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슈퍼마켓 체인인 웨그먼스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셰프들이 요리를 준비하고 있다. <사진 : 웨그먼스>
미국 슈퍼마켓 체인인 웨그먼스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셰프들이 요리를 준비하고 있다. <사진 : 웨그먼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요리를 하는 미국인의 비중은 매년 줄어들고 있다. 바쁜 직장 생활과 더불어 다양한 외식을 선택할 수 있게 되면서, 직접 장을 보고 음식을 조리하는 가정이 줄어 들고 있다. 대신 간편한 프랜차이즈 레스토랑부터 저렴한 테이크아웃(포장) 식당, 가정간편식, 문 앞까지 따뜻한 음식을 배달하는 서비스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트렌드는 대형 수퍼마켓에 위협적이다. 지금까지 미국 식료품 업체는 적은 마진으로 고전해왔는데, 요리에 대한 수요가 줄면서 매출에 난항을 겪고 있다. 홀푸드 등 미국 대형 수퍼마켓들이 매장 내 레스토랑을 여는 식으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시도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수퍼마켓과 레스토랑 결합 각광

수퍼마켓의 신선한 그로서리(식재료)와 레스토랑(음식점)을 결합한 모델을 ‘그로서란트’라고 한다. 매장에서 식재료를 사 즉석에서 바로 조리해 먹을 수 있으며, 방금 먹은 음식의 재료를 구입할 수 있다. 수퍼마켓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하면서, 쇼핑도 가능한 공간으로 변하는 것이다.

미국의 홀푸드와 웨그먼스 등 수퍼마켓 체인에는 이미 그로서란트가 들어섰고, 크로거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형 수퍼마켓도 조만간 도입할 예정이다. 유통업계 전문가들은 미래의 소비자들 대부분이 그로서란트에서 식사를 해결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경영대학원과 보스턴대의 전문가들이 식품·유통업계의 미래를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그로서란트의 등장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경영의 전문가인 크리스토퍼 뮬러 보스턴대 교수는 이미 20년 전 그로서란트의 등장을 예고한 바 있다. 그는 “그로서란트는 레스토랑과 식료품 가게로 나뉜 식품·유통업계가 하나로 합쳐지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라며 “지금까지 이러한 융합에 대한 시도는 많았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뮬러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수퍼마켓의 평균 마진은 1% 정도다. 반면 레스토랑은 평균 8~12%의 마진을 낸다. 대형 수퍼마켓은 매출 자체가 크기 때문에 낮은 마진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영위해 왔다. 하지만 최근 요리 인구 감소로 매출이 줄어들면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뮬러 교수는 식료품업계가 레스토랑 사업에 진출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최근 소비자의 트렌드가 변했고, 그로서란트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격 부담이 큰 레스토랑을 방문하는 고객은 줄었지만, 여전히 맛있고, 좋은 재료로 만든 식품에 대한 소비 욕구는 크다”며 “음식을 고를 때 가성비 기준이 중요해지면서, 그로서란트가 앞으로 각광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바바라 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경영대학원 교수도 동의했다. 칸 교수는 수퍼마켓 내부에 식사를 하는 공간을 만드는 전략은 새로운 소비자층의 요구에 응답한 좋은 사례라고 분석했다.


홀푸드 뉴욕 매장. <사진 : 홀푸드>
홀푸드 뉴욕 매장. <사진 : 홀푸드>

신선한 재료 곧바로 요리

그로서란트는 레스토랑이 제공하지 못하는 차별성을 갖고 있다. 신선한 식품을 가까운 곳에서 제공받아 곧바로 요리한다는 점이다. 미국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 출생한 세대)는 기성 세대와 비교해 친환경과 유기농 식자재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들은 판매자의 거짓 광고에 대한 불신이 크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칸 교수는 “아무리 고급 레스토랑이라고 해도 원재료를 직접 볼 수 없는데, 그로서란트는 편리한 환경 속에서 양질의 음식을 생산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며 “환경 오염과 유전자 변형 농산물에 대한 우려 때문에, 젊은 세대는 내가 먹는 식품에 대해 더 정확히 알고 싶어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제이슨 리스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경영대학원 교수는 건강한 이미지를 앞세워 밀레니얼 세대를 사로잡은 브랜드로 해산물 레스토랑 ‘레드 랍스터’를 꼽았다.

