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6월 28일 오전 인텍스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한 뒤 이동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6월 28일 오전 인텍스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공식환영식에서 의장국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악수한 뒤 이동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6월 25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의 주한 일본 대사관 공보문화원 3층 뉴센추리홀. 150개 좌석을 한국인과 일본인이 꽉 채웠다. 2001년 일본 도쿄 유학 중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숨진 의인(義人) 이수현씨를 추모하는 영화 ‘가케하시(懸橋)’가 서울에서 처음으로 상영되는 자리였다. 가케하시는 ‘떨어진 양쪽을 잇는 가교’라는 뜻이다. 이 영화는 2017년 만들어졌다. 이 건물 2층에서는 6월 14일부터 27일까지 이수현 18주기 추모 사진전이 열렸다. 이 행사는 일본국제교류기금이 ‘한·일의 빛과 꿈, 의인 이수현과의 뜨거운 포옹’이라는 제목으로 주최한 것이다.

일본 신오쿠보역에서는 매년 1월 26일에 이수현씨 가족과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 행사가 열린다. 올해 1월까지 18년간 계속된 행사다.

이수현씨가 선행을 한 것은 진심으로 기릴 일이지만 18년 동안이나 추모 행사를 하고 16년이 지났는데도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좀 오래된 일이라도 쉽게 잊지 않는 게 일본 사람의 특성이라고 한다.

그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마찬가지다. 최근 일본의 한국에 대한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사건에서도 일본 사람의 이런 성향이 나타난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이 행동에 나선 것이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 합의 파기와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때문인 것 같지만, 돌이켜보면 이미 이명박(MB) 정부 때부터 한·일 관계에 여러 문제가 쌓여왔다.

그동안 일본은 한·일 통화 스와프 연장 거부, ‘한국은 어리석다’는 아베 신조 총리 발언 보도, 미국의 중재를 통한 합의, 아베 총리의 국회 시정연설 등으로 지속적인 시그널을 보냈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은 일본의 속내를 제대로 파악하려 하기보다는 반일 감정에 치우쳐 ‘해볼 테면 해봐라’는 식의 강 대 강 입장만 고수했던 건 아닐까.


이명박 정부, 한·일 관계 냉각의 단초 제공

이번에 문제가 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의 뿌리는 사실상 MB 정부 때부터다.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씨 등은 1997년 일본 전범 기업을 상대로 일본 오사카재판소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2003년 일본에서 패소하자 2005년 국내 법원에 같은 소송을 냈다.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소했지만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2012년 5월 대법원은 처음으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언행도 큰 문제가 됐었다. 2012년 8월 10일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독도를 전격 방문했다. 2011년 9월 일본에 위안부 배상청구권 문제 관련 외교 협의를 요청하고, 같은 해 12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 없이 자유무역협정(FTA) 등 미래 협력을 논하기 어렵다’며 압박도 했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자 고강도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독도 방문 나흘 뒤 이 대통령은 충북 청원 한국교원대에서 열린 행사에서 “일왕도 한국을 방문하고 싶으면 독립운동하다가 돌아가신 분들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좋겠다”며 “한 몇 달 고민하다 통석의 염, 뭐 이런 단어 하나 찾아올 거면 올 필요 없다”고 말했다. ‘천황(天皇)’의 존재를 신성시하는 일본인 사이에서는 한·일 관계가 회복 불가능한 충격을 받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후 일본 내 반한 감정이 극에 달했고 양국 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일본은 2012년 10월 만기 도래한 570억달러 규모의 한·일 통화 스와프를 연장해주지 않았다. 잔여 금액 130억달러도 2015년 만기 때 끝났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 후 아베 총리가 ‘한국은 어리석은 국가’라고 했다는 일본 언론 보도가 나왔다. 2013년 11월 14일, 일본 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은 아베 총리가 측근에게 “중국은 싫은 국가지만 아직 이성적인 외교가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은 협상조차 할 수 없는 어리석은 국가일 뿐”이라고 했다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아베 총리 측근들이 새로운 정한(征韓·한국 정벌)론을 제기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의 급소를 찌른다!’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는 “일본 기업이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금을 강제 징수당하면 대항 조치는 금융 제재밖에 없다. 삼성도 하루 만에 괴멸할 것이다”라는 금융계 인사의 발언도 실려 있다. 일본이 최근 반도체 무역분쟁을 촉발하자 6년 전의 이 기사가 주목받고 있다.


강경했던 박근혜 정부, 미국 중재로 타협

박근혜 전 대통령도 강경 기조를 이어 갔다. 당선자 신분으로 2013년 초 일본 정부 특사를 만난 자리에선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고, 취임 직후 3·1절 기념사에선 “가해자·피해자란 입장은 천년이 흘러도 변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취임 후 광복절 경축사에서만 3년 연속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일본이 요구했던 한·일 정상회담은 박근혜 정부 2년 차까지도 열리지 않았다. 이전 정부는 안보·경제협력과 역사·정치 문제를 분리 대응했지만 박근혜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정상회담 개최 등 한·일 관계의 선결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러다가 미국의 중재로 2015년에 상황이 바뀌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동북아 지역의 외교 정책 축인 한·미·일 3각 협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를 위해 한·일 갈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북핵의 위협에 함께 대응해야 한다는 공감대도 있었다. 박 전 대통령 취임 약 3년 만인 2015년 11월 2일이 돼서야 첫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당시 한·일 관계 최대 현안이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 조기에 타결하기 위한 협의를 가속화하기로 했다. 이후 그해 12월 28일 합의가 타결됐다.


문재인 정부, 한·일 관계 악화일로

문재인 정부 들어서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25일 뉴욕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에게 “위안부 피해 할머니와 국민의 반대로 화해·치유재단이 정상적 기능을 하지 못하고 고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박근혜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뒤집을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한·일 양국 간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은 올해 7월 5일 공식 해산했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대일 청구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 협의를 요청했지만 한국 정부는 법원 결정이라며 거부했고 1965년 체결한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른 제3국 중재위원회 구성 요청도 거부하고 있다. 최종 답변 시한은 오는 18일까지다.

일본은 행동으로 보여줬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월에 한국 구축함이 자국 초계기를 향해 사격통제레이더를 조사(照射)했다고 주장했다. 올해 1월 아베 총리의 국회 시정연설에서는 한국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가 드러났다. 전후(戰後) 외교의 총결산을 목표로 내세우며 미국과 동맹 강화는 물론 중국·러시아·북한과 관계 개선을 강조했다. 정작 한국과의 관계 개선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올해 초 한국 정부가 요구했던 6월 오사카 G20 정상회담에서의 한·일 정상회담도 거부했다. 이번 반도체 무역분쟁은 이런 행동의 결정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