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6월 28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총리 어깨에 손을 얹고 친밀함을 보였다. 사진 블룸버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6월 28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총리 어깨에 손을 얹고 친밀함을 보였다. 사진 블룸버그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말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쿠바 무역분쟁에서 화해한 이후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칼럼니스트 제임스 매킨토시는 7월 2일(현지시각) 기고에서 “역사상 정치와 경제가 분리된 기간은 비교적 짧았다”며 이같이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처럼 정치적 문제 해결을 위해 ‘경제’를 무기로 사용하는 상황이 새롭지 않다는 것.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경제를 정치에 활용하는 경우가 빈번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문제 때문에 동맹국을 경제적으로 압박하던 전략은 1991년 소련 붕괴 후 차츰 잊혔다. 공산권 국가들이 세계 자유무역 시장에 편입됐고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으로 자유무역 기조가 확산됐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한 이후 시곗바늘은 20년 전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정치 문제 때문에 경제 제재에 나서는 ‘트럼프식 무역전쟁’은 새롭게 보이지만,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일본의 아베 정권이 한국 경제를 압박하는 것도 트럼프 스타일의 학습효과로 볼 수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번 조치가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오래 지속될 새로운 조류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트럼프, 정치 문제에 경제 들이밀기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제’를 활용한다. 2018년 초 중국과 무역전쟁을 개시하면서 중국과 무역 적자를 줄이기 위해 관세를 부과한 것은 약과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식재산권 탈취, 강제 기술 이전과 같은 문제 해결을 요구할 때도 관세로 압박했다. 중국 최대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에 대해서는 지난 5월 국가 안보를 이유로 거래 제한 명단에 올렸는데, 이는 중국의 ‘기술 굴기’를 차단하겠다는 정치적 행위다. 미국 기업은 정부의 사전 승인 없이 화웨이와 거래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국경을 넘는 이민자 문제를 해결할 때도 관세를 사용했다. 멕시코가 불법 이민을 막을 강경책을 마련하지 못하면 멕시코산 수입품에 최대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멕시코는 중남미 이민자가 유입되는 멕시코 남부 국경에 6000명의 군인을 배치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 대통령이 큰일을 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고 관세 부과는 무기한 연기됐다.


멕시코 남부 국경을 지키는 군인. 이들은 미국 국경을 넘는 불법 이민자를 막기 위해 배치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멕시코가 이 같은 조치를 하지 않을 경우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압박했다. 사진 블룸버그
멕시코 남부 국경을 지키는 군인. 이들은 미국 국경을 넘는 불법 이민자를 막기 위해 배치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멕시코가 이 같은 조치를 하지 않을 경우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압박했다. 사진 블룸버그

트럼프식 양국 간 협정…EU·일본도 모방

전 세계의 경제 분쟁은 트럼프 행정부처럼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제 제재 조치를 활용하고, WTO가 아닌 양국 간 무역 협정을 맺는 방식으로 이동하고 있다. EU는 정치적 이유로 스위스에 경제 조치를 내렸다. 스위스는 2014년 국민투표를 거쳐 EU 시민권자가 스위스에 취업 이민을 신청할 경우 쿼터를 두기로 했다. EU는 노동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해야 한다며 쿼터제를 거둘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스위스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EU는 1일부터 소비재 업체 네슬레, 글로벌 제약 회사 노바티스 등 스위스 주요 기업 주식을 EU 거래소에서 거래할 수 없도록 했다. 이 기업의 주식은 앞으로 스위스 취리히 증권거래소에서만 거래할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EU 투자자의 접근이 어려워지면서 스위스 자본 시장이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 정부가 지난 1일 발표한 반도체용 핵심 소재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 조치도 경제를 정치에 활용한 사례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4일 밤 NHK에 출연해 “징용 문제는 1965년 체결한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종지부를 찍었다”며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이번 수출 규제 조치와 연관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과 직접 협상하기보다 WTO를 통한 여론전에 나섰다. 한국 측 대표인 백지아 주제네바 대사는 1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TO 상품·무역 이사회에서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는 한 개 국가만을 대상으로 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경제 보복 조치를 취하는 점에서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는 이 문제를 WTO에 제소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WTO를 무력화하면서 WTO의 역할에 대한 회의론이 일고 있다. 미국이 4년 임기가 만료된 WTO 상소기구 재판관 임명에 반대하면서 현재 WTO 상소기구 재판관이 7명 정원 중 3명만 남았다. 12월이면 3명 중 2명도 임기 만료로 퇴임한다.


트럼프식 경제 분쟁, 장기화할 가능성

투자자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정치가 경제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흐름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이 선호하는 양국 간 무역은 힘이 센 쪽이 유리하다. 여기서 말하는 힘 센 쪽이란 무역할 때 아쉬운 것이 없는 쪽, 즉 가진 것이 많은 쪽이다. 자원이 부족한 한국에는 불리한 조건이다.

WSJ 칼럼니스트 제임스 매킨토시는 “무역에서 ‘힘이 곧 정의’라는 등식이 성립하면 글로벌 공급망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삼성, 현대차와 같은 기술·자동차 산업이 타격받게 된다. 우리나라는 주요 산업인 반도체·전자, 자동차, 화학 등의 핵심 소재와 부품을 해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일본은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종에 대한 한국 수출 절차를 강화했다. 이들 품목은 일본 제품 의존도가 높아 2~4개월 뒤 재고가 소진되면 국내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수입 의존도는 93.7%, 포토레지스트는 91.9%, 에칭가스는 43.9%에 달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홀로 일본 출장길에 오른 것은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일각에선 반도체 핵심 부품과 소재, 장비를 국산화해 이번 위기를 넘어서자고 한다. 정부도 이를 위해 연구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이다. 물론 소재·부품 국산화는 옳은 방향일 수 있다. 그러나 핵심 소재와 부품 개발은 단기간에 가능하지 않다. 글로벌 공급 체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모든 소재·부품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당장 핵심 소재 공급 업체를 변경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다. 더구나 한·일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일본은 수출 절차 강화 품목을 늘릴 수도 있다. 안 그래도 한국 제조업의 영업이익률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비생산적인 부문의 투자나 과거에는 불필요했던 비용 지출이 늘어나게 되면, 한국 기업의 수익성 저하, 핵심 경쟁력 부문의 투자 여력 저하, 글로벌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외교 관계 단절로 인해 이 같은 상황에 놓인 것이 안타깝다”며 “지금은 정치·외교적으로 한·일 간 경제 협력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정미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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