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보다 수성(守成)이 어렵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로 통한다. 특히 오너 경영인이 세습될 때 그런 경향이 더욱 짙다. 지난 1990년대 진로, 우성건설 등 창업주의 2세 기업인이 경영을 맡았던 전통의 기업들이 추풍낙엽처럼 도산한 적이 있었다. 북미라고 별다를 게 없다. 벨(Bell Enterprise)이나 노텔(Nortel International)처럼 100세가 넘은 기업이 있는 반면, 외부 환경 변화에 적응치 못해 조용히 사라진 기업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이 당면 위기를 극복하고 50억달러의 외형을 30여년만에 200억달러대로 불린 오너 경영자가 있다면 관심을 끄는 게 당연하다. 할아버지가 세우고 아버지가 확장시키려다 빈사 상태에 빠진 가업(家業)을 30대의 젊은 나이에 되살린 조지 웨스턴(George Weston)그룹의 게일런 웨스턴(65)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개혁으로 위기의 그룹 살린오너 3세



 나다 경제주간지 <캐내디언 비즈니스>는 게일런 웨스턴 회장을 2004년 12월1일 기준으로 ‘캐나다 제2위 부자’로 기록하고 있다. 미국 <포브스>지가 최근 발표한 ‘세계 부자들’에 따르면 웨스턴 회장은 2005년 2월 현재 99억달러(약 110조원)의 재산을 소유, 세계 35위의 부자에 랭크됐다. 이는 1년 전에 비해 22억달러(약 2조4000억원)가 불어난 것으로 하루에 65억원 꼴로 늘어난 셈이다. 

 그는 현재 조지 웨스턴그룹의 지주회사인 위팅턴 캐나다의 지분 62.5%를 소유하고 북미 지역의 경영을 총지휘중이며 지주회사 아래에 명품점인 홀트 랑프뤠·웨스턴 푸드·로브로그룹 등을 자회사로 두고 있다. 게일런 회장이 창업 3세인 데도 빈사 상태의 주력 기업을 회생시키면서 사업 확장과 변신에 성공한 요인으로 캐나다 재계는 그의 조부가 갖지 못했던 ‘결단력’과 선친에게 부족했던 ‘끈기 있는 관리 마인드’를 꼽는 데 주저치 않는다.

 게일런 웨스턴 회장은 소위 말하는 ‘맨손의 창업자’는 아니다. 지난 1882년 조부였던 조지 웨스턴이 씨를 뿌린 웨스턴그룹을 물려받은 상속자다. 하지만 그는 오너 일가라 해서 무임승차하지 않고 위기에 빠진 그룹을 살리는 소방수 역할을 맡아 경영에 참여했다. 결국 그의 개혁 작업이 오늘의 웨스턴그룹을 가능케 했고, 자신은 캐나다의 두번째 갑부로 등극한 것이다.

 웨스턴그룹의 지난 2004년말 매출액은 297억달러(약 32조원), 순익은 18억달러(약 2조원)에 달한다. 이 중 유통업체인 로브로그룹의 매출과 순익은 각각 262억9000만달러와 16억4000만달러로 전체 그룹 매출의 88.2%, 순익은 92%를 차지하고 있다. 웨스턴그룹은 북미에만 67개의 생산 시설과 1577개의 그로서리를 보유한 캐나다 최대의 제빵, 식료품 유통 그룹이다. (주:북미의 그로서리는 야채, 육류, 낙농 제품 등 1차 산품은 물론 세제, 의류, 주방기구 등 공산품까지 보유한 종합 소매점으로 한국의 카르푸보다는 이마트에 가까운 잡화점이다.)



 대학 재학중 무작정 아일랜드행

 할머니 쌈짓돈으로 잡화점 열어

 가필드 웨스턴 전 회장(1898~1978년, 창업자 조지 웨스턴의 장남)의 자녀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게일런은 재벌 상속자의 안일한 삶을 박차고 ‘온실 바깥으로 나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1940년 태어나 명문 웨스턴 온타리오 대 경영학부를 다니던 1965년, 졸업장도 받지 않은 채 아일랜드로 무작정 떠난다. 

