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기업의 잘 나가던 재무담당 임원이 어느 날 자신의 과오가 아닌 회사의 합병으로 퇴직금 한 푼 못 받고 쫓겨났다면? 그런데도 이 사람은 낙망하지 않고 창업가로 변신, 억만장자로 성공했다면? 마치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실화의 주인공을 소개한다.
 1978년 봄 ‘핸디댄’(Handy Dan)이라는 주택개량용품 회사의 임원 아서 블랭크(Arthur M. Blank, 당시 36세)는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돌발 사태 앞에서도 태연했다. 한국식으로 얘기하자면 ‘삼팔선에 가로막혀’(38세가 되기 전에 퇴직 당했으므로) 실업자 신세가 됐지만 이 역경을 오히려 창업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넘어졌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며칠 뒤 함께 정리 해고된 버니 마커스(Bernie Marcus)를 단골 커피숍으로 불러내 내가 가진 사업 구상을 밝혔다. 종이가 없어 커피숍 냅킨에 대강의 계획을 그려 주었고 버니도 흔쾌히 오케이했다.” 그가 최근 한 다큐멘터리에서 밝힌 일화다.

 이것이 세계 1위의 주택개량용품 전문 체인인 홈디포(Home Depot)의 시작이었다. 자본금 200만 달러, 종업원 90명으로 시작한 홈디포는 개업 25년 만에 국내외 1700여개의 점포와 30만 명의 종업원을 두고 300억 달러(약 32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매머드급 주택개량용품 업체로 성장했다. 30대 중반 실업자로 전락했던 블랭크 회장은 채 30년도 지나지 않아 12억 달러(2004년 3월 현재 <포브스>지 추산, 약 1조3000억 원)의 부를 쌓은 것은 물론 나눔의 삶을 실천하는 창업가(entrepreneur)로 대중의 칭송을 받는 인물이 됐다.

 현재 그는 홈디포의 경영에서 손을 떼고 미국 프로미식축구(NFL) 팀인 애틀랜타 팔콘스(Atlanta Falcons)의 구단주와 자신의 이름을 딴 비영리재단인 ‘아서블랭크 가족재단’(Arthur M. Blank Family Foundation)의 대표로만 활동하고 있다. 블랭크 회장의 평소 지론대로 ‘지금까지 사회로부터 받은 은총을 사회로 돌리는 데 여생을 쓰고’ 있는 것이다.



 모친으로부터 ‘의(義)’와 ‘낙천주의’ 터득 

 블랭크 회장은 1942년 미국 뉴욕의 퀸즈(Queens) 지역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한국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플러싱(Flushing)의 한 조그만 아파트에서 네 식구가 옹기종기 살아야 했다. 방 하나에 거실 하나 달랑 있는 아파트였으니 한국 개념으로 보면 ‘단칸방’ 수준이었다. 당시 그는 ‘그저 내 방이 있었으면’ 하는 정도의 소원을 가진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운명은 가혹했다. 그의 나이 14살 때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약사였던 아버지가 우편약국 체인인 ‘셰리약국’을 설립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대두되자 살림만 하던 모친(Molly Blank)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

 이 시절을 돌아보며 블랭크 회장은 “어머니로부터 낙천주의를 배웠다”고 회상한다. ‘창업가들과 그를 자극한 어머니들’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어머니는 살림만 하던 분이셨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묵묵히 가장 역할까지 떠맡으셨다”며 “그때 어머니로부터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교훈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사실 그의 어머니는 원래부터 강인한 여자였다. 어린 아서가 9살 때 집에 총을 든 강도 둘이 들어와 아버지를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졌지만 어머니는 강도 중 한 명에게 차근차근 뭐가 잘못됐는지 설교를 했고 그 강도는 총을 무릎 위에 놓아둔 채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블랭크 회장은 “어머니는 ‘옳은 일이라면 어떤 이유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해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며 “강도에게도 동일한 태도로 대하셨던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1인2역을 맡았던 시절, 아서와 형 마이클의 일상생활은 고단하고 스트레스로 가득 찼었다. 어머니가 일하고 있는 동안 두 아들은 집안 청소, 빨래 등을 해결해야 했으며 퀸즈라는 지역이 주는 묘한 특성, 즉 뉴욕시의 한 귀퉁이지만 맨해튼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빈민가 같은 분위기는 아서가 운동에 빠지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하지만 이 시절 어머니에게서 배운 ‘의(義)를 향한 마음가짐’과 ‘낙천주의’가 나머지 그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뉴욕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매서추세츠 주 밥슨 칼리지(Bobson College)에 겨우 입학한 그는 학기 내내 잔디 깎는 일과 세탁 대행업을 하면서 학비를 번다. 독립심을 강조한 어머니가 학비 보조를 해 주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회계학을 전공한 아서 블랭크는 졸업하자마자 데일린 그룹(Daylin Inc.)의 계열사인 주택개량용품업체 핸디댄(Handy Dan)의 경리 담당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차근차근 경리 전문가로서 경력을 쌓아가던 그의 앞에 갑자기 ‘해고 통보’가 날아든다. 데일린그룹이 핸디댄을 다른 회사에 매각하면서 그와 몇 임원을 해고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다반사가 된 ‘구조 조정’이 당시 아서 블랭크에게 닥쳤던 셈이다.

