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의 여왕으로 불리는 메리 미커 클라이너 퍼킨스(KPCB) 투자 매니저. 사진 블룸버그
인터넷의 여왕으로 불리는 메리 미커 클라이너 퍼킨스(KPCB) 투자 매니저. 사진 블룸버그

미국 벤처캐피털 클라이너 퍼킨스(KPCB)의 메리 미커 투자매니저는 ‘인터넷의 여왕’으로 불린다. 메릴린치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던 미커는 1994년 ‘모자이크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스타트업의 기업공개(IPO) 작업을 시작으로 정보기술(IT) 기업을 분석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첫 작품인 모자이크 커뮤니케이션의 지금 이름은 ‘넷스케이프’. 넷스케이프의 성공 이후 미커는 컴팩,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굵직한 IT 기업에 대한 족집게 같은 분석 보고서를 써서 이름을 알렸다.

2000년대 초반 미국의 닷컴 버블이 붕괴될 때, 많은 애널리스트가 투자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줬다는 이유로 소송당했지만, 미커는 예외였다. 그녀는 숫자와 통계를 바탕으로 객관적인 시각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닷컴버블 이후에 미커의 명성은 오히려 더 높아졌다.

미커는 1995년부터 매년 세계 인터넷 산업의 현주소와 미래를 분석한 ‘인터넷 트렌드’ 보고서를 내고 있다. 올해 보고서는 지난달 말 미국 캘리포니아주 란초 팔로스 베르데스에서 열린 ‘코드 콘퍼런스’를 통해 공개됐다. 

미커의 보고서는 구구절절 긴 말을 늘어놓지 않고, 핵심적인 그래프와 표만으로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게 특징이다. 올해 보고서도 294쪽에 달하지만, 한 번 읽는 데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을 만큼 내용이 압축적이었다. 이 가운데 꼭 알고 넘어가야 할 내용들을 다섯 개의 그래프로 정리해봤다.


포인트 1│성장 멈춘 스마트폰 시장

지난 10년 동안 IT 산업의 성장을 이끈 건 스마트폰이라는 디바이스였다. 애플의 고(故)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내놓은 2007년 이후, 스마트폰은 세계 IT 산업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놨다. 스마트폰 혁명에 뒤처진 IT 업체는 몰락의 길을 걸었고, 변화를 선도한 업체는 스마트폰을 넘어서 플랫폼까지 선점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은 옛말이다. 스마트폰 시장은 이제 포화 상태다. 미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스마트폰 신규 출하량 증가율은 0%였다. 스마트폰 시장이 제자리걸음을 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2016년에도 스마트폰 출하량은 전년 대비 2% 증가했다.

이런 흐름은 다른 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SA)는 올해 1분기 세계 스마트폰 출하량이 3억4540만 대로 전년 동기 대비 2% 감소했다고 밝혔다. 작년 4분기에 이어 두 분기 연속 스마트폰 출하량이 감소했다. SA는 “스마트폰 교체 주기가 길어지고 있고, 제조사들도 하드웨어에서 혁신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서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이 둔화됐다”고 지적했다.

스마트폰 성장 둔화는 혁신 경쟁의 장이 하드웨어에서 서비스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성전자, 애플 같은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하드웨어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기보다 음악, 결제 같은 콘텐츠와 부가 서비스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이런 이유다.

같은 맥락에서 글로벌 인터넷 이용자가 세계 인구의 절반에 육박한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미커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기준으로 세계 인터넷 이용자는 36억 명에 달했다. 세계 인구의 49%가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비율이 2009년엔 24%였다. 미커는 인터넷 이용자가 빠르게 늘었지만 앞으로는 증가 속도가 눈에 띄게 둔화될 것으로 봤다. 이렇게 되면 인터넷 업계에서 경쟁의 축이 새로운 이용자를 찾는 것에서 기존 이용자의 충성도를 높이고 더 많은 시간을 쓰게 하는 쪽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포인트 2│‘짧은 영상’ 전성시대

2016년 3월 기준으로 중국 모바일 이용자들이 하루에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쓴 시간은 20억 시간이었다. 이 가운데 60%를 ‘소셜 네트워킹’이 차지했고, ‘동영상 감상’과 ‘게임’이 각각 13%로 뒤를 이었다.