1960년대 북미의 분위기는 서부 개척 바람이 불던 1800년대말처럼 ‘가자, 유럽으로!’가 유행이었다. 마셜 플랜으로 전쟁 극복이 한창이던 유럽은 북미의 창업자에게 매력적인 시장이었던 것이다.

 1965년 게일런이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아일랜드는 현대 소매업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잡화점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사업 수완을 테스트할 기회를 갖게 된다. 할머니로부터 받은 쌈짓돈으로 더블린 근교에서 조그마한 잡화점을 연 그는 이 가게를 5년 뒤 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그로서리 체인으로 성장시킨다. 처음으로 연 이 가게를 파워(Power)란 이름의 슈퍼체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어 이 체인에서 발생한 이익으로 부도난 소규모 잡화점을 구입, 페니즈(Penny’s)라는 또다른 슈퍼체인을 만든다. 1971년 아버지의 긴급 요청을 받고 캐나다로 돌아올 때까지 이런 식의 합병과 체인 개설을 통해 브라운(Brown), 토마스앤코(Thomas & Co.) 등 식당, 신발, 여성의류, 잡화 체인을 속속 설립하는 등 사업가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하지만 게일런은 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로브로(Loblaws)의 회생 작업에서 자신의 진가를 확연하게 드러냈다. 아버지 가필드 회장은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웨스턴그룹을 확장하기 위해 유통망을 보유해야 한다고 판단, 1954년 로브로 체인을 인수했다. 1919년 창업돼 온타리오주 전역에 100여개의 매장을 갖고 있던 로브로를 인수한 것은 웨스턴그룹이 생산하는 식료품의 안정적인 공급처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1882년 토론토 외곽의 작은 빵가게로 출발한 웨스턴그룹으로선 크나큰 방향 전환인 셈이다.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 웨스턴그룹은 로브로를 통해 생선통조림부터 설탕 생산업자, 식당용 식자재 및 포장 회사까지 인수하는 등 닥치는대로 영토를 확장해 갔다. 심지어 미국의 그로서리업계에도 진출, 미국 공정거래위원회의 감시 대상에까지 오르는 등 요즘 시각으로 보면 ‘1960년대의 월마트’였던 셈이다.



 1차 오일쇼크 후 부친 사업 ‘흔들’

 급거 귀국 후 회생 작업 나서

 그런데 1970년대 1차 오일쇼크가 닥치자 유통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리한 확장으로 사내 현금이 마른 데다 캐시카우 역할을 하던 로브로 매출이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급기야 식빵, 베이글 등을 생산하는 제빵 관련 계열사에까지 영향을 미쳐 부도 소문으로 확산됐다. 때마침 경쟁 업체인 도미니언상회가 ‘가격 파괴’를 외치며 로브로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상품 평균 가격을 12%나 인하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시장점유율 30%였던 도미니언은 45%로 급등한 반면, 로브로의 점유율은 15%로 급락했다.

 여기에는 전문 경영인이던 조지 멧칼페 로브로 사장이 외형 확대에만 치중, 현금회전율을 떨어뜨린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더욱이 가필드 회장은 오랜 지기(知己)였던 멧칼페 사장의 과오를 보고받고서도 처리치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막내 게일런에게 ‘구조 요청’을 하게 된 것이다. 게일런이 아일랜드에서 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게일런이 급거 귀국해 들여다본 로브로는 한심할 정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1966년 4600만달러였던 순익은 5년만에 1900만달러로 급감했으며 손익 감소를 보충한다며 멧칼페 사장이 몇몇 회사를 인수하는 바람에 뒤치다꺼리하기도 벅찬 상태였다. 멧칼페 사장이 가필드 회장의 신임만 믿고 매출액 증가로 부실 경영을 가리기 위해 무려 2억달러의 부채를 끌어들여 마구잡이로 점포를 확장했고, 이로 인해 2000만달러 남짓 되는 순익으로는 몇달 버티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로브로 체인의 가치는 여전히 높았지만 전반적인 재무 상황이 문제였다. 우선 그는 부채 상환 날짜를 조정하고 실추된 신용을 회복시키려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채권 금융기관들은 냉담했고 결국 로브로 지분을 전량 웨스턴그룹의 영국 법인인 ABF로 넘기는 방법으로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일단 한숨을 돌린 후 게일런은 로브로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숨은 진주’로 불릴 정도로 탄탄했던 그룹의 주력 기업인 로브로가 왜 이렇게 몰락했는지를 살펴본 그는 아일랜드에서 경험했던 ‘다각화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로브로가 당면한 문제는 당장 부채가 많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지나친 확장과 사업다각화로 수익을 내지 못하는 내부 구조를 스스로 만든 점이었다. 이는 외형 불리기에만 급급해 내부 구조를 견실하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내부 실사 작업 및 현금 확보 돌입

