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리 시게타카 후지필름 CEO 겸 회장은 “사상 최대 위기에 직면했던 당시에 사장인 내가 학교 학급 위원처럼 ‘다수결로 정합시다’라고 말하는 건 있을 수 없었다”며 “누군가가 모두를 이끌고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리더의 역할이고 리더십의 본질이다”고 말했다. 사진 블룸버그
고모리 시게타카 후지필름 CEO 겸 회장은 “사상 최대 위기에 직면했던 당시에 사장인 내가 학교 학급 위원처럼 ‘다수결로 정합시다’라고 말하는 건 있을 수 없었다”며 “누군가가 모두를 이끌고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리더의 역할이고 리더십의 본질이다”고 말했다. 사진 블룸버그

도쿄 롯폰기의 후지필름 본사에서 고모리 시게타카(古森重隆·80) CEO 겸 회장을 단독 인터뷰했다. 2000년 이후 ‘본업(사진필름 사업) 소멸’이라는 절체절명 위기에서 회사를 구한 것은 물론, 이후에도 회사를 안정적인 성장 트랙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예순넷에 CEO 겸 사장에 올라 올해로 16년째 CEO를 맡고 있다. 후지필름은 작년에 사상 최고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고모리 회장에게 “여전히 건강해 보인다, 건강 관리 비결이 있는가’라고 묻자 그는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기 때문 아닐까 싶다(웃음). 굳이 비결이라면 일을 스포츠처럼 즐기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답했다. 그는 또 “최근에 재생의료·바이오·제약 부문의 투자가 많았다”면서 “이제야 투자의 진척과 맥이 어느 정도 보이는 단계”라고 했다. 후지필름의 영업이익은 사상 최고를 기록했지만, 매출은 아직 사상 최고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 “바이오·제약 부문 투자가 일단락되고 그 열매를 거두는 시기가 오면 매출이 크게 늘어날 수도 있겠다”고 말을 건네자, 고모리 회장은 “‘올 수도 있겠다’가 아니라 반드시 올 것”이라며 “그렇게 되도록 모든 것을 계획했고 그에 따라 투자를 집행해 왔다”고 말했다.

이런 성과가 있기까지 후지필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동안 후지필름은 무엇을 했을까? 이런 성과를 내려면 어떤 리더십이 필요할까? 이 세 가지를 알려면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모리 회장에게 직접 그 이야기를 들었다.


위기는 갑자기 오지 않았다

디지털화라는 갑작스러운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었나.
“디지털화라는 위기 신호는 갑자기 닥친 게 아니다. 미래에 필름 사업이 위험해진다는 것은 1980년대 초부터 예상됐던 것이다. 후지필름의 3대 사업 분야였던 사진·인쇄·의료영상의 3대 분야에서 디지털화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진 부문에서는 은 대신 광전소자로 빛을 받아들여 영상을 만드는 기술, 즉 디지털카메라의 개발이 시작됐다. 인쇄에서는 1979년 이스라엘 기업이 컴퓨터로 제판(製版)하는 시스템을 발표했다. 의료영상에서도 X선 진단 영상의 디지털화 기술이 탄생했다.”

당시 후지필름은 어떻게 대응했나.
“1981년 후지필름이 디지털 X선 영상진단 시스템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후 1983년 상품화했는데, 이 시스템은 지금도 세계 표준이다. 당시 산업재료부의 인쇄영업 과장이었던 나는 인쇄 업계의 제판 공정이 디지털화하는 것에 충격받았다. 전에는 풀컬러 잡지의 경우 표지부터 글자·사진·그림 등을 전부 복잡한 수작업을 거쳐 만들었기 때문에 수십 장의 필름이 필요했다. 하지만 디지털화 이후로는 컴퓨터로 편집한 뒤 한 장의 필름으로 찍어내면 그만이다. 그때부터 ‘훗날 필름이 쓰이지 않게 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혼자만 위기의식을 느꼈던 걸까.
“그렇지는 않다. 경영진도 당연히 위기감을 느꼈다. 많은 논의가 진행됐고 곧 3개의 전략으로 집약됐다. 첫째는 디지털 기술 개발에 나서는 것이었다. 세계 최초의 풀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한 게 우리다. 1988년 개발한 ‘DS-1P’는 입력부터 출력까지 모두 디지털화한 최초의 카메라였다. 둘째는 아날로그 사진 기술을 극한까지 추구해 사진 사업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신규 사업 개발이었다. 당시에 사진 사업의 주변 분야에 불과했던 잉크젯과 광디스크 연구에 주력했다. 1987년에는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도네가와 스스무(利根川進) 교수와 공동으로 항암제 개발에 착수하기도 했다. 사진은 정밀화학(fine chemistry) 부문이기 때문에 제약으로 연결될 수 있다.”

