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푸젠성(福建省) 닝더(寧德)에 있는 CATL의 전기차 배터리 생산공장 전경. 사진 블룸버그
중국 푸젠성(福建省) 닝더(寧德)에 있는 CATL의 전기차 배터리 생산공장 전경. 사진 블룸버그

중국은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이다. 지난해 세계 전기차 판매량은 310만 대였는데, 이 중 40%가 중국에서 팔렸다. 그런데도 중국 자동차 시장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율은 아직 2.2%에 불과하다. 그만큼 전기차와 전기차 배터리 모두 성장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

중국 정부는 수년 전부터 이른바 ‘배터리 굴기’에 나섰다. 전 세계 광산에 투자해 코발트와 리튬 등 배터리 핵심 원자재 광물을 싹쓸이하면서 전기차 시장을 육성했고, 최근에는 주행 거리에 따라 보조금에 차등을 두도록 기준을 강화하면서 기술 고도화를 유도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 전기차 배터리 업계가 최근 위기를 맞고 있다. 과열 경쟁으로 인한 부실 성장을 우려한 중국 정부가 2020년 보조금 폐지를 선언하고 지난해부터 단계적인 삭감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높은 기술 경쟁력에도 중국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던 국내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통계를 보면 2016년 150여 개였던 중국 전기차 배터리 기업이 지난해 100개 이하로 감소했다. 이 가운데 상위 10개 기업의 누적 시장 점유율은 75%로, 하위 기업이 생존하기에 어려운 환경이다. 코트라는 최근 ‘중국 전기차 배터리 기업 동향 분석 보고서’에서 “전기차 배터리 업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지만, 중국 업체들 중에는 보조금 등 정부 지원책에 의존해 온 기업이 많아 2020년을 전후해 전체 기업 중 90%가 위기를 맞을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 배터리 업체의 위기는 중국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 폐지 시한 도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중국 정부는 2012년부터 ‘에너지 절약형 및 신에너지 자동차 발전 계획’을 추진하며 전기차 업체에 차 가격의 절반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급해 왔다. 선진국에 뒤진 자동차 산업을 전기차로 따라잡겠다며 중국산 배터리를 탑재한 자국산 차량에 보조금을 차별적으로 지급해왔다.

결과적으로 삼성SDI, LG화학, SK이노베이션 등 한국산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는 중국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 정부가 이렇게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중국 배터리 업계는 내수 시장에서의 든든한 지원을 바탕으로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중국 가오궁산업연구원(GGII)의 최근 보고서를 보면, 중국 CATL은 지난해 말 전 세계 전기차용 배터리 출하량 집계에서 오랫동안 부동의 1위였던 파나소닉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섰다. LG화학이 5위, 삼성SDI는 7위였다.

CATL이 주도하는 ‘전기차 배터리 중국 굴기’에는 다른 중국 배터리 업체들도 가세하고 있다. 비야디(BYD)는 CATL과 파나소닉에 이어 3위에 이름을 올렸다. BYD는 전기 대비 158.4% 성장했다. 점유율도 7.9%에서 10.4%로 뛰었다. 상위 10위권 업체 중 중국 업체만 CATL, BYD, 파라시스(Farasis), 구오쏸(Guoxuan), EVE 등 5곳에 달한다.


‘2020년 보조금 완전 폐지’ 선언

CATL의 성능이 검증되자 독일과 일본 완성차 업체들이 CATL의 손을 잡기 시작했다. 메르세데스-벤츠나 BMW, 폴크스바겐 같은 독일 완성차 업체부터 닛산, 혼다까지 CATL의 배터리를 채택했다.

하지만 보조금이 줄어들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7월 전 세계 전기차 배터리 출하량 순위에서 일본 파나소닉이 1위를 차지한 가운데 중국 CATL과 BYD가 각각 2, 3위를 지켰다. LG화학은 4위, 삼성SDI는 7위를 기록했고, 그사이 5위에 일본 오토모티브에너지서플라이코프(AESC)가, 6위에는 중국 리센이 자리 잡았다. 8~10위엔 중화권 업체인 파라시스와 완샹, 일본 PEVE가 이름을 올렸다. 국가별 톱 10 순위는 중국(5곳), 일본(3곳), 한국(2곳)순이다.

출하량만 보면 중국 업체의 상승세가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정이 다르다.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최근 중국 전기차 배터리 업체 여러 곳이 잇따라 파산하거나 생산 중단을 선언했다.

중국 전기차 배터리 업체 3위(지난해 중국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 누적 점유율 기준)인 옵티멈나노에너지는 지난 8월 자금 부족을 이유로 향후 6개월간 생산설비 가동을 일시 중단하기로 했다. 또 다른 배터리 업체인 난징 인롱 뉴에너지도 경영난으로 지난달 생산설비를 압류당했다.

중국 1위 CATL의 사정도 녹록지 않다. CATL의 영업이익은 2015년 8억8000만위안에서 2016년 29억6000만위안으로 급증했다가 지난해는 24억7000만위안으로 감소했다. 중국 2위 업체인 BYD도 올해 상반기 이익이 전년 대비 72%나 급감했다.

보조금 차별로 인해 중국 시장 진출을 사실상 포기하다시피 한 국내 업체 입장에서 이 같은 상황 변화는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LG화학과 삼성SDI, SK이노베이션은 2020년 보조금 폐지 시점을 노려 중국에 지속적으로 투자를 이어왔다. LG화학은 2조원을 투자해 10월 중국 난징 제2공장을 착공해 내년 10월쯤 가동할 예정이다.

SK이노베이션은 8월 말 중국 베이징자동차, 베이징전공과 합작해 장쑤성 창저우시 금탄경제개발구역 내 전기차 배터리 공장 착공에 들어갔다.

다만, 배터리 업계는 중국 정부가 시장 상황에 따라서는 보조금 폐지 시점을 뒤로 미루거나 외국 업체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규제를 새로 만들 가능성이 있어 중장기적 관점에서 신중하게 추이를 지켜보자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중국 기업들이 연구·개발(R&D)에 엄청난 자금을 쏟아붓고 있는 만큼 한국과 기술 격차를 줄이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의견도 많다.

CATL은 최근 폴란드, 헝가리, 독일 등 유럽에 배터리 공장 설립까지 검토하고 있다. 로빈 쩡 CATL 총재는 올해 초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CPPCC)에서 “한국 배터리 업계는 우리가 성장을 거듭해온 지난 2년 동안 저가 전략을 통해 경쟁했을 뿐 기술 진보를 보여 주지는 못했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