 황망한 가운데 함께 해고된 버니 마커스와 재기를 꿈꾸던 블랭크 회장은 ‘좀 제대로 된 주택개량용품점’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가 처음 잡은 직장이 핸디댄이었던 데다 마침 미국에 불어닥친 DIY(Do-It-Yourself) 바람도 창업과 사업 확장에 큰 몫을 했다. 아파트 중심의 한국과 달리 단독주택 위주의 주거 형태를 보이는 미국에서 ‘집’은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유기체’와 마찬가지였다. 블랭크 회장은 기존의 주택개량용품점이 일부 품목만 보유하고 있어서 소비자들이 여러 점포를 전전해야 하는 불편함에 착안했다. 그래서 주택과 관련된 모든 제품을 망라하는 창고형 매장을 구상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름도 홈(Home)과 디포(Depot; 저장소, 병참본부라는 의미)를 붙여서 지었다. 홈디포 매장은 목재, 수도꼭지, 시멘트, 콘센트, 못 등에서부터 냉장고, 세탁기, 심지어 비료까지 주택과 관련된 4만여 종의 물건을 갖추고 있다.



 고객 만족에 앞서 종업원 만족부터 실현. 

 아서 블랭크는 이때 몇 가지 기본적인 사업 전략을 세운다. 그런데 ‘어떻게 사업을 확장하고 경쟁을 헤쳐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먼저 고려한 것이 아니라 사람, 즉 인적 자원과 고객에 관한 원칙부터 구상했다. 그는 먼저 ‘일할 만한 직장’을 만들어 주는 문제를 고민했다. 자신들처럼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갑자기 해고당하는 일이 절대 없어야 함은 물론 즐거운 일터를 만들어 주자는 그의 생각에 공동 창업자인 버니 마커스 회장도 흔쾌히 동의한다. 특히 각종 자재와 공구를 판매하는 홈디포의 특성상 종업원들은 고객들에게 다른 소매점보다는 더 친절하게 대해 줘야 한다는 점에서 ‘고객 만족’에 앞서 ‘종업원 만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블랭크 회장의 심모원려(深謀遠慮)였다. 이에 따라 홈디포의 전 종업원들에게는 1981년 뉴욕 증시 상장 이후 스톡옵션이 주어졌으며 20년 이상 근속한 직원들 가운데 백만장자가 된 사람들도 많다.

 블랭크 회장은 직원들의 호칭도 바꾸었다. 종업원(employee)이라는 표현 대신 동료(associate)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 부분에 대해 블랭크 회장은 그의 자서전에서 “단순히 ‘월급 받는 노예’ 수준이 아니라 ‘홈디포를 이루는 한 축’이라는 자부심을 심어 주기 위해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전통은 이후 다른 소매업에도 확산되어서 월마트(WalMart) 같은 대형 소매점도 이 용어를 차용하게 된다.

 블랭크 회장이 개업하기도 전부터 구축하려 했던 또 하나의 원칙은 ‘무조건적인 고객 만족’이었다. ‘손님들이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하거나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 길로 홈디포는 문을 닫을 것’이란 강박관념에 가까운 원칙을 사업 구상 단계에서부터 세운 것이다. 고객이 요구하면 종업원들은 언제나 친절히 응대하는 것은 기본이고 물건이 있는 위치를 물어올 경우에도 “몇 번째 코너에 있어요”라고 알려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를 따라 오세요”라고 직접 안내를 하도록 유도했다. 그에 앞서 고객의 요청에 잘 대응하기 위해 종업원들을 선발할 때 전문가들을 주로 뽑았다. 말하자면 수도배관공, 전기기술자, 정원사 등을 고용해 해당 제품의 안내를 맡게 함으로써 스스로 주택을 개량하기를 원하는 고객들에게 최대한 그 분야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놓은 것이다. 또한 어떤 이유에서건 고객의 이익을 가장 우선적으로 챙겨 주는 회사가 되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매장을 들어서자마자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환불 및 교환센터’를 만들어 운영했다. 형식적으로 고객 불만을 처리하는 시늉만 한 것이 아니라 고객이 원한다면 포장이 좀 뜯겨 있더라도, 또 아무 하자가 없는데도 두말없이 환불해 주는 것이 홈디포의 전통이 돼버렸다. 지금도 홈디포 매장에 가서 환불을 요구하면 물건을 살 때보다 더 쉽게 빨리 처리해 주는 종업원들을 만날 수 있다.