 건설사 등 웬만한 계열사 매각

 비록 아버지의 가신(家臣)이지만 경영에 실패한 멧칼페 사장을 과감하게 내보낸 뒤 게일런은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했다. 실태 조사에 들어간 태스크포스팀은 로브로가 소매업이 당면할 수 있는 모든 문제점을 안팎으로 안고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우선 입지 선정부터 잘못돼 출발부터 꼬였다. 고객 접근이 어려운 지역에 그 지역 주민 특성에도 맞지 않는 점포를 신설하고 있었으니 어떻게 장사가 제대로 됐겠느냐는 게 태스크포스팀의 분석이었다.

 예컨대 1960년대는 소매점들이 도심으로부터 탈출, 근교 지역으로 확장되던 주택가를 따라 대규모로 발전하는 시절이었는데 로브로의 미국 법인은 이런 추세를 거슬러 도시 근교에 조그마한 점포만 내고 있었다. 게다가 경쟁 업체의 절반도 안되는 면적으로 새 점포를 열고 있었으니 손님들이 이런 가게를 찾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전임 사장인 멧칼페가 어설프게 맺은 부동산 임대 계약이 로브로의 발목을 잡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멧칼페 전 사장은 다음 점포를 여는 자금을 대출받기 위해 금융회사가 지정하는 건물에 입주를 했던 것이다. 당연히 로브로의 주체적인 판단이 아니라 임대되지 않는 허름한 건물에만 찾아들어간 셈이니 손님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했다.

 태스크포스팀이 내부로 눈을 돌리니 더욱 심각한 문제점들이 쏟아졌다. 뚜렷한 마케팅 목표도 없이 종업원 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매출·이익률 지수 따위는 간부들의 관심 밖이었다. 더구나 모기업인 웨스턴그룹과 로브로 계열사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아 계열사간 거래가 4%에 불과할 정도로 의사 소통에도 문제가 있었다. 마구잡이로 소규모 그로서리 체인들을 인수한 결과 좁은 지역에 계열 점포들이 몰리면서 이들간에 서로 견제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심지어 한 계열사가 다른 계열사를 고소하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이들은 서로가 ‘관계사’인지도 몰랐던 것이다.

 게일런은 내부 실사 작업을 독려하는 한편 현금 확보에 나섰다. 이를 위해 웬만한 계열사는 시장에 다 내놓았고, 아버지가 보유하고 있던 건설회사까지 팔았다. 이렇게 해서 조달한 자금이 1억6400만달러, 당시로선 큰돈이었다. 이 작업이 끝났을 때 게일런은 미국과 캐나다에 있던 로브로 매장 중 1200개를 정리할 수 있었다. 전체의 67% 가량의 점포를 처분하자 당시 경쟁 업체들은 “이제 로브로가 완전히 사업을 접는구나”라고 판단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조달한 자금은 ‘캐나다 소매점 역사상 가장 큰 리노베이션’으로 불리는 회생 작업에 모두 투입됐다.