신규 사업 개발의 결과는 어땠나.
“불행히도 대부분 틀어지게 됐다. 그때만 해도 사진필름이라는, 고수익이면서도 시장 점유율이 높은 핵심 사업이 아직 성장하는 단계였기 때문이었다. 필름 사업의 호황은 신규 사업 개발을 더디게 만들었다. 바로 성과가 보이는 것이 아니었고, 보인다 해도 필름 사업에 비하면 미미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잉크젯도 광디스크도 의약품 개발도 모두 중단되고 말았다.”


후지필름은 2007년 ‘아스타리프트’라는 브랜드로 화장품 사업에 진출했다. 사진 블룸버그
후지필름은 2007년 ‘아스타리프트’라는 브랜드로 화장품 사업에 진출했다. 사진 블룸버그

본업 소멸

2000년 사장(COO)에 취임했는데. 이때를 정점으로 필름사진 시장이 붕괴했다.
“2000년은 후지필름의 주력 사업인 컬러필름 등 사진감광 재료 매출이 절정일 때였다. 2001년엔 창업 이래 계속 뒤만 쫓았던 코닥의 매출을 앞지르기도 했다. 내가 입사했던 1963년에는 코닥을 따라잡는다는 게 꿈이었다. 그로부터 40년 걸려 간신히 거인을 따라잡은 것이었다. 가슴이 벅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위기는 절정의 순간에 소리 없이 찾아오는 법 아닌가. 디지털카메라가 급속히 보급되기 시작했다. 필름 시장은 2000년 이후 매년 20~30%씩 무섭게 줄어들었고, 10년 만에 10분의 1 이하로 추락했다. 컬러필름 등 사진감광 재료는 2000년 당시 후지필름 매출의 60%, 이익의 3분의 2를 차지했었는데, 4~5년 만에 적자 사업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어떤 일을 했나.
“먼저 사진 관련 사업의 구조개혁을 서둘렀다. 필름 수요가 줄면서 전 세계에 있는 생산 설비와 판매 조직이 막대한 고정비 부담으로 돌아와 경영을 압박했다. 이대로는 회사가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타사보다 앞서 기술을 개발했던 디지털카메라 사업이 어느 정도 시장 붕괴를 상쇄하긴 했으나 충분치 않았다. 곧 너도나도 디지털카메라 시장에 뛰어드는 바람에 가격 경쟁이 극심해졌다. 매년 15%씩 가격이 떨어지는 치열한 경쟁을 강요당해야 했다. 2003년 COO 겸 사장에서 CEO 겸 사장이 돼 최종 결정 권한을 갖게 된 나는 구조개혁을 단행하기로 했다.”

사업 구조개혁을 계획하면서 무엇을 먼저 떠올렸나.
“21세기에도 후지필름이라는 회사를 일류기업으로 계속 남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전 세계 7만 명이 넘는 직원과 그들 가족의 인생이 사장인 나의 두 어깨 위에 달려 있었다. 2004년 2월에 ‘비전 75’를 발표했다. 창립 75주년을 맞는 2009년까지의 중기 경영 계획이었다. 계획을 발표하면서 나는 “현재 우리 상황은 도요타에서 자동차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우리는 사진필름 수요가 급감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이 사태에 정면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필름 사업은 거대한 장치 산업이다. 당시 후지필름은 일본·미국·네덜란드 등 3곳에 대형 공장이 있었다. 대형 현상소 또한 세계 150여 곳에 있었다. 이런 규모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고정비가 들어간다. 이 상황에서 매출이 떨어지면 적자가 끝도 없이 불어난다. 따라서 수요과 균형을 이루도록 사업구조를 작게 바꿔나가야 했다.”