 블랭크 회장이 심혈을 기울인 홈디포의 고객 만족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에 관해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공동 창업주 마커스를 친구가 찾아와서는 “자네 회사는 이제 망하게 생겼네”라고 비아냥거렸다. 그 친구가 부연 설명을 하기를 어느 날 자신이 홈디포에 200달러짜리 수도꼭지를 사러 갔는데 종업원이 설명을 듣더니만 “새로 살 필요 없이 1달러짜리 부품 하나만 교체하면 된다”면서 어떻게 수리하는지 자세하게 알려주더란 것이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장사해 가지고서야 어떻게 돈을 벌겠느냐는 게 그 친구의 지적이었다. 그러자 마커스 회장은 “그 수도꼭지는 그렇다 치고 만일 앞으로 자네가 집 어딘가에 문제가 생겨 수리용품을 사야 한다면 어디로 갈 것 같은가?”라고 물었다. 그 친구 왈 “물론 홈디포지.” “바로 그걸세. 그 종업원이 누군지 알아서 상이라도 줘야겠구만. 우리는 고객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네. 그러면 고객들은 우리와 평생 연결되지. 우리는 단기적인 이익을 보기 위해 홈디포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네.” 이게 마커스 회장의 대답이었다. 블랭크 회장과 마커스 회장은 이심전심으로 고객 만족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미 서로 합의를 보고 있었던 셈이다.

 또 하나 블랭크 회장이 중점을 둔 부분은 협력사 문제였다. 직접 생산하지 않고 판매만 하는 홈디포의 성격상 수많은 하청업자를 둘 수밖에 없는데, 이들 역시 단순한 일회성 납품업자로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자’로 격상시키는 노력을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수도꼭지를 생산하는 한 납품회사 사장은 홈디포 판매원으로 일하고 난 뒤 홈디포의 직원들을 자신의 공장에 초대해 수도꼭지 디자인 과정에 참여하게 했다. 현장에서 소비자들과 대화를 나눈 뒤 생산 전 단계에서 미리 소비자의 요구를 반영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한편 1978년 동업자 마커스와 함께 사업 구상을 끝낸 블랭크는 투자자를 찾아 나섰다. 이때 10여년 뒤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도 했던 로스 페로 회장과 만나 투자 유치 협상을 벌이게 되는데 블랭크 회장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블랭크 회장은 최소한 200만 달러는 있어야 안정적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당시 EDS란 회사를 창업해 미국 재계에서 창업가이자 투자자로 부상하고 있던 페로 회장에게 액수를 밝혔고 긍정적인 답변을 얻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 협상에서 페로 회장과 대화를 나누던 중 투자 유치를 백지화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누다 마커스 회장이 타던 자동차로 화제가 옮아간다. 그런데 페로 회장은 “우리 회사 종업원 가운데 캐딜락을 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데…”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이 말에 깜짝 놀란 블랭크 회장은 고민하기 시작한다. 페로 회장의 이 말을 한국식으로 바꾸면 “내가 주는 월급 받는 주제에 나도 안 타는 벤츠를 타?”라는 얘기가 된다. 말하자면 자신이 투자해서 시작하는 회사의 경영자라면 역시 자신의 세세한 간섭을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페로 회장으로부터 받은 블랭크 회장은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차라리 다른 투자자를 찾아보자”는 제의를 마커스 회장에게 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됐다. 종업원 복지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섬김의 경영’을 꿈꾸던 그로서는 당연한 판단이었을 터이다.

 결국 핸디댄에서 일할 때 알고 지내던 투자자를 다시 만나 사업 설명을 한 뒤 200만 달러를 유치하는 데 성공, 마침내 1979년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1호점을 내고 영업을 시작한다. 두 공동 창업자가 ‘5년 뒤 배당을 시작하는 조건으로 일절 경영에 간섭하지 않기’를 확약받고 유치한 투자였다. 200만 달러의 이 초기 투자는 20년 만에 580억 달러(1999년 시장 가치)라는 열매를 맺어 ‘2만9000배’라는 경이로운 수익률을 기록한다.