2년이 지난 올 3월에는 어땠을까. 중국 모바일 이용자의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이용 시간은 32억 시간으로 급증했다. 모바일 서비스가 중국인의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었다는 이야기다. 중국인이 가장 애용하는 모바일 서비스는 여전히 소셜 네트워킹이었다. 하지만 이용 비율은 47%로 크게 줄었다. 대신 동영상 감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22%로 증가했다. 이용 시간으로 환산하면 2016년 3월에는 하루에 2억6000만 시간을 동영상 감상에 썼는데, 올해 3월에는 7억400만 시간으로 세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중국의 모바일 데이터 사용량은 2015년 이후 매년 100% 이상 증가하고 있다. 모바일로 동영상을 보는 이용자가 늘어나면서 데이터 사용량도 덩달아 증가한 것이다.

미커 보고서는 다양한 동영상 콘텐츠 중에서도 재생 시간이 짧은 동영상(Short-Form Video)이 각광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대표적인 게 중국의 동영상 공유 서비스인 더우인(抖音)과 콰이쇼우(快手)다. 재생 시간이 5분 이하인 짧은 동영상을 공유할 수 있는 콰이쇼우는 일간 이용자 수(DAU)가 1억400만 명에 달하고, 후발 주자인 더우인도 DAU가 9500만 명에 이른다. 시장조사 업체인 아이리서치는 콰이쇼우, 더우인 같은 재생 시간이 짧은 동영상을 공유하는 서비스의 시장 규모가 지난해 57억3000만위안에서 2020년 356억8000만위안(약 6조원)으로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포인트 3│온라인 쇼핑의 변화

아마존은 지난 4월 구글 쇼핑 광고 계약을 해지했다. 구글 쇼핑 광고는 구글에서 무언가를 검색하면 관련 상품을 검색 결과 상단에 배치해주는 서비스다. 아마존은 2016년부터 구글 쇼핑 광고를 이용해왔는데, 이번에 전격적으로 광고 계약을 끊은 것이다. 더는 구글 같은 검색엔진에 상품 광고를 낼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이 엿보이는 결정이었다.

아마존이 보여준 자신감의 근거는 미커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의 49%는 물건을 살 때 ‘아마존’에서 검색한다고 답했다. 구글 같은 검색엔진에서 찾아본다는 사람은 36%에 그쳤다. 아마존은 최근 광고 서비스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온라인 쇼핑 플랫폼을 장악한 기세를 이어 구글, 페이스북 같은 기업이 독점하고 있는 인터넷 광고 시장까지 넘보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 15%를 놓고도 변화의 바람이 거세다. 특히나 소셜미디어가 쇼핑의 메카로 거듭나고 있다. 페이스북 이용자 중 78%는 페이스북을 상품 검색 도구로 활용한 적이 있다고 했다. 3명 중 2명이 페이스북을 쇼핑 도구로 쓴다는 말이다. 인스타그램, 핀터레스트도 이용자의 59%가 쇼핑을 위해 쓴 적이 있다고 답했고, 쇼핑과 무관해보이는 트위터도 이 비율이 34%나 됐다. 특히 소셜미디어는 실제 상품 구매로 이어지는 비율이 높다. 소셜미디어에서 상품을 검색한 적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 중 55%는 검색해본 상품을 실제 구입했다고 했다.

소셜미디어 업체들도 쇼핑을 더 편리하게 할 수 있는 서비스를 추가하며 이용자의 쇼핑 습관 변화에 발맞추고 있다. 페이스북은 ‘숍(shop)’ 기능을 추가해 페이스북을 쇼핑몰처럼 쓸 수 있게 했고, 인스타그램도 최근 국내에서 쇼핑 기능을 선보였다.

미커는 “미국 전자상거래 시장은 2016년 14%, 2017년에는 16% 성장해, 매년 성장률이 더 가팔라지고 있다”며 “전자상거래 시장은 계속 확장하고 있고,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글로벌 기업들의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고 했다.


포인트 4│긱 노동자가 뜬다

디지털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노동 환경까지 바뀌고 있다. 첨단기술 덕분에 더는 사무실에 앉아서 하루종일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자신의 생활 패턴에 맞춰 그때그때 필요한 일을 찾아서 하면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미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프리랜서 형태의 노동자는 전년 대비 8.1% 증가했다. 전체 노동자 증가율(2.5%)의 세 배가 넘는 수준이다. 우버 같은 주문형 서비스(온 디맨드) 플랫폼에서 일하는 미국 노동자 수는 2015년 240만 명에서 지난해 540만 명으로 늘었고, 올해는 680만 명까지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긱 노동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플랫폼은 차량 공유 서비스인 ‘우버’와 전자상거래 서비스인 ‘엣시’, 식품 배달 서비스 ‘도어대시’ 등이다. 우버는 300만 명의 드라이버를 확보했고, 엣시는 200만 명의 판매자를 보유하고 있다. 도어대시도 20만 명이 배달원으로 일하고 있고, 프리랜서 노동자를 연결해주는 플랫폼인 업워크에 등록된 긱 노동자만 1600만 명에 달한다.