이후 구조조정까지 이르게 됐다.
“‘비전 75’를 발표할 때만 해도 철저히 개혁하면 구조조정은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년쯤 지나자 ‘이대로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필름 시장이 예상을 뛰어넘어 걷잡을 수 없이 축소됐다. 결국 2006년 1월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사진 분야에만 전 세계에 1만5000명의 직원이 있었다. 5000명을 감원키로 했다. 구조조정은 1년 반 동안 진행됐다. 언론은 ‘후지필름, 5000명 감원’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다뤘다. 발표 열흘 전 일본 내 경쟁사였던 코니카미놀타가 필름 사업에서 완전 철수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결국 후지필름도 끝났구나’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후지필름이 2014년 내놓은 에볼라 바이러스 치료제‘아비간’. 후지필름은 2020년까지 의약품에서만 연매출 1조엔 달성을 기대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후지필름이 2014년 내놓은 에볼라 바이러스 치료제‘아비간’. 후지필름은 2020년까지 의약품에서만 연매출 1조엔 달성을 기대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후지필름을 살린 4분면 분석법

감원과 더불어 어떤 일을 했나.
“새로운 성장 전략을 세웠다. CEO가 되기 이전부터 기술 개발 부서 최고책임자에게 후지필름이 가진 기술을 모두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진필름을 대신할 시장을 찾기 위해 사내에 어떤 기술이 있는지 전부 꺼내 놓고 분석해 본 것이다. X 축은 시장을 기존 시장과 신규 시장으로 나누고, Y 축은 기술을 기존 기술과 신규 기술로 나누면 4분면이 나온다. 그 4개 영역에 어떤 기술을 적용해 어떤 제품을 낼 수 있을지를 철저히 연구했다.”

후지필름은 4분면 분석을 통해 다음 네 가지 질문을 스스로 던졌다. ①기존 기술 가운데 기존 시장에서 우리가 적용하지 않은 것은 없는가 ②새로운 기술로 기존 시장에 적용할 것은 없는가 ③기존 기술로 새로운 시장에서 적용할 것은 없는가 ④새로운 기술로 새로운 시장에 적용할 것은 없는가였다. 이런 분석을 통해 후지필름은 충분히 활용되지 않은 숨은 자산을 찾아내는 한편, 어떻게 시장에 대응할 것이며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각 4분면에서 주력할 제품군을 선정했다(표 참조).

부족한 기술은 그 흐름에 가장 적합한 기술력을 가진 회사를 인수·합병(M&A)하는 방식을 택했다. 물론 M&A해서 부족한 기술을 메우되, 후지필름이 갖고 있는 노하우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도 면밀히 검토했다. 고모리 회장은 “본업이 계속 잘됐더라면 다른 것을 할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자동차 회사가 자동차가 잘 팔리고 판매가 늘어날 때는 자동차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자동차가 안 팔리는 상황이 오면 어떡하나. ‘자, 그럼 이제 무엇을 할까’의 문제인 거다. ‘안 해본 것이지만 지금 우리 능력과 연결되는 부문에 온 힘을 기울여 해봅시다’”라고 말했다.

어떤 결과가 나왔나.
“후지필름이 가진 기술력을 의약품, 화장품 그리고 고기능 재료로 불리는 분야에 충분히 응용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 기술로 상품을 만들수 있다, 없다’는 사업 선택의 기준이 아니었다. ‘시장에서 이길 수 있다, 없다’도 아니었다. ‘이길 수 있다’가 아니라 ‘시장에서 계속 이길 수 있는 힘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 우리의 기반과 기술력을 살린다면 가능한가, 아닌가’가 기준이었다. 각각의 기술을 평가하고 상품화 전략을 검증하고 또 검증했다. 판단이 틀리면 개혁 작업 전체의 실패와 직결되는 상황이었다.”