 게일런은 이때 로브로 계열사에 단일화와 질서를 구축했다. 파워 등 비실거리던 계열사 점포는 모두 로브로란 이름으로 통일됐다. 매각한 후 남은 몇 안되는 점포들은 로브로 직영점으로 정리돼 여러 지역에 흩어졌다. 게일런은 각 점포에 매월말 순익 보고를 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점포별 독립채산제를 실시한 것이다. 그래서 전체 실적보다는 점포별로 할당된 목표와 달성도를 점포 책임자가 피부로 느끼도록 만들었다.



 디자인 전문가 만나 리스트럭처링 전기 마련

 PB(독자 개발) 상품 아이디어 도입

 게일런은 이때 30대 디자인 전문가 돈 와트를 우연히 만나 리스트럭처링 작업에 전기를 마련한다. 소매업에 전혀 문외한인 데다 색맹인 데도 워너브러더스에서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 종사하던 와트를 CI(Corporate Identity;기업이미지 통합) 작업에 투입한 것이다.

 와트는 이전까지 노랑색 도기 타일로 돼 있던 로브로 점포의 외양을 번쩍이는 갈색으로 바꾼다. 매장 안에는 신선한 야채와 식빵, 케이크 등이 찍힌 커다란 사진을 진열대 위쪽에 매달아 고객들을 인도하는 매장 안내판으로 사용했다. 시각적 효과와 함께 신선함을 강조한 것이다. 와트는 이와 함께 부드럽게 곡선을 이룬 L자를 새로운 로고로 제시한다. 이 로고는 30여년째 로브로 매장에 걸려 있다.

 물론 구조 조정만으로 로브로가 회생한 것은 아니다. 상품 품질이 좋으면서도 가격이 저렴해야 손님이 몰린다는 건 두말 하면 잔소리다. 특히 면도날처럼 박한 마진으로 운영해야 하는 그로서리의 특성상 손님들의 충성도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게일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날아가 직접 농산물을 고르기까지 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게일런 회장 덕분에 1970년대에 캐나다 소비자들은 로브로에서 키위, 아루굴라 등 열대성 과일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

 게일런 회장은 또 로브로가 파는 상품의 평균 단가를 떨어뜨리기 위해 당시로선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던 PB 상품(Private Brand;소매점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상품)을 도입한다. PB 상품은 중간 마진을 줄이고 광고 마케팅을 없애 소매가를 최대한 싸게 책정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포장도 단순하고 광고도 하지 않는 덕분에 전체 그로서리의 이미지를 깎아먹을 수 있다는 부작용도 감수해야 한다. 게일런 웨스턴 회장은 그래서 가장 믿을 만한 간부에게 이 일을 맡겼다. 웨스턴 온타리오대 기숙사 룸메이트 출신으로 태스크포스팀에 참여했던 데이브 니콜을 투입, 1977년 PB상품사업부를 출범시켰다. 니콜 상무는 회장의 기대에 부응, 원가는 낮추되 저급품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포장을 개선해 고객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처음에 ‘특별한 가치(Exceptional Value)’란 이름으로 출발했던 PB사업부는 뒤에 ‘프레지던트 초이스(President’s Choice;PC)’로 이름을 바꿨다. 나중에 계열 분리된 뒤 로브로의 경쟁 슈퍼마켓들까지 이 PC 제품을 구매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로브로의 PB 상품 비중은 2004년말 현재 16%, 48억달러에 이르고 있다. PC사는 30여년 쌓은 신용과 현금 자산을 바탕으로 지난 2000년에는 금융 업무를 시작했다. 영업 개시 2년만에 PC 파이낸셜은 30여만명의 고객을 확보했으며 현재 신용카드, 뮤추얼펀드 판매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게일런 회장의 PB 상품 개발은 로브로를 살린 것은 물론 월마트 등 다른 소매점에도 영향을 끼쳤다. 지금은 거의 모든 대형 할인판매점에서 이 방식으로 소매 가격을 낮추고 있는데 월마트 창업자 고 샘 월튼이 토론토의 로브로 매장을 둘러보고 자신도 ‘샘의 어메리칸 초이스(Sam’s American Choice)’란 PB 상품을 만든 일화는 유명하다.