리스 교수는 “젊은 세대는 건강한 음식을 중시하기 때문에, 고칼로리 식품을 판매하는 전통적인 레스토랑은 앞으로 어려워질 수 있다”며 “레드 랍스터는 ‘해산물이 건강에 좋다’는 마케팅으로 어린 소비자층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식품·유통업계의 시너지 효과도 기대된다. 그로서란트가 수퍼마켓 재고 관리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칸 교수는 “신선 식품은 유통기한이 짧기 때문에 수퍼마켓의 마진을 줄이는 주요인”며 “그로서란트의 등장과 함께 수퍼마켓 산업의 수익도 늘어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수퍼마켓과 레스토랑은 같은 식품·유통업계지만, 경영 방식과 타깃 소비자층이 전혀 다르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수퍼마켓을 방문하는 소비자는 대부분 제품에 대한 지식 수준이 높다. 쇠고기의 부위별로, 어떤 요리에 써야 하는지 파악하고 있으며, 어떻게 다듬고 조리할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수퍼마켓 판매원은 식품의 사용처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고객 응대가 가능하다.

아울러, 수퍼마켓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재료의 신선도와 가성비다. 따라서 매장의 분위기와 인테리어 등 브랜드의 요소보다 물류의 확보가 중요하다. 좋은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하는 경영 방침이 필수다.

반면, 레스토랑은 소비자의 경험을 파는 곳이다. 소비자가 식재료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식사를 하는 소비자가 즐거운 경험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음식외에도 매장 인테리어와 음악, 향기 등 다양한 요소에 신경써야 한다.

뮬러 교수는 “식료품 가게와 레스토랑을 방문하는 소비자는 각각 원하는 바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두 집단의 중간 지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며 “식료품 쇼핑을 하러 나온 소비자가 간단히 핫도그와 피자 등으로 허기를 달래는 것과 제대로 된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경험은 전혀 다른 비즈니스”라고 말했다.


건강한 음식으로 밀레니얼 세대를 사로잡은 레드 랍스터. <사진 : 레드 랍스터>
건강한 음식으로 밀레니얼 세대를 사로잡은 레드 랍스터. <사진 : 레드 랍스터>

가치 있는 소비자 경험이 중요

칸 교수도 그로서란트가 소비자 경험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마존 등 온라인 유통업체가 식료품 시장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에, 오프라인업체는 소비자의 발길을 잡을 만한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아마존의 등장으로 많은 소비자들이 수퍼마켓까지 운전을 하고, 무거운 짐을 질질 끌면서 집에 돌아오는 수고를 불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다”며 “단순히 제품을 사러가는 곳이 아니라 먼 곳에서 굳이 운전하고 갈 만한 가치가 있는 장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리스 교수도 소비자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며, 그로서란트의 전략은 레스토랑에 더 가까워야 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성공한 레스토랑의 특징을 분석하면 음식이 전부가 아니다”라며 “음식을 어떻게 내놓고, 종업원이 어떤 태도로 소비자를 대하는지 등 종합적인 서비스 매뉴얼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리스 교수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홀푸드 매장을 참고하라고 했다. 이곳은 통합적인 푸드 코트를 설계하고, 지역 유명 레스토랑을 입점시켰다. 인테리어는 전체적으로 복고의 느낌이 나도록 디자인했다. 리스 교수는 “수퍼마켓을 아늑하게 만드는 것은 비용적인 측면에서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소비자가 레스토랑에서 가장 원하는 요소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배달 사업이 앞으로 식품업계의 변수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진 : 플리커>
전문가들은 배달 사업이 앞으로 식품업계의 변수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진 : 플리커>

배달 음식 이용자도 급증

전문가들은 수퍼마켓이 앞으로 쇼룸(각종 제품을 전시 공개하는 장)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도 크다고 입을 모았다. 다양한 식재료를 보유한 편리한 매장을 넘어, 볼거리가 있고, 가볼 만한 공간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리스 교수는 “경험을 중시하는 젊은 소비자들은 북적이고, 눈부시게 밝은 조명 아래에서 쫓기듯 쇼핑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며 “마치 갤러리를 둘러보듯 고급스러운 쇼룸에서 식품을 둘러보고, 나중에 집으로 상품을 배달받는 식으로 수퍼마켓이 진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식품 배달 사업이 앞으로 식품·유통업계 트렌드에 주요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는 레스토랑과 수퍼마켓 양쪽에 도전 과제가 될 것이다.