4분면법을 통해 어떤 사업을 도출해 냈나.
“여섯 가지였다. 디지털이미징(디지털카메라·렌즈·화상센서·화상처리기술 등), 광학디바이스(TV렌즈·감시카메라용렌즈·스마트폰렌즈 등), 고기능 재료(편광판·보호필름 등), 디지털 인쇄, 문서 솔루션(사무용복사기·복합기·프린터, 관련 업무 솔루션 등), 메디컬 라이프 사이언스 등이었다.”

외부 컨설팅은 받지 않았나?
“신규 사업을 선택하는 논의는 기본적으로 회사 내에서만 진행했다. 나는 직원들에게 “사외 컨설턴트의 의견을 너무 신뢰하지 말고 스스로 생각해 달라”고 계속 얘기했다. 외부 전문가 의견을 귀담아들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회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외부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다. 특히 경영자가 최종 판단을 외부인의 조언에 의지한다면, 그런 경영자는 바로 그만두는 것이 낫다.”


필름과 바이오는 기술적으로 연결된다

화장품에도 진출했는데. 필름 회사에서 화장품이라니 의외였다.
“그렇게 보이겠지만 완전히 다른 분야에 진출한 것이 아니었다. 사진필름과 화장품은 사실 공통점이 많다. 사진필름의 주된 원료는 젤라틴, 즉 콜라겐이다. 인간 피부는 70%가 콜라겐으로 구성돼 있다. 피부의 윤기와 생기를 유지하는 것이 콜라겐이다. 후지필름은 그 콜라겐을 사진필름 기술 개발을 통해 80년 넘게 연구해 왔다. 인간의 피부가 노화하는 것은 산화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인데, 산화는 사진의 빛바램 현상의 원인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면 사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열화를 막으려면 어떤 물질을 더해야 하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우리한테는 많다. 그런 축적된 기술을 안티에이징 화장품에 적용했다. 또 후지필름이 2007년 출시한 화장품 ‘아스타리프트’에는 식물에서 추출한 천연 성분인 아스타크산틴이라는 항산화 성분이 들어있는데, 이 성분은 물에 녹지 않아 다루기 어렵다.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이 물질을 극미세화하는 나노 기술이다. 후지필름에는 사진필름 개발로 갈고닦은 나노 기술이 있다. 이 기술을 사용하면 물에 녹지 않는 물질을 녹이거나 필요한 물질을 필요한 곳에 효율적으로 흡수시킬 수 있다. 이 때문에 우리 기술자 중에는 오래전부터 화장품 사업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2007년 화장품에 이어 2008년 제약 사업에 본격 진출했다.
“그렇다. 2008년 3월 일본의 중견 제약 회사인 후지화학공업을 인수하고 본격 진출했다. 후지필름과 협업해 신약을 개발하는 등의 성과를 거뒀다. 이외에도 방사선 의약품 개발·판매하는 회사, 항체의약품 탐색 기술을 가진 도쿄대 벤처기업, 바이오 의약품 수탁 제조회사 등을 차례로 인수했다.”

후지필름이 제약에서 정말 경쟁력이 있나.
“의약품 개발에서는 병에 잘 듣는 약을 개발하기 위해 화합물을 찾는 경쟁이 있는가 하면, 약이 인체에 잘 흡수되는 방법을 찾는 경쟁도 있다. 이 분야의 경쟁은 이제 시작이다. 우리의 나노 기술을 활용하면 약의 흡수를 촉진시키고 최적의 타이밍에 필요로 하는 곳에 흡수되도록 할 수 있다. 바이오 기술을 활용한 고분자 의약품 개발도 진행하고 있다. 결국 저비용으로 고품질 약품을 생산하는 것이 경쟁력의 관건인데, 이 부문에서 후지필름은 확실히 승산이 있다.”