미커는 “긱 이코노미는 유연한 근무 시간과 추가적인 수입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각광받고 있다”고 말했다.

알리바바가 투자한 중국의 신선식품 전문 매장인 ‘허마셴성(盒馬鲜生)’ 상하이점에서 손님들이 게를 고르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알리바바가 투자한 중국의 신선식품 전문 매장인 ‘허마셴성(盒馬鲜生)’ 상하이점에서 손님들이 게를 고르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포인트 5│미국과 어깨 나란히 한 중국

중국은 미국과 더불어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G2(주요 2개국)로 불린다. 하지만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5%로 유럽(22%)보다 낮다. 실제 경제 크기만 놓고 보면 G2라는 표현은 아직까지 과장이 조금 섞인 셈이다.

하지만 테크 산업에서만큼은 중국이 명실상부한 G2로 자리를 굳혔다. 미커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5월 말 기준으로 세계 20대(시가총액) IT 기업 중 9개가 중국 기업이었다. 나머지 11개는 미국 기업으로 글로벌 테크 산업은 미국과 중국 두 나라가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20대 IT 기업 중 미국과 중국 기업은 10개에 그쳤다. 특히 중국 기업은 텐센트와 바이두만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5년이 지난 지금은 알리바바, 앤트파이낸셜, 샤오미, 디디추싱, 징둥, 메이퇀뎬, 토우탸오가 중국 기업으로 20대 IT 기업에 진입했다. 

미커는 9개의 중국 IT 기업 중에서도 알리바바에 주목했다. 알리바바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유통 플랫폼의 기능만 하는 게 아니라 매달 발생하는 수십억 건의 거래 데이터를 바탕으로 고객의 쇼핑 경험을 개선하고, 최적의 구매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미커는 “온라인 마켓플레이스, 오프라인 매장 확대, 독자적인 결제 시스템, 클라우드 플랫폼 등 다양한 사업 분야에서 알리바바와 아마존이 겹치고 있다”며 “알리바바는 아마존에 비해 거래액은 많은 반면 매출액이 적은데, 앞으로 어떤 형태로 신유통을 이끌어갈지 지켜봐야 한다”고 평가했다.


Plus Point

이민자가 세운 미국 테크 산업

지난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마운틴 뷰에서 열린 구글 개발자 콘퍼런스 ‘I/O’에서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서 발표를 듣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지난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마운틴 뷰에서 열린 구글 개발자 콘퍼런스 ‘I/O’에서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서 발표를 듣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메리 미커 보고서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민자가 미국 경제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미국 상위 25개(시가총액) 테크 기업 가운데 16개가 이민 1세대나 2세대가 설립한 회사였다.

시총 1위인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시리아 이민자의 아들이고, 시총 2위인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의 아버지는 쿠바 출신이다. 구글 창업자 중 한 명인 세르게이 브린은 러시아 출신이고, 오라클 공동 창업자들도 러시아와 이란의 이민 2세대다. 이민자 출신이 세운 16개 테크 기업이 만들어낸 일자리만 170만 개에 달한다.

이민자 출신 창업자는 스타트업 업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수십억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우버, 위워크, 슬랙, 로빈후드 같은 스타트업의 창업자들도 이민자 출신이다. 

메리 미커의 보고서는 이민자 없이는 지금의 실리콘밸리와 미국 테크 산업이 불가능했다는 걸 보여준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의 비상장 기업)의 71%가 이민자를 핵심 임원으로 두고 있다며 “이민자 없이는 실리콘밸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反)이민 정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어 미국 테크 업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특히 불법체류청소년추방유예(DACA) 프로그램 폐기에 대한 반발이 거세다. 제프 베이조스, 순다르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CEO), 사티야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등이 DACA 폐기 무효화를 촉구하는 서명을 했다.

팀 쿡 애플 CEO는 트럼프 대통령의 다카 프로그램 폐지 선언 이후 참석한 한 콘퍼런스에서 “이민은 미국의 가치와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며 “애플은 세계에서 재능 있는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데려오는 공격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