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갈리폴리 전투를 그린 ‘The Landing at Anzac’.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주축으로 한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갈리폴리에 상륙하고 있다. ② 오스만 군. ③ 다르다넬스 해협 인근에 집결한 연합군 함대. <사진 : 위키피디아, http://www.history.com>
① 갈리폴리 전투를 그린 ‘The Landing at Anzac’.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주축으로 한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갈리폴리에 상륙하고 있다. ② 오스만 군. ③ 다르다넬스 해협 인근에 집결한 연합군 함대. <사진 : 위키피디아, http://www.history.com>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것이 제1차세계대전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나라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속속 참전하면서 순식간에 판을 키워갔다. 그렇게 참가한 국가 중에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요충지에 위치한 오스만제국(이하 오스만)도 있었다.

처음에 오스만은 방관자적인 입장이었지만 독일이 전후 처리 과정에서 상당한 이익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자 1914년 11월 1일, 전격적으로 동맹국에 가담했다. 즉각 동원령을 내리고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했다. 이로써 영국, 프랑스와 러시아를 연결하는 통로는 북해만 남게 됐다.

그러자 당시 영국의 해군 장관이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이스탄불 점령 계획을 수립했다. 제한적인 작전이기는 했지만 오스만의 심장을 곧바로 강타해 동맹국의 전열을 깨뜨리는 것이 목적이었고 곧바로 내각의 승인을 받았다. 그런데 이스탄불로 가려면 반드시 좁디좁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해야 했다.

문제는 이 해협을 내려다보는 갈리폴리의 고지에 오스만의 강력한 요새들이 축성돼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이라면 공격 병력이 헬기를 이용해 강습하겠지만 당시에는 인근 해안에 상륙한 후 올라가야 했다. 해안에 병력을 상륙시키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으나 수직에 가까운 절벽 위의 적 진지까지 다가가기는 매우 어려웠다.


최고라는 자만이 부른 비극

당연히 상륙해서 거점을 장악할 육군과 뒤에서 화력을 지원할 해군의 유기적인 협조가 필요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처칠은 처음부터 육군의 참여를 무시했다. 그는 세계 최강인 영국 해군의 화력만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만용을 부렸다. 마치 아프리카 식민지 개척 시절처럼 함포 몇 방만 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 자만한 것이다.

전함 퀸엘리자베스를 비롯해 순양함급 이상의 거함만도 무려 20여 척이 넘는 연합군 함대가 명령을 받고 갈리폴리 인근에 속속 모여들었다. 그리고 1915년 2월 17일, 대대적인 포격을 시작으로 피의 격전으로 유명한 ‘갈리폴리 전투’의 막이 올랐다. 포탄이 고지 위의 목표에 속속 작렬하자 처칠의 장담대로 모든 것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스만은 연합군 함대가 해안포 사정권에 진입하자 곧바로 반격을 개시했다. 결국 쉴 새 없이 포탄이 바다와 고지 위를 오고갔다. 연합군 함대는 해안 포대와 마치 함대함 포격전 같은 방식으로 대결을 벌였다. 그런데 해안 포대는 파괴돼도 복구할 여지가 있지만 전함은 침몰하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일주일간의 포격전 끝에 양측의 손실은 커져갔지만 상대적으로 상황이 더 나빴던 연합군 함대는 어쩔 수 없이 사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이후 전력을 추슬러 3월 18일 재차 공세에 나섰으나 5척의 군함이 격침 또는 대파되는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만용을 부렸던 처칠은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때서야 연합군은 육군을 상륙시켜 오스만군을 제압하도록 조치했다. 하지만 바다에서 화력을 지원할 해군과 진지를 점령하기 위해 돌격할 육군 사이에 정확한 작전 개시 시간도 합의하지 못했을 만큼 어이없는 행태는 여전히 계속됐다. 이렇게 연합군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오스만군은 방어선을 강화했다.

장장 8개월간 전투가 이어졌지만 연합군은 25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결국 뒤로 돌아 철수해야 했다. 당시 연합군 육군의 주력은 영연방군의 일환으로 지구 반대편에서 달려온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병사들이었다. 그래서 갈리폴리 전투는 현재까지도 이들 국가들에는 건국 이후 겪은 최악의 참사로 남아있다.

영국은 세계 최강의 해군을 보유했다는 만용으로 모든 것을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쓰디쓴 실패를 맛보고 나서야 육군의 도움을 받기로 했지만 예전의 잘못을 반성하거나 개선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사자는 한 마리의 노루를 잡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은 그런 평범한 진리를 망각했던 것이다.


소니의 ‘4K OLED TV’. 소니는 아날로그 시대에 최고의 제품으로 평가받던 ‘트리니트론 TV’에 안주하다 차세대 디스플레이 시장에 뒤늦게 참여했고, 이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사진 : 소니>
소니의 ‘4K OLED TV’. 소니는 아날로그 시대에 최고의 제품으로 평가받던 ‘트리니트론 TV’에 안주하다 차세대 디스플레이 시장에 뒤늦게 참여했고, 이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사진 : 소니>

디지털 흐름 읽지 못한 ‘소니’

소니는 아날로그 가전 시대의 절대 강자였다. ‘워크맨’을 비롯한 많은 히트 제품을 만들었는데 1968년부터 생산한 브라운관 TV ‘트리니트론’도 그중 하나였다. 트리니트론 TV는 선명한 화면과 자연에 가까운 색을 재현하는 성능을 자랑하며 소니를 TV 시장 세계 1위 자리에 올려놨다.

국내 가전 업체들이 소니로부터 관련 기술과 부품을 도입하려고 했지만 당시 소니는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했던 거인이 ‘어느 날 갑자기’라는 표현처럼 급격히 몰락했다. 트리니트론에 집착하다 액정디스플레이(LCD)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시장이 급격히 재편되는 시대 흐름에 동참하지 못했던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너무 늦었다. 비단 TV뿐 아니라 많은 사업 분야에서 동시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2012년 소니는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기업신용등급을 ‘투자부적격’으로 강등했을 만큼 몰락했다.

해군만으로 끝낼 수 있다던 처칠처럼 최고라는 자부심이 자만심으로 변질되면서 얻은 대가였다. 그러던 소니가 지난해 프리미엄 TV 시장에서 1위를 탈환하며 부활하고 있다. 그 요인 중 하나가 바로 트리니트론 TV 시절 한참 밑으로 보던 국내 기업으로부터 전량 공급받고 있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덕분이다. 만용으로 자초한 어려움을 극복하기는 이처럼 멀고도 험난한 것이다.


▒ 남도현
럭키금성상사 근무, 현 DHT에이전스 대표, 군사칼럼니스트, ‘무기의 탄생’ ‘발칙한 세계사’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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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폴리 전투 제1차세계대전 중 연합군이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던 터키를 통과해 러시아와 연락을 취하려고 갈리폴리 반도 상륙을 감행한 전투다. 갈리폴리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바라보는 터키 영토 안에 있는 항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