작년 후지필름의 헬스케어·머티리얼 분야 매출은 4~5년 전의 3배인 1조390억엔에 달했다. 이미 전체 포트폴리오에서도 기존의 주력이었던 도큐먼트솔루션 부문을 제치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신규 사업을 어떻게 빨리 키울 수 있었나.
“M&A를 적극 활용했다. 사업을 빨리 전개해야 하는데 ‘1부 능선’부터 오른다면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는 시장에서 존재감을 알리기도 어렵다. 그래서 4부 능선, 5부 능선까지 이미 올라가 있는 회사 또는 사업을 인수해 후지필름이 가진 경영 자원과 조합해 새로운 제품을 빠르고 확실하게 만들어 나가야 했다. 경영자로서 ‘돈을 함부로 쓰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단호하게 투자하는 것도 중요하다.”

M&A 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점이 있다면.
“‘후지필름과 시너지 효과를 내서 타사와 차별화된 제품을 만들 수 있는가’였다. 매출만 높이는 M&A는 우리에게 의미가 없다. 신규 사업으로 계속 이기려면 후지필름과 인수 대상 양쪽의 시너지로 뛰어난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연구·개발 체제의 정비도 필요했겠다.
“맞다. 기술력 활용의 열쇠는 연구소가 쥐고 있으니까. 후지필름은 화학, 전자공학, 메카트로닉스(기계와 전자의 결합기술), 광학, 소프트웨어 등에 광범위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각각의 사업장 쪽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기술이 진보하면서 한 가지 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게 늘어났다. 여러 기술을 복합적으로 활용하면 해결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 그래서 가나가와(神奈川)현에 6000억엔을 들여 후지필름 선진연구소를 만들었다. 회사가 아무리 힘든 상황에도 연구개발(R&D) 비용만큼은 줄이지 않았다. 연간 2000억엔은 어떻게든 계속 투자했다. 상장 기업 경영자는 시장에서 성과를 추궁당하게 된다. R&D 투자를 줄이면 매출 대비 3~4% 이익을 바로 올릴 수 있다. 그래서 항상 R&D비 삭감의 유혹이 따른다. 그러나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앞으로 10년의 성장을 위한 싹을 틔우려면 R&D 투자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가장 높았던 때는 매출 대비 R&D 투자가 8%에 달하기도 했다. 물론 돈만 많이 쓴다고 능사는 아니다. 연구의 목표가 정확해야 한다.”


본업 소멸 위기 극복했더니 또 위기

다각적인 노력으로 2007년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는데 또 대형 위기가 찾아왔다.
“그렇다. 구조개혁, 기존 사업의 역량 강화, 신규 사업 투자 등의 업태 전환 노력이 성과를 거둔 덕에 2007년 매출 2조8468억엔, 영업이익 2073억엔을 기록했다. 매출·영업이익 모두 사상 최대였다. 2007년에는 필름 사업 매출이 최고점 대비 4분의 1로 줄어든 상태였다. 인화지 등을 포함한 사진 사업 전체 매출도 절반 수준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거둔 사상 최대 실적이었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이렇게 나의 일도 끝나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참에 글로벌 경제위기라는 세계적인 대불황이 2008년 가을 엄습해 왔다. 그 무렵 어느 주력 사업의 매출 보고서를 보고 할 말을 잊었다. 월별 판매 달성률이 19%였던 것이다. 나는 영업에서 경력을 쌓았기 때문에, 있어서는 안 될 숫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 감소가 아니라, 달성률 19%.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모든 부서에서 이런 사태가 발생한다면 회사가 파멸하는 것 아닌가’ ‘아!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믿기 어려운 사태였다. 두려웠다. 하지만 현실이었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어떻게 했나.
“시장 규모가 축소된다면 기존 비즈니스로는 이익을 내기 어려워진다. 내가 할 일은 시장이 80% 수준으로 축소되는 것을 전제로 이익을 올릴 만한 기업으로 체질로 바꾸는 것이었다. 2004년부터 추진한 사진필름 사업의 구조개혁이 겨우 한숨 돌린 참이었는데, 이번에는 전체 사업을 대상으로 구조개혁에 나서야 했다. 2009~2010년 간접 부서 등을 대상으로 5000명을 감원했다. 고정비를 연간 1000억엔 이상 줄였다. 이를 통해 2010년에 전년보다 영업이익을 대폭 높일 수 있었다. 매출 또한 소폭 올랐다.”