리스 교수는 나이가 어린 소비자일수록 배달 음식에 더 익숙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몇년 전만 해도 배달 음식을 이용하는 학생이 많지 않았는데, 현재 내가 가르치는 학생 전부가 기숙사에서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다”며 “식사에 대한 의미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전문가들은 수퍼마켓이 레스토랑 사업에 진출하더라도 물류의 가치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뮬러 교수는 “그로서란트가 신선 재료에 대한 강점이 없다면, 값싼 음식을 내놓는 레스토랑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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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서란트(Grocerant) 식료품점인 그로서리(Grocery)와 레스토랑(Restaurant)의 합성어로 다양한 식재료를 판매하고, 그 식재료를 이용한 음식을 맛볼수 있는 신개념 식문화 공간이다. 장보기와 식사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최대 장점으로 꼽힌다.

Plus Point

그로서란트 대표주자 ‘이탈리’

이탈리 보스턴 매장. <사진 : 이탈리>
이탈리 보스턴 매장. <사진 : 이탈리>

전문가들은 이탈리아의 성공적인 그로서란트 ‘이탈리(Eataly)’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뮬러 교수는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이탈리는 8000만달러 기업 가치를 지닌 식료품 가게”라며 “이곳에서 소비자들은 아침·점심·저녁을 모두 해결할 수 있고, 커피와 술도 마신다”고 말했다.

이탈리는 ‘먹다(Eat)’와 ‘이탈리아(Italy)’를 합친 말이다. 홀푸드의 식료품 판매와 레스토랑 비율이 3 대 1인 것과 반대로, 이탈리는 1 대 3 정도로, 레스토랑의 비중이 훨씬 크다.

이탈리는 2007년 첫 매장을 오픈한 후 밀라노 본점을 비롯해 이탈리아에 13개 매장과 미국 5개 매장을 포함 전 세계 총 39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매장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매장당 평균 10~15개 정도의 레스토랑과 카페, 바 등이 들어서 있다. 이탈리아 프리미엄 커피 라바차 카페(Lavazza Caffe)와 젤라토 전문점 일젤라토(Il Gelato) 그리고 시칠리아의 대표 후식 카놀리를 판매하는 ‘카놀리&봄볼로니(Cannoli & Bomboloni)’가 인기 브랜드다. 매장 내부에서 요리 수업도 진행한다.

이탈리의 내부 구조는 식료품 판매와 레스토랑의 경계가 없다. 언뜻 보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와인을 판매하는 매장 바로 옆에 간단한 안주와 술 한잔 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정육점 근처에서 바로 고기를 굽기도 한다. 처음 방문하는 고객은 지도를 참고하는 게 좋을 정도다.

Plus Point

국내 유통업계 그로서란트 열풍

스타필드 하남의 ‘PK마켓’. <사진 : 조선일보 DB>
스타필드 하남의 ‘PK마켓’. <사진 : 조선일보 DB>

국내에서는 이마트와 롯데마트, GS수퍼마켓을 운영하는 GS리테일이 그로서란트 도입 매장을 연이어 선보이고 있다.

이마트는 지난해 스타필드 하남의 신세계백화점 지하 1층에 그로서란트 개념을 도입한 ‘PK마켓’을 선보였다. 대형마트 국내 최초로, 전통시장과 각국의 푸드 스트리트 등을 재현했다. 이곳 ‘부처스 테이블’에서는 구입한 소고기를 즉석에서 스테이크로 제공한다. 팩에 담겨 있는 스테이크용 등심을 고른 뒤 고깃값에 조리비용 8000원을 추가하면 된다.

수산시장을 재현한 ‘피시 마켓’에서는 고객이 직접 고른 생선을 신선한 회나 초밥으로 제공한다. 완성된 요리는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즐기면 된다. PK마켓에는 팩에 든 과일을 착즙 주스로 제공하는 코너도 있다. 착즙 비용은 과일값에 포함돼 있다.

롯데마트는 서울 양평점에 그로서란트를 본격 도입했다. 롯데마트 양평점 지하 2층에 자리잡은 축산 매장에선 기존 대형마트의 ‘원물 위주 판매’ 방식에서 벗어나 스테이크를 위한 통합 솔루션을 제공한다. 양평점 ‘스테이크 스테이션’에서는 구입한 고기를 맛보려는 고객에게 즉석에서 스테이크를 제공한다. 완성된 요리를 포장해 가져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