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바르 캄프라드 이케아 창업자. <사진 : 이케아>
잉바르 캄프라드 이케아 창업자. <사진 : 이케아>

‘세계 가구의 황제’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91) 이케아(IKEA) 창업주가 1월 27일(현지시각) 별세했다.

이케아는 1월 29일 성명을 통해 “20세기 가장 위대한 기업가 가운데 한 명인 잉바르 캄프라드 이케아 창업주가 스웨덴 스몰란드 자택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스테판 뢰벤 스웨덴 총리는 “그는 많은 업적을 남긴 독특한 인물”이라고 했고 마고 월스트롬 스웨덴 외무장관은 “스웨덴을 세계에 알린 위대한 기업가”라고 추모했다.

1926년 스웨덴 남부 스몰란드에서 태어난 캄프라드는 1943년 맨손으로 이케아를 창업한 뒤 세계 최대 가구 회사로 키운 입지전적 인물이다.


17세에 이케아 설립… 가구의 개념 바꿔

독일 이민자 출신으로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표도르 캄프라드와 어머니 베르타 닐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부터 스톡홀름에서 대량으로 산 성냥을 마을 사람들에게 쪼개 판 ‘성냥팔이 소년’이었다. 이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씨앗·연필· 볼펜 등을 팔아 용돈을 벌었고 열한 살쯤 자전거와 타자기를 스스로 번 돈으로 샀다고 회고했다.

열일곱 살이 되던 1943년 이케아를 설립하고 연필·지갑·스타킹·우편엽서 등을 팔기 시작했고 1948년 가구 사업에 진출했다. 이케아란 이름은 본인 이름(잉바르)의 I, 성(캄프라드)의 K, 그가 자란 스웨덴 남부의 가족 농장 엘름타뤼드(Elmtaryd)의 E, 농장이 있는 지역 아군나뤼드(Agunnaryd)의 A를 각각 따서 지었다.

1952년 소비자가 직접 조립하는 책상인 ‘맥스(MAX)’를 처음으로 출시했고 1958년 암홀트에 첫 매장을 열었다. 이케아의 ‘플랫 팩(납작한 상자에 부품을 넣어서 파는 자가 조립용 가구)’은 물류 비용을 혁신적으로 절감했고 현대적인 디자인과 저렴한 가격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한 고객이 산 테이블이 자동차 뒷좌석에 들어가지 않자 직원이 테이블 다리를 분리하는 것을 보고 조립형 가구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이케아는 1970년대 스위스·캐나다, 1980년대 미국, 1990년대 동유럽, 2000년대 러시아와 중국에 매장을 여는 등 영역을 급속히 확장, 세계 49개국에 403개 매장을 운영하는 세계 최대 가구 회사로 성장했다. 작년 매장 방문객이 9억3600만명, 매출이 476억달러에 달한다.

영국의 ‘가디언’은 “이케아는 맥도널드와 함께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계급과 문화, 지역 장벽을 초월해 다수에게 사랑받는 기업”이라고 보도했다.

그는 ‘포브스’ 선정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서 두 번이나 4위에 올랐지만 ‘스크루지 아저씨’ ‘수전노(The Miser)’라 불릴 만큼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낡은 볼보를 직접 몰았으며, 해외 출장 땐 이코노미석을 이용하고 옷은 벼룩시장에서 샀다. 고급 정장 대신 농부를 연상하게 하는 옷을 입었다. 레스토랑이 제공하는 후추와 소금을 집으로 가져오고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채소 가게가 문을 닫기 직전 매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2016년 스웨덴 방송 인터뷰에서 “지금 입고 있는 옷 중 벼룩시장에서 사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케아의 성공은 근면·검소함 덕분”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이는 이케아의 기업 문화를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이케아 임원들은 출장 때 저가 항공과 값싼 호텔을 이용하고 직원들이 이면지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76년 사내 팸플릿에 ‘자원 낭비는 도덕적인 죄악’이라고 명시했다.

