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키아의 휴대전화 사업 부문 매각은 핀란드인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핀란드 최대 민간경제연구소인 핀란드경제연구소(ETLA)의 페트리 루비넨 연구이사는 와이어드와의 인터뷰에서 “매각이 발표된 그날 아침 핀란드의 분위기는 ‘우리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우리가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희망적인 것은 핀란드가 노키아의 몰락에서 중요한 교훈들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핀란드는 노키아의 폐허 위에서 벤처 창업 붐이 일면서 노키아의 공백을 메워나가고 있다.

“핀란드는 전통적으로 소수 대기업이 국가 경제를 지배하는 구조다. 노키아뿐 아니라 목재·제지 분야에도 대기업들이 많다. 그 가운데 노키아는 정점에 있었다. 핀란드는 인구 대비 대기업 수가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다. 한국과 사정이 비슷하다.” 창업 콘퍼런스 운영 비영리단체인 ‘슬러시(SLUSH)’의 미키 쿠시(Kuusi) 수석 운영위원이 말했다. 이 단체는 매년 11월 헬싱키에서 ‘슬러시’란 이름의 세계 창업 콘퍼런스를 개최하는데, 노키아를 그만둔 기술자들이 5년 전에 만들었다.

그는 “5년 전만 해도 핀란드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대학생들이라면 예외 없이 노키아, 맥킨지, 런던의 투자은행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했고, 창업은 이상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면서 “최근 슬러시의 참가자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은 젊은이들의 생각이 바뀌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노키아에 의존하던 핀란드

핀란드의 창업 지원 기구인 혁신기술청(TEKES)의 야네 페라요키 스타트업 담당 국장은 정부 입장에서도 노키아라는 거대한 존재가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인재가 너무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이 전체적인 경제 발전에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노키아는 1998년부터 2007년까지 10년간 핀란드 전체 법인세의 23%, 수출의 20% 가까이 차지했을 만큼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헬싱키 근교 에스푸(Espoo)에 위치한 노키아 본사에 가기 위해 택시기사에게 “노키아 본사로 가자”고 했더니 “아 노키아의 집(Nokia House) 말이죠?”라고 했다. 노키아는 핀란드인에게 집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사실 노키아의 역사는 핀란드보다 길다. 핀란드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게 1917년인데, 노키아는 1865년에 설립됐다.

핀란드는 잃어버린 이 집을 찾아야 할까? 수퍼셀의 일카 파나넨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이렇게 말했다. “핀란드가 노키아를 되찾아야 할까? 핀란드 국민이나 정부가 그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하나의 기업 노키아가 맡았던 일을 지금은 훨씬 많은 회사가 나눠서 맡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최근 핀란드에선 예년보다 훨씬 많은 벤처기업이 창업하면서 노키아 없는 핀란드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는 것처럼 보인다. 노키아의 몰락이 그동안 외부 환경 변화에 대해 눈감고 싶었던 핀란드 경제에 강력한 자명종 역할을 한 것이다.

파나넨 CEO는 “노키아가 무너진 것이 장기적으로는 핀란드 경제에 도움이 되는 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키아가 무너지면서 전체 산업, 특히 정보기술(IT) 산업 분야에선 생존에 대한 절박함과 위기의식이 강해졌고, 그런 분위기가 국내 기업의 신진대사(新陳代謝)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수퍼셀이라는 회사 이름과 조직 구성은 노키아 같은 실패를 겪지 말자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수퍼셀이라는 이름엔 세포(cell) 조직처럼 작은 조직이 모여 강력한 회사를 만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실제 조직도 5~6명이 한 개 셀(팀)을 이뤄 별도 모바일 게임을 개발해 상업화까지 책임지는 구조다. 그는 “혁신의 상징이었던 노키아가 너무 거대해지면서 조직이 관료주의적으로 바뀌고 경직됐고, 그 때문에 노키아 내부에 있었던 수많은 인재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면서 “어떻게 하면 그런 것을 막으면서 최고의 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결과가 지금의 회사 조직”이라고 말했다.

‘슬러시’의 미키 쿠시 운영위원은 “핀란드는 원래 IT 창업을 선호하는 분위기와 정반대”였다면서 “노키아의 몰락이 핀란드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한때 혁신의 상징이었던 노키아의 기업 문화는 노키아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관료적이고 안정 지향적인 문화로 바뀌어 갔다. 핀란드 젊은이들의 입사 1순위가 노키아였던 것은 이 회사에 들어가 혁신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많은 월급을 받고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혁신과 모험을 통해 휴대전화 시장을 평정했던 노키아는 가장 모험을 싫어하는 기업으로 바뀌어갔다.


노키아의 유산인 벤처 붐

노키아의 쇠락은 핀란드 사회에 새로운 각성을 가져왔다. 2011년 봄 노키아의 CEO 스티븐 엘롭의 “우리는 불타는 플랫폼 위에 서 있다”는 발언이 핀란드 사회에 충격을 던졌고, 그해에 벤처기업 로비오의 ‘앵그리버드’라는 모바일 게임이 세계적으로 히트했다.

노키아가 고용을 창출하기는커녕 고용 줄이기에 이르자 핀란드 정부는 다양한 창업 지원 프로그램으로 대응했다. 핀란드 혁신기술청의 2013년 예산은 8000억원. 이 가운데 벤처기업 투자액은 2000억원으로 지난 10년 사이 세 배가 늘었다. 올해 투자 대상 벤처기업은 600여 곳에 이른다. 야네 페라요키 국장은 “민간 벤처캐피털 회사들이 손대기 어려운 리스크 큰 혁신 프로젝트를 골라 심사한 뒤 초기 단계부터 지원한다”면서 “단기적인 투자 회수가 아니라 기업 생태계 형성을 통해 국가 경제의 균형 잡힌 성장을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노키아 고위 임원 출신인 페카 소이니 혁신기술청장은 “노키아 출신 인재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해 IT 산업을 활성화하느냐가 당면 과제”라고 강조했다. 현재 노키아를 떠난 인력이 주축이 돼 시작한 벤처기업만 400여 곳에 이른다.

그러나 노키아가 핀란드에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자신감이다. 쿠시 슬러시 운영위원은 “노키아가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40%를 점유했었다는 것은 핀란드인에게 ‘우리도 글로벌 시장을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줬다”고 말했다. 또 “과거와는 야망의 수준이 다르다. 모바일 게임이나 다른 IT 분야에서 제2의 노키아가 나오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슬러시는 핀란드의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쯤 녹은 눈을 의미한다”면서 “캘리포니아의 쾌청한 여름이 아니라 춥고 질척거리는 11월의 헬싱키에서도 얼마든지 뜨거운 벤처 열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에 대한 코멘트를 부탁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삼성전자는 노키아처럼 혁신 능력을 잃어버린 회사는 아니다. 여전히 잘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뭘 원하는지 잘 파악하고 있고, 혁신의 주도권을 놓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의 인재들이 삼성전자로만 몰리지 않고 골고루 퍼져서 뛰어난 스타트업이 더 많이 만들어지는 게 보다 바람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