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 애니 흥행 1위 기록을 세운 ‘레드슈즈’ 포스터. 사진 로커스 스튜디오
올해 한국 애니 흥행 1위 기록을 세운 ‘레드슈즈’ 포스터. 사진 로커스 스튜디오

극장가에 ‘초통령(초등학생들에게 대통령처럼 인기 있다는 의미)’ 애니메이션(이하 애니) ‘뽀로로’ 시리즈의 관객 수를 뛰어넘고 올해 연간 흥행 1위를 차지한 국산 애니가 등장했다. 8월 개봉한 ‘레드슈즈’가 그 주인공이다. ‘레드슈즈’는 관객 81만2004명을 동원하며 올해 4월 앞서 개봉한 ‘뽀로로 극장판 보물섬 대모험’의 관객 76만 명을 넘겼다.

백설 공주 이야기를 재해석한 ‘레드슈즈’는 국내 애니 제작사 로커스 스튜디오가 220억원을 투입한 대작 애니다. 지나치게 외모에 집착한 벌로 난쟁이가 된 일곱 왕자가 공주를 도와 사라진 국왕을 찾아 나선다는 내용이다. 국산 애니이지만, 그림체에서 디즈니·픽사 등 서양 스튜디오의 향기가 느껴진다. 캐릭터들의 목소리를 할리우드 배우들이 더빙해 외국 작품 같다는 느낌을 더한다.

이 작품은 ‘원더풀 데이즈(2003년)’를 연출한 홍성호 감독,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한국인 최초 수석 애니메이터로 20년간 일한 김상진 감독이 의기투합해 만들었다. 홍성호 감독은 한 라디오 방송에서 영어로 더빙한 이유를 묻자 “글로벌 시장에 나가려면 영어 더빙이 기본이고, 그 다음 각 나라에서 그 나라 언어로 더빙한다”라고 밝혔다.

침체기를 겪어온 한국 애니 산업이 도약할 기미를 보인다. 정부 정책에 의존하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던 상황에서 벗어나 국내를 비롯한 글로벌 시장에서 조금씩 역량을 드러내고 있다. 올해 7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18년 하반기 및 연간 콘텐츠 산업 동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7~12월) 기준 애니 수출액은 1억2341만달러(약 1475억원)로 전년 동기보다 23.8% 늘었다. 같은 기간 전체 콘텐츠 산업 수출액은 6.9% 감소했다.

박보경 서울산업진흥원(SBA) 서울애니메이션센터장은 “넷플릭스를 비롯한 글로벌 콘텐츠 회사들과 한국 애니 제작사들의 협업이 늘고 있고, ‘뽀로로’나 ‘라바’ 같은 국산 아동용 애니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면서 “한국 애니 산업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박 센터장은 “성인 대상 애니 시장도 조금씩 열릴 것으로 보인다”면서 “최근 수년간 인기몰이 하는 웹툰·웹소설 작품이 늘어나면서, 애니로 만들 수 있는 원작 콘텐츠 풀이 과거보다 많아졌다”라고 덧붙였다. 한국 애니가 맞이한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기회 1│자금력 풍부한 넷플릭스 등장

세계 콘텐츠 시장에서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오리지널(자체 제작 콘텐츠)을 만들어 내고 있는 넷플릭스는 한국 애니 산업의 중요한 축으로 떠올랐다. 2016년에야 한국에 진출했지만 콘텐츠 업계 영향력은 적지 않다. 수익을 내기 어려운 열악한 애니 제작 환경을 충분한 제작비 지급으로 바꿔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 대상 애니에 주력하는 레드독컬처하우스는 넷플릭스의 단편 애니 시리즈 ‘러브, 데스+로봇’ 제작에 참여했다. ‘러브, 데스+로봇’은 올해 3월 15일 넷플릭스 독점으로 공개된 성인 대상 애니로, 미국의 대형 애니 스튜디오 ‘블러 스튜디오’가 제작을 총괄했고 이 중 한 편을 레드독컬처하우스에 외주 제작을 맡겼다. 제작비에 대해 배기용 레드독컬처하우스 대표는 “구체적인 제작비를 공개하기는 어렵지만, 평소 받는 자금 규모의 3~5배쯤이다”라고 말했다.