가난한 성냥팔이 소년에서 세계적인 가구 왕국을 건설한 억만장자가 됐지만 평생 수많은 의혹과 논란에 시달렸다. 불매 운동, 친나치 활동, 탈세 의혹에 시달렸고 알코올 중독으로 평생 고생했다. 스스로 “나만큼 많은 시련과 재앙을 겪은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회고했을 정도다.

1950년대 이후 이케아는 ‘스웨덴의 왕따 기업’이었다. 스웨덴 가구 조합이 이케아의 대량 염가 판매 방식에 반발, 불매 운동을 전개했고 스웨덴 가구 박람회 참여도 금지당했다. 이케아는 결국 생산 시설을 폴란드로 옮겼고 캄프라드는 당시 실의와 좌절 때문에 알코올 중독에 빠져들었다. 그는 2014년에야 “1년에 3주간 금주하는 방식으로 알코올 중독을 다스리고 있다. 완치됐다”고 밝혔다.


이케아의 스웨덴 본사 사무실. <사진 : 이케아>
이케아의 스웨덴 본사 사무실. <사진 : 이케아>

나치 활동, 탈세 등 구설수에 오르기도

탈세 의혹도 평생 그를 따라 다녔다. 1973년 스웨덴의 ‘부자세’를 피해 가족과 함께 덴마크로 이주했고 1976년 스위스 로잔으로 다시 이주한 뒤 40년 가까이 살았다. 부인이 사망한 지 3년 뒤인 2014년 스웨덴에 귀국했다. 1982년 이케아 경영권을 네덜란드 자선 재단으로 이전하고 개인 재산이 없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복잡한 지배 구조를 통해 10억유로를 탈세했다는 의혹으로 EU 조사를 받기도 했다.

수도승을 연상시킬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것도 사실은 탈세 의혹을 피하고 이케아 직원들에게 근면·절약을 강요하려는 ‘계산된 행동’이란 비판도 받았다.

그가 제네바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빌라를 가지고 있고 스웨덴 곳곳에 방대한 부동산과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역에 와이너리를 가지고 있다는 추적 보도가 잇따랐다. 낡은 볼보도 가지고 있지만 최고급 승용차인 포르셰도 가지고 있다는 비아냥거림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진실로 겸손하고 소박한 생활을 했다”고 옹호하는 지인도 많다.

1994년에는 1940년대 유럽 내 파시스트 정당을 지지한 극우단체 ‘새 스웨덴 운동(New Swedish Movement)’에서 활동한 전력이 언론의 추적 보도로 밝혀지기도 했다.

캄프라드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내 인생 최대의 실수이자 가장 어리석은 짓이었다”는 편지를 공개했다. 이 때문에 2001년 이스라엘에 이케아 매장을 열 당시 거센 불매 운동에 직면하기도 했다.

깡마른 체격, 검은 테 안경, 꽉 다문 입술 등 완고한 노인 이미지로 ‘독재자’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수줍은 성격 때문에 공개 활동보다는 은둔 생활을 많이 했다.

1980년대 이케아 최고경영자에서 물러난 뒤 평범한 손님 행색으로 전 세계 이케아 매장을 잠행하면서 이케아의 고객 서비스와 제품을 현장에서 점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50년 비서였던 첫 부인과 결혼해 딸 하나를 두고 1960년 이혼했으며 1963년 마레레타 스텐터트(2011년 사별)와 재혼한 후 페터, 요나스, 마티아스 등 세 아들을 뒀다. 2013년 6월 막내 아들인 마티아스에게 이케아의 지주회사인 인터 이케아 회장직을 물려주고 현업에서 물러났다.

절친이자 세계적인 패션 회사 H&M 창업자인 얼링 페르손(Erling Persson·1917~2002)과 자전거를 타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블룸버그가 추정한 그의 재산은 587억달러(세계 8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