 사업 초기 자금 조달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은 블랭크 회장은 이후 나름대로 노하우를 쌓게 되고 창업자들에게 이 부분과 관련된 조언을 빼놓지 않는다.



“자본금은 초기 계획에서 잡았던 금액의 두 배를 확보하도록 해야 합니다. 단순히 돈을 더 쌓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흔들리지 않고 초기 사업 구상을 관철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블랭크 회장이 홈디포를 창업해 세계적인 규모로 키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릴 때부터 배운 겸손한 자세와 ‘섬김의 리더십’이 자리 잡고 있다. 2001년 대표이사 직을 그만두기 전까지 그는 가장 낮은 마음으로 스스로를 ‘한 사람의 직원’이라고 여기며 회사를 경영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블랭크 회장은 “홈디포에서는 아무도 뭔가를 시키거나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바닥에 떨어진 나뭇조각 하나라도 직원이 줍고 있다면 그에 앞서 나나 우리 경영진이 솔선수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런 섬김의 리더십은 종업원들의 목소리를 열심히 들으려 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수시로 “나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위치에 있지, 목소리를 내는 위치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항상 종업원들의 애로사항이 뭔지, 요구사항이 뭔지 경청해서 이를 경영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앞서 페로 회장과의 투자 유치 협상 결렬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비록 피고용인이라 하더라도 사생활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인식이 블랭크 회장에게는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갑자기 해고당한 경험을 한 뒤에는 종업원들의 복리후생을 누구보다도 강조했다. 이런 이유로 ‘홈디포의 종업원을 바늘로 찌르면 오렌지색 피를 흘린다’는 구전(口傳)이 미국 비즈니스 사회에 나돌게 됐다. 오렌지색은 창업 이후 줄곧 홈디포를 대표하는 색깔이다. 종업원들이 두르고 있는 앞치마나 로고, 쇼핑카트에서도 이 오렌지색을 볼 수 있다. 그가 새로 회장이 된 애틀랜타 팔콘스의 경영에서도 ‘섬김의 리더십’은 위력을 발휘했다. 팔콘스를 인수한 것은 지난 2002년, 홈디포의 경영에서 손을 뗀 지 1년여 만이었다. 그런데 구단을 인수하기도 전에 그는 팬들은 물론 선수들까지 일일이 면담, 문제점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2001년 12월, 어웨이 경기를 위해 이동하던 선수들의 전세기에 동승해 팔콘스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그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팔콘스 풋볼팀 섬김의 경영으로 만년 꼴찌 탈피 

 그때만 해도 팔콘스는 내셔널풋볼리그(NFL)의 플레이오프 경기에 창단 후 단 한 번 진출한 경험밖에 없던 소위 ‘만년 꼴찌’ 팀이었다. 선수들은 블랭크 회장을 만나자 “제발 홈경기 때 조지아 돔(Georgia Dome, 애틀랜타 시 전용 풋볼경기장)에 빈자리가 보이지 않게 해달라. 우리는 팬들이 지축을 울리며 응원을 한다면 정말 열심히 뛸 수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팬들을 만난 자리에서는 또 다른 얘기도 청취했다. “우리는 홈경기에 가고 싶어도 주차장이 좁고, 휴게시설이 불편해서 도저히 갈 마음이 안 난다. 그러니 입장료도 비싸 보인다”는 불평을 들은 것이다. 블랭크 회장은 당장 현황 파악에 들어갔다. 그 결과 주차장이 좁아서가 아니라 시즌 중에도 돔구장의 주차장 일부를 외부 업자에게 임대해 주고 있어서 주차장 이용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 팬들의 지적대로 구장 안의 편의시설은 엉망이었다.

블랭크 회장은 이 두 가지 문제 해결에 착수했다. 우선 입장권 가격을 일부 인하하고 주차장 임대를 해약, 1만 대의 주차 공간을 더 확보해 연간 이용권을 구매한 팬들에게 주차 우선권을 부여했다. 또 조지아 돔 내부에 멋진 휴게실을 신축했다. 이렇게 건의사항을 하나씩 실천해 나가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때까지 한 번도 매진되지 않았던 홈구장 경기의 티켓이 2003년에는 순식간에 1년치가 다 팔려 버린 것은 물론 2004년 경기에 대한 예약까지 1만2000건이나 들어온 것이다.

