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한 화장품 판매점에 중국 핀테크 기업인 앤트파이낸셜의 알리페이로 결제가 가능하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사진 : 블룸버그>
홍콩의 한 화장품 판매점에 중국 핀테크 기업인 앤트파이낸셜의 알리페이로 결제가 가능하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사진 : 블룸버그>

“세상에는 은행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은행 서비스가 필요한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20년 전에 했던 말이 현실이 되고 있다. 아톰뱅크(Atom bank)는 전 세계 금융 중심지인 영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은행이다. 미국의 경제 매체인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지난 10월 아톰뱅크의 예금 보유고가 9억파운드(약 1조3000억원)를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아톰뱅크가 예금 계좌 서비스를 시작한 건 2016년 7월로, 불과 1년 3개월 만에 예금 보유고 10억파운드(약 1조4600억원)를 코앞에 둔 것이다.


모바일 금융 돌풍 일으킨 英 아톰뱅크

아톰뱅크의 성장세는 올해 들어 더 가팔라졌다. 아톰뱅크는 올해 3월에만 1만7000명의 고객으로부터 5억3800만파운드(약 7900억원)의 예금을 확보했다고 발표했는데, 그 이후에 4억파운드(약 5800억원)의 예금을 더 모은 셈이다.

아톰뱅크는 은행으로 불리지만 다른 은행들과 달리 지점이 없다. 아톰뱅크의 성장 비결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혁신에 있다. 오로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으로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다. 은행이 만든 앱보다 훨씬 간편하고 빠르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에 출생한 세대)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국내에서 열풍을 일으켰던 카카오뱅크가 벤치마킹한 모델이 바로 아톰뱅크다. 아톰뱅크 창업자인 앤서니 톰슨(Anthony Thomson)은 “우리는 영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챌린저 뱅크”라며 “솔직히 우리도 모바일뱅킹이 이렇게 빨리 은행 산업에서 우위를 점하게 될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톰뱅크처럼 오프라인 지점 없이 모바일이나 인터넷만으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은행을 ‘네오뱅크(neobanks)’라고 부른다. 네오뱅크의 등장은 스마트폰의 보급과 디지털 기술의 발전 덕분에 가능했다. 네오뱅크나 핀테크 기업이 활용하는 대표적인 디지털 기술로는 △블록체인 및 분산원장 기술 △무선통신 기술 및 사물인터넷(IoT) △바이오 인증 △빅데이터 및 인공지능 △클라우드 컴퓨팅 등이 있다.

블록체인 및 분산원장 기술은 비트코인, 이더리움 같은 암호화폐의 기반 기술인 동시에 금융 거래 정보를 빠르고 손쉽게 전달할 수 있는 핵심 기술이기도 하다. 독일증권거래소(DB), 싱가포르증권거래소(SGX) 등이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거래 시스템 개발에 나서는 등 금융 업계에서는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보고 있다.

무선통신 기술 및 사물인터넷은 모바일 간편결제나 간편송금 같은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고, 바이오 인증은 비밀번호 같은 기존 인증수단에 비해 편리하고 안전해 ATM, 인터넷뱅킹 등 비대면 금융 거래 인증에 폭넓게 쓰이고 있다. 특히 바이오 인증은 일본 금융 회사들이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오가키교리츠 등 일부 은행에서는 고객의 손바닥과 손가락 정맥 정보를 저장해 거래에 활용하고 있다. 일본 대형 금융 회사의 바이오 인증 채택 비율은 80%에 달한다. 빅데이터 및 인공지능 기술은 로보어드바이저 같은 자산 관리 서비스에 활용되는데, 수수료를 낮추고 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마크 카니 영란은행(BOE) 총재가 런던에서 열린 핀테크 콘퍼런스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마크 카니 영란은행(BOE) 총재가 런던에서 열린 핀테크 콘퍼런스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은행의 경쟁자는 알리바바, 아마존