 회사 정상화 되자 매장 전역 확대

 원스톱 쇼핑·자가 계산대 선보여

 한편 구조 조정이 어느 정도 끝나가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토론토에 1973년초 문을 연 무어-베이뷰 지점은 한달만에 60%의 매출신장률을 기록했다. 게일런은 한 점포에서 성공하자 다른 지역의 점포로 리노베이션을 확대했다. 점포당 평균 40만달러가 투입된 결과 일주일만에 평균 13만5000달러의 매출신장률을 보였다. 40만달러가 투입된 지 1년 후 점포당 평균 수입은 34만달러를 기록했다. 1974년이 되자 게일런이 경영에 참여하기 전 15%대까지 떨어졌던 시장점유율이 25%까지 회복됐다. 로브로의 2004년 12월 현재 시장점유율은 39%다. 6%대에 머물고 있는 2위 코스트코(Costco)를 크게 따돌리고 캐나다 최대의 그로서리 체인 자리에 오른 것이다.

 1976년 로브로는 최초로 2200만달러의 손실을 기록한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것도 점포 구조 조정 비용으로 난 적자인 만큼 이후 로브로는 흑자 행진을 이어간다. 게일런이 손댄 이후 로브로의 매출은 상승 추세를 타 1972년 50억달러에서 2004년 263억달러로 5배 이상 성장했고, 평방피트당 매출액은 빈사 상태였던 1972년 100달러에서 2000년에 745달러로 급등했다. 1990년대 로브로의 매출액은 업계 평균의 2배를 웃돌아 1999년에는 188억달러에 달했다. 그 결과 조지 웨스턴그룹의 시가총액은 게일런 회장의 경영이 본궤도에 올랐던 1990년 20억달러에서 10년 뒤에는 70억달러로 3.5배나 늘어났다.

 게일런 회장은 로브로가 정상 궤도를 찾기 시작하고 캐나다 전역으로 매장을 확대하면서 구조 조정 때 시행했던 단일화 전략을 폐기했다. 이젠 ‘로브로’란 이름이 지나치게 많이 눈에 띄는 것을 피하고 지역과 인구에 맞게 점포들을 현지화시켰다. 예컨대 작은 규모의 마을에 독점적 위치를 구축한 매장은 제허(Zehrs)란 이름으로 바꿨다.

 내륙 지방의 소득 수준이 낮은 마을에는 미스터 그로서(Mr. Grocers), 중산층이 사는 지역은 노 프릴스(NoFrills; 거품 뺀 가격)라는 프랜차이즈 점포를 열었다. 대도시에서는 로브로와 인디펜던트, 슈퍼스토어 등의 브랜드로 점포를 확대했다. 그 결과 2004년말 현재 로브로그룹은 20개 브랜드로 구성된 1577개의 점포를 캐나다 전역에 보유하고 있다.

 1990년대 로브로는 ‘원스톱 쇼핑’을 위한 시스템 구축에 들어간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평범한 개념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쇼핑하러 왔다가 카페에 들러 차도 한잔 하고 아이를 탁아 시설에 맡겨 둔 채 운동도 하고 요리도 배울 수 있는 슈퍼마켓은 캐나다에 없었다. 변신과 개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 2001년에는 캐나다 최초로 그로서리 매장에 ‘자가 계산대(Self Scan)’를 설치했다. 매장별로 6~8대 정도의 바코드 리더 계산대를 설치, 원하는 손님들은 스스로 물건들을 스캔한 뒤 계산하고 나갈 수 있게 만들었다. 이 개선으로 고객만족도는 높이면서 인건비 부담은 0.5%까지 줄였다. 이는 연간 1억달러의 원가 절감 효과를 불러 오는데 로브로 매장 하나를 더 열 수 있는 수준의 금액이다.