SBA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매년 개최하는 콘퍼런스인 ‘국제콘텐츠마켓 SPP’에서 넷플릭스는 이미 주요 바이어로 인식되고 있다. 국제콘텐츠마켓 SPP는 한국의 애니·만화 산업 종사자들이 고객사를 만날 수 있는 중요한 행사다. 넷플릭스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참석하기 시작했다.


기회 2│애니 유통 채널이 늘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방송국은 애니 작품이 시청자를 만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창구였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통신 3사(SKT·KT·LG유플러스)가 자사 IPTV 서비스를 통해 아동용 애니를 보급하면서 조금씩 변화가 시작됐다. 애니는 어린이 콘텐츠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콘텐츠로 제격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전략이었다. 부모들이 어린 자녀를 위한 콘텐츠 소비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통신 3사는 현재까지도 애니를 주력 콘텐츠 중 하나로 판단해 이 전략을 이어 오고 있다. 인기 애니를 자사 IPTV 서비스에 유치하는 것이다. 올해 9월 KT는 ‘올레tv’에서 이랜드의 애니메이션 제작사 ‘올리브스튜디오’와 손잡고 인기 캐릭터 ‘코코몽’이 등장하는 애니를 공개했다.

‘코코몽 키즈송’ 시리즈에서 코코몽과 그 친구들은 세계의 인기 동요를 부르며 율동한다. 이 작품을 통해 한글·영어 등 언어 공부와 숫자 세는 법을 익힐 수 있다. ‘코코몽 키즈툰’ 시리즈는 바른 예절과 생활 습관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는 애니로, 유아교육 전문가의 감수를 받았다.

더불어 최근 들어 한국 콘텐츠 시장 전반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넷플릭스·유튜브 등 글로벌 동영상 재생 서비스가 애니 유통 채널로 가세했다. 넷플릭스는 지난해 10월 국내 애니 제작사 ‘투바앤’과 협업해 ‘라바 아일랜드’를 공개했다. ‘라바 아일랜드’는 2011년 3월 KBS1에서 처음으로 방영된 아동용 슬랩스틱 코미디 애니 ‘라바’ 시리즈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작품이다. 대사가 없는 대신 과장된 표현과 행동으로 시청자를 웃음 짓게 한다.


기회 3│웹툰·웹소설 시장의 성숙

네이버와 카카오를 선두로 하는 웹툰·웹소설 시장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끈 작품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도 국내 애니 산업에는 중요한 기회다. 애니로 제작할 만한 원작의 수가 많아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 이미 웹툰·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 흥행에 성공한 사례가 많다. 카카오의 모바일 콘텐츠 플랫폼인 카카오페이지에 공개됐던 웹소설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tvN 드라마로 제작돼 인기를 끌었다.

콘텐츠 기업은 이미 웹툰·웹소설을 애니화하는 작업에 주목하고 있다. CJ ENM은 SBA와 손잡고 이윤창 작가의 ‘오즈랜드’와 김용회 작가의 ‘도깨비 언덕에 왜 왔니?’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 제작 공모전을 지난 5월 진행했다. 네이버웹툰의 100% 자회사로 설립된 ‘스튜디오N’의 경우 조현아 작가의 ‘연의 편지’를 애니로 제작한다고 지난해 12월 발표했다. 스튜디오N은 웹툰·웹소설을 중심으로 영화·드라마·애니 등의 영상 작품 제작을 위해 설립된 회사다.

웹툰·웹소설 가운데 판타지나 공상과학(SF) 장르가 특히 아동용 애니가 아닌 성인 대상 애니에 좋은 재료이지만,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하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반면 애니로 구현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결과를 낼 수 있다. 성인 대상 애니를 제작하는 레드독컬처하우스의 배 대표는 “애니는 다른 영상 콘텐츠보다 저렴한 제작비로 비교적 쉽게 웹툰·웹소설 원작의 세계관을 구현할 수 있다”면서 “아직은 애니로 만들어 성공한 사례가 많지 않지만, 앞으로 많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