않습니까. 적당한 게으름도 필요한 거죠. 정말 최고의 강사와 잘 하는 강사의 차이점이 뭔 줄 압니까. 잘 하는 강사는 강의를 하면 할수록 기를 뺏기는 사람이고요. 최고의 강사는 강의를 하면 할수록 에너지가 더 나오는 사람입니다. 저 같은 경우 22시간 연속 강의한 경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미친 거죠. 내가 (강의를) 했다는 것보다 똑같은 학생들이 그것을 들었다는 게 더 신기합니다. 아침 6시 시작해 새벽 4시에 끝냈으니까요. 

교육제도 얘기 좀 들어볼까요. 지난 20여 년간 교육제도도 참 많이 바뀌었을 텐데요. 항상 시끄러웠거든요.

우리나라 역사를 봤을 때 지금은 혼돈기라고 봐요. 이해 상충이 많다는 얘기죠. 현재로선 교육부총리를 누가해도 똑같을 겁니다. 감기도 심하게 앓고 나면 낫지 않습니까. 요즘이 그런것 같습니다. 저는 희망적으로 봅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과거 강사 시절 연 50억원을 벌어 16억원을 세금으로 냈다”면서 “회사 경영 철학도 깨끗한 장삿꾼이 되자로 일찌감치 정했다”고 강조했다. 오후 5시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면서 이금룡 대표는 “손 사장의 성공엔 깊은 통찰력이 밑바탕이 된 것 같다”며 인터뷰 후기를 밝혔다.

손주은은 누구?

손주은 메가스터디 사장은 1961년 경남 창원서 육남매 맏이로 태어났다. 1987년 대학 4학년 마지막 학기 때 학비를 벌고자 시작한 개인 과외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전국 고교생 사이에 ‘손 사탐(손주은 사회탐구의 줄인 말)’으로 통했던 그는 1988년부터 1997년까지 전 과목을 가르친 족집게 과외 강사 출신. 이후 학원 강사로 변신, 연수입 50억원이 넘는 스타강사였다. ‘나이 마흔 살 이후가 중요하다’며 2000년(그가 40세 되는 해) 구상을 위해 경기도 이천으로 떠났던 그는 “깨끗한 장사꾼이 되자”며 “2000년엔 회사를 세우겠다”고 결심하고 돌아왔다. 그는 이를 ‘이천 구상’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만든 회사가 2000년 7월 설립한 메가스터디다. 6년 전 자본금 3억원으로 출발한 메가스터디는 현재 시가총액 7030억원(10월 20일 종가 기준)에 달하는 회사로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