 게일런 웨스턴 회장의 다음 목표는 전자슈퍼(e-super market)다. 급속히 변화하는 정보기술(IT) 혁명에 발맞춰 인터넷으로 식료품까지 거래하는 사이트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궁극적으로는 소비자들이 쇼핑센터에서 힘들여 발품을 팔지 않고도 원하는 식료품을 살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취지라고 로브로측은 설명했다. 120여년간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온 웨스턴그룹의 최고경영자인 게일런 웨스턴 회장이 수백년 뒤까지 유지되는 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로브로와 웨스턴그룹의 장기 전략은 온·오프 양쪽으로 나눠 가닥을 잡아 가고 있다. 여전히 직접 농산품이나 육류를 고르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이 상존하는 반면, 점점 IT 기기로 무장한 세대들이 전자상거래에 익숙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게일런 웨스턴 회장은 “로브로는 PB 상품 비중이 높아 가격경쟁력이 높다”며 “인터넷 구매는 매장 이름보다는 가격이 더 중요한 변수인 만큼 우리가 승산이 있다”고 2004년 사업보고서에서 강조했다.



 웨스턴그룹 확장과 인수 병행

 게일런 회장 납치 미수 사건으로 대중공포증

 대개의 재벌 기업이 그렇듯이 웨스턴그룹 역시 확장과 인수를 병행해 왔다. 1998년 웨스턴 회장은 퀘벡주의 슈퍼체인인 프로비고(Provigo)를 17억달러에 인수, 로브로 계열사로 편입시킨 뒤 캐나다 제2의 소비지 퀘벡주 공략에 들어갔다. 프로비고는 퀘벡주 전역에 348개의 매장을 소유하고 있는데 퀘벡 주민들이 ‘퀘벡 이외의 지역은 캐나다라도 외국’이란 정서를 가진 것을 감안, 매장 이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영업하고 있다. 또 지난 2001년 유니레버가 소유한 미국내 제과 체인을 20억달러에 인수하는 한편, 2년 뒤에는 영국의 대형 슈퍼 체인인 셀프리지를 10억달러에 매입했다.

 주로 식품 관련 기업을 인수했지만 딱 하나 예외는 명품점 홀트 랑프뤠(Holt Renfrew)다. 1837년 퀘벡시에서 모자가게로 출발, 캐나다의 톱 브랜드 명품 업체로 성장한 이 회사를 1986년에 4300만달러를 주고 매입해 아내에게 경영을 맡겼다. 지난 1997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총독으로 임명돼 공직까지 맡았던 힐러리 웨스턴 여사는 아일랜드의 유명 모델 출신이다.

 게일런 웨스턴 회장은 대개의 재벌들이 다 그렇지만 대중 앞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업가다. 특히 1980년대 일어났던 한 사건이 그에게 대중공포증에 가까운 경계심을 심어줘 더욱 은둔하게 만들었다. 1983년 8월 아일랜드 독립을 원하는 무장 단체인 아일랜드해방군(IRA)이 더블린에서 영국의 재벌 얼 마운트배튼을 납치,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웨스턴 회장 역시 더블린 근교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때 IRA는 웨스턴 회장과 가족들도 납치 대상에 올렸던 것이다. 다행히도 미리 이 정보를 입수한 경찰 당국이 그를 피신시켰고 뒤늦게 회사 임원 한 사람이 납치돼 2주 동안 고초를 겪은 적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웨스턴 회장은 토론토로 돌아와 출퇴근할 때 매일 다른 도로를 이용하고 해외여행 때는 가명을 사용하는 등 한동안 철저히 은둔했다. 하지만 홀트 랑프뤠 인수 이후에는 가끔씩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캐내디언 비즈니스>는 ‘캐나다부자 특집호’에서 “게일런 웨스턴의 피 속에 흐르는 사업가의 혈통과 배짱, 그리고 인내가 어우러져 오늘의 웨스턴그룹을 가능케 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게일런 회장이 무임승차를 원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오늘 또 뭔가 이뤄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며 “아버지는 자식들이라고 무조건 가업에 참여토록 허용치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9남매의 막내인 그를 아버지가 후계자로 선택한 것은 웨스턴그룹으로선 행운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