시티그룹은 지난해 ‘디지털 파괴(Digital Disruption)’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놨다. 시티그룹의 이 보고서는 은행 산업이 ‘우버 모멘트’에 직면해 있다고 경고했다. 우버 모멘트는 차량 공유 업체인 우버가 기존 택시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처럼 새로운 기술이나 기업이 특정 산업의 생태계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시티그룹이 분석한 은행 산업의 우버 모멘트는 디지털 혁신으로 무장한 핀테크 기업들이다. 네오뱅크, 핀테크 등 은행 산업에 뛰어든 새로운 기업들을 부르는 용어는 다양하지만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고객에게 더 빠르고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은 다를 게 없다. 시티그룹은 보고서에서 “핀테크 기업의 디지털 비즈니스가 지급 결제, 대출, 자산관리 같은 분야로 점차 확대될 것”이라며 “기존 은행들의 성장 동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기존 은행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이미 현실이 됐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맥킨지에 따르면, 전 세계 은행업의 평균 자기자본이익률(ROE)은 2014년 9.6%에서 2016년 8.6%로 1%포인트 낮아졌다. 이런 경향은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같은 기간 영국은행의 ROE는 3.8%에서 1.6%로 낮아졌고, 유럽 전체 은행의 ROE는 4.2%에서 3.7%로 낮아졌다. 핀테크 혁신을 선도하고 있는 중국의 경우 은행 ROE가 18.1%에서 14.2%로 뚝 떨어졌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전 세계 은행업의 연평균 매출 증가율은 6%였는데, 2016년 들어서는 3%로 반 토막이 났다. 금융 업계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전 세계 은행 산업에 큰 충격을 줬다고 분석하지만 전통적인 은행들의 진짜 ‘위기’는 2008년이 아니라 ‘지금’일 수 있다.

디지털 혁신이 은행 산업에 더 큰 위협인 이유는 경쟁의 판도 자체가 바뀌기 때문이다. 맥킨지는 핀테크 기업 너머에 있는 플랫폼 기업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알리바바, 아마존, 텐센트처럼 플랫폼을 장악한 인터넷 기업들은 블록체인, 무선통신 기술, 빅데이터 같은 디지털 기술의 개발과 활용에서 은행들보다 몇 걸음은 앞서 있다.

알리바바나 아마존은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다양한 산업의 가치사슬을 연결하는 생태계를 만들고 있다. 일단 고객이 자신들의 플랫폼에 들어오면 물건을 사고, 금융 거래를 하고, 건강에 대한 정보를 얻는 모든 과정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예컨대 일본의 전자상거래 업체인 라쿠텐(樂天)은 신용카드 발급, 증권 중개업, 대출 서비스 같은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라쿠텐의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하는 고객의 구매 정보 등이 빅데이터 형식으로 정리돼 있기 때문에 다른 금융 회사보다 더 개인화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라쿠텐은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까지 선보이며 고객을 라쿠텐 생태계에 가두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알리바바의 자회사인 앤트파이낸셜은 이미 중국을 넘어 세계 최대 핀테크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비금융 회사가 은행 산업에 진입하면서 기존에 은행이 도맡아 했던 여러 금융 서비스가 기능별로 분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예전에는 고객이 은행에 돈을 맡기면 그 은행에서 예금, 대출, 송금, 투자자문 같은 서비스를 한꺼번에 받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은행에 예금만 맡기고, 대출은 P2P 업체, 국내 송금은 모바일 은행, 투자자문은 로보어드바이저 회사, 국제 송금은 핀테크 기업을 이용하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PwC가 지난해 46개국의 금융 회사 최고경영자를 상대로 한 조사에 따르면, 핀테크의 급성장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이는 금융 서비스는 ‘지급 및 송금’이었다. 응답자의 23%는 5년 안에 어떻게든 핀테크 기업이 자신들을 위협할 것으로 봤다. 한국은행은 올해 초 발간한 ‘디지털 혁신과 금융서비스의 미래’ 보고서에서 “혁신적인 플랫폼 기업의 등장으로 금융 서비스가 분화되면 은행들은 더 이상 규모의 경제를 누릴 수 없게 된다”며 “고객 정보에 대한 은행의 접근성이 약화되고 예대 마진이나 지급 결제 관련 수수료 같은 전통적인 수익원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핀테크 기업과 협력해야