 이와 함께 블랭크 회장은 우수한 선수들을 보강한 것은 물론 유명 연예인을 초청, 홈경기 때 막간 공연을 강화하는 한편 지역사회와 강한 유대관계를 굳혀 나간다. 그 결과 팔콘스는 마침내 팀의 주요 선수들이 부상을 입었음에도 2003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쾌거를 올린다. 현장의 소리에 귀기울인 블랭크 회장의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홈디포 경영에서 배웠던 ‘현장 경영’과 ‘섬김의 마인드’가 전혀 다른 업종인 미식축구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팔콘스팀의 주전 케이스 브루킹은 “미식축구든, 기업이든, 미국 정부든 변화는 높은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라고 그 의미를 분석했다.

 하지만 블랭크 회장은 오히려 공(功)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렸다. 그는 “팬들과의 부대낌, 선수와의 대화가 없었다면 조지아 돔을 가득 채우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난 관리인에 불과하다. 선수들과 팬들에게 감사한다”고 2004년 신년 모임에서 말했다. 블랭크 회장은 그의 부에 걸맞은 ‘나눔의 실천’을 하는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미국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2004년 연말 특집호에서 블랭크 회장을 ‘미국에서 가장 기부를 많이 한 50인’ 가운데 35위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그가 기부하거나 모금한 금액은 무려 1억8300만 달러(약 2000억 원)에 달한다. 이는 그가 개인적으로 자선한 규모이고 그가 경영을 맡았던 홈디포나 구단주로 있는 팔콘스도 별도로 기부에 적극적이다.

 홈디포의 경우 그가 경영을 맡았던 20여년 동안 1억2000만 달러에 달하는 돈을 자선사업에 썼으며, 팔콘스는 인수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2800만 달러를 모금해 130개 비영리재단에 기부했다. 팔콘스구단은 또 애틀랜타팔콘스청소년재단(AFYF)을 발족, 청소년들이 범죄나 마약에 휩쓸리지 않고 스포츠로 올바른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블랭크 회장이 지휘봉을 잡은 조직은 모두 사회에 대한 이익 환원과 기부를 기업 문화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가족의 소중함 일깨워, 후세 양성에도 심혈 

 블랭크 회장은 후세 양성에도 적극적이다. 현재 그가 졸업한 밥슨 칼리지는 그의 이름을 딴 창업학교를 설립해 두었다. 이 창업학교에서 그는 30년 전의 자신을 만나고 있다. 이들 젊은 창업가들을 상대로 그는 “늘 모든 일에 대해 ‘당연히 그렇겠지’라며 대충대충 넘어가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언제나 여러분의 능력을 조금 웃도는 과업을 만들어 거기에 도전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하곤 한다.

 그의 이름을 딴 ‘아서블랭크가족재단’(AMBFF)은 1995년 설립됐다. 재단의 이름에 ‘가족’이란 말이 들어간 이유는 그가 어려운 형편에서 살면서 안정된 가정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재단을 통해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인 가정을 잘 가꾸기 위해 적극적인 사업을 펼치고 있다. ‘보다 나은 출발’(Better Beginnings)이라는 이름으로 3세 미만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지원 사업이 그 첫 번째 사업이다. 먼저 편부모 슬하에서 자라거나 아주 가난해 기본적인 생계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유아들을 찾아내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블랭크 회장은 이 시기에 제대로 양육되지 못한 아이들이 가난과 범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현실을 발견한 뒤 이런 유아들부터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나이가 좀 더 들어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아이들 중 저소득층 어린이들을 지원하는 ‘성공으로 가는 길’(Pathway to Success)이란 프로그램도 있다. 비록 미국에서는 고등학교 과정까지가 의무교육이긴 하지만 중도 탈락하는 청소년들이 많다. 아이들이 생계 부담에서 벗어나 탈선하지 않고 고등학교에 진학해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재단이 보살피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애틀랜타 시가 예술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블랭크 회장은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가 직접 ‘애틀랜타시 관현악단’ 후원회장을 맡아 모금행사 등을 주도하고 있으며 ‘애틀랜타 재능개발 프로그램’ 등도 주관, 후세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블랭크 회장은 조깅이 미국에 확산되기 이전인 1970년대 초반부터 달리기에 심취한 인물이다. 이는 선친이 심장마비로 급사한데다 의사들이 골초인 그에게 건강관리를 위해 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그는 기회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운동화로 갈아 신고 뛴다. 블랭크 회장이 뛸 때 즐겨 입는 러닝셔츠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져 있다. ‘결승점은 없다’(There is NO Finish Line). 창업가 정신을 잃지 않고 난관에도 불구하고 홈디포를 창업해 굴지의 기업으로 일군 뒤 미식축구 구단주로 새 인생을 살면서 자선사업에 적극적인 블랭크 회장에게 딱 맞는 구호이다.

 어쩌면 달리는 동안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생관을 이런 식으로 전파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60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는 블랭크 회장의 다음 도전은 무엇일지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