은행들에는 선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맥킨지는 은행들이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새로운 경쟁자들과 싸울 것인지, 손을 잡을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은행이 광범위한 고객 기반을 가지고 있고, 아직까지 많은 사람이 새로운 핀테크 기업보다는 은행에 돈을 맡기는 걸 선호한다고 해서 손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유령 계좌 스캔들로 경영진이 교체되는 등 홍역을 치른 미국의 웰스파고(Wells Fargo)가 핀테크 기업과의 협력을 택한 대표적인 경우다. 웰스파고는 지난 8월 온라인 대출 영업을 확대하기 위해 블렌드 랩스(Blend Labs)라는 핀테크 기업과 제휴했다. 블렌드 랩스는 모기지 대출 신청 시 소득신고서와 은행 계좌 정보 등을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작성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다. 미국의 기존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면 보통 6주 정도가 걸리는데, 퀴큰론즈(Quicken Loans) 같은 핀테크 기업은 이 기간을 4~5일로 단축했다. 덕분에 퀴큰론즈는 미국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시장에서 4.5%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3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미국 모기지 시장 1위인 웰스파고는 퀴큰론즈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다른 핀테크 기업과 손을 잡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은행이 단독으로 이런 변화에 대응하기보다는 핀테크 기업과의 협력을 모색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보고 있다. 그레그 박스터(Greg Baxter) 시티그룹 디지털전략최고책임자는 “기존 은행은 민첩성, 속도, 창조성, 기술력, 기업가 정신을 원하고 있고 핀테크 기업들은 고객 기반, 자본, 유동성, 영업망, 규제 전문성, 리스크 관리, 신뢰성 등을 원하고 있다”며 “서로가 할 수 있는 게 전혀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능력을 원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PwC 조사에서 글로벌 금융 회사의 82%가 “3~5년 안에 핀테크 기업과의 제휴를 확대하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동시에 은행들은 디지털 혁신을 위한 자발적인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데이터 기반 마케팅을 준비하고, 로봇을 활용한 자동화 공정을 은행 업무에 접목하고, 클라우드 기술을 활용해 모바일 앱의 인터페이스를 개선해야 한다. 맥킨지는 “적극적인 파트너십을 활용해 변화하는 생태계에 어울리는 새로운 전술을 세울 수 있는 은행만이 수익성을 개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Plus Point

글로벌 핀테크 혁신 전쟁
세계 100대 핀테크 기업 중 한국은 한 곳 뿐

이종현 기자

이승건 비바리퍼블리카 대표. <사진 : 조선일보 DB>
이승건 비바리퍼블리카 대표. <사진 : 조선일보 DB>

오랫동안 전 세계 금융 중심지의 자리를 놓고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이 경쟁을 벌여왔다. 월스트리트로 대표되는 뉴욕이 금융 투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면, 런던은 전 세계 외환 거래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런데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핀테크 기업이 등장하면서 이런 전통적인 금융 중심지들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글로벌 회계·컨설팅 기업인 KPMG인터내셔널과 핀테크 벤처투자 업체인 H2벤처스는 매년 전 세계 핀테크 기업들의 순위를 매겨서 100위까지 발표하고 있다. 올해 순위는 지난달 발표했는데, 1위부터 3위까지를 모두 중국 기업이 차지했다. 1위는 알리바바의 자회사인 앤트파이낸셜이었고, 2위는 종안 보험(衆安)이었다. 종안보험은 알리바바와 텐센트가 손을 잡고 세운 핀테크 기업으로 앤트파이낸셜이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3위는 학생 소액 대출을 바탕으로 사업을 키운 취뎬(趣店)이 차지했다. 올해 상반기에 10억위안(약 1650억원)에 가까운 순이익을 올리며 지난 10월 미국 나스닥시장에 상장하기도 했다. 취뎬 역시 앤트파이낸셜로부터 거액을 투자받았다.


세계 10대 핀테크 기업 절반이 중국

이외에도 중국 최대 P2P 대출 플랫폼인 루진숴(陸金所)가 6위, 중국 2위 전자상거래 업체인 징동닷컴의 금융 사업부에서 분사한 JD파이낸스가 9위에 이름을 올렸다. 전 세계 10대 핀테크 기업에 중국 기업만 5개가 선정된 것이다. 미국이 3개로 뒤를 이었고, 영국과 독일 핀테크 업체도 각각 하나씩 1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반면 한국 핀테크 기업 중에서는 비바리퍼블리카 단 한 곳만 100대 기업에 뽑혔다. 비바리퍼블리카는 간편송금 앱인 ‘토스’를 운영하는 기업으로 35위에 선정됐다. 올해 처음 순위권에 이름을 올리며 상승세를 증명하고 있다. 지난달 말 기준으로 토스 가입자는 640만 명, 누적 송금액은 10조원을 넘어섰다. 비바리퍼블리카는 동남아시아 등 해외 시장 공략도 계획 중이다.

하지만 비바리퍼블리카를 제외하면 한국에는 이렇다 할 핀테크 기업이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정부 차원에서 핀테크 기업의 성장을 돕기 위해 각종 규제를 정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성과는 미미한 편이다. 핀테크 기업이 성장하려면 기존 은행들과의 협력이 어느정도 필요한데 한국의 금융 업계는 폐쇄적인 분위기 탓에 이런 협력이 쉽지 않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PwC의 조사에서 국내 금융 회사 중 핀테크 기업과 제휴했다고 답한 경우는 14%에 불과했다. 독일(70%), 싱가포르(62%) 같은 국가들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준이고, 전 세계 평균인 45%보다도 한참 낮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기존 금융 회사들이 핀테크 혁신을 위기로만 간주하지 말고 기존 서비스를 개선하고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야 한다”며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전략보다는 핀테크 기업과 협력, 공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