위기가 일단락된 것인가.
“그런 줄 알았는데, 그다음에는 엔고가 찾아왔다. 글로벌 경제위기 전에는 1달러당 110~120엔이었는데, 이후 엔화 가치가 30~40%나 올라 80엔 전후가 됐다. 세계에서 싸우는 기업에 이게 얼마나 힘든 상황이었는지 모를 거다. 2011년엔 동일본대지진과 태국 홍수 등 자연재해가 몰려왔다. 지금도 상처가 아물었다고는 할 수 없다. ‘앞으로 몇 번이나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나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처해 나가겠다는 마음이다. 경영이란 끝나지 않는 싸움의 연속이다.”

2012년에 업계 거인 코닥이 파산했다.
“무엇이 후지필름과 코닥의 운명을 갈랐을까. 당시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이유를 정리해 본 적 있다. 첫째는 코닥이 오랜 세월 사진필름의 선도 기업으로 군림해 온 것이 족쇄가 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 점이 다각화의 대응을 늦추게 한 것 아닐까 싶다. 코닥도 당연히 디지털화 흐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인수한 의약품 사업까지 매각하고 단기적으로 쉽게 이익을 낼 수 있는 사진으로 회귀했다. 둘째는 디지털화에 대응한 방식이 달랐다. 후지필름은 사진필름의 이익이 급감하는 것을 일정 기간 상쇄하기 위해 디지털카메라, 디지털 현상 등을 일찍 개발하고 내재화했다. 반면 코닥은 이런 사업을 직접 다루지 않고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타사에서 공급받았다. 결국 디지털화 과정에서 코닥의 기업 역량이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코닥으로선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후지필름은 어떻게 빠른 전환이 가능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다른 회사가 할 거니까. 그런 유연한 자세가 코닥과 달랐던 것일지 모르겠다. 또하나 결정적 차이를 얘기하고 싶다. 코닥은 나중에 디지털 컴퍼니를 표방하기 시작했지만, 이 점도 후지필름과 달랐다. 디지털 시대가 됐다고 해서 나는 후지필름을 단순히 디지털 컴퍼니로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디지털에 매달리고 사진·영상에 관련된 디지털 사업을 아무리 잘하더라도 매출은 고작 수천억엔 규모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디지털 세계는 차별화가 어렵다. 가격 경쟁이 격렬해지면 결국 그 수익조차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만으로는 수조엔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 규모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봤다.”

기업이 위기에 부딪힐 때 경영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 네 가지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첫째는 읽어야 한다. 리더는 한정된 시간과 정보만으로 기업이 처한 상황을 파악해 내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읽어야 한다. 처칠 수상이 독일의 맹공에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미래의 전개를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이다. 처칠은 영국이 힘을 내면 미국이 참전할 것으로 예상했고, 그렇게 되면 독일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읽기가 힘들다면 그 사람은 리더 자격이 없다. 누군가가 읽어내기 전에 먼저 읽어내지 않으면 리더의 가치는 없는 것이다. 둘째는 구상(構想)이다. 읽었으면 어디로 갈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작전을 짜야 한다. 셋째는 전해야 한다. 위기를 헤쳐나가는 것은 경영자의 의지에서 비롯되지만, 혼자서는 안 된다. 의지를 조직 구석구석에 전파시켜 위기감을 공유하고 사원 각자가 자각하게 해야 한다. 어떤 곤란한 상황에 빠져도 ‘이렇게 하면 된다’고 깨닫는 순간, 인간은 견디고 계속 노력할 수 있다. 마지막은 실행이다. 경영자는 평론가나 학자가 아니다. ‘현상이 이렇다. 장래는 이렇게 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를 입으로만 떠들면 안 된다. 결단했어도 실행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네 가지를 할 때 주의 할 일이 있다면.
“보유한 전력(戰力)을 조금씩 사용하는 ‘전력 축차(逐次) 투입’은 적에게 각개격파를 당할 수 있다. 이는 전쟁에서도 금기다. 사업도 전쟁도 승리하려면 때를 놓치지 않고 단호하게 해야 한다. 특히 구조조정은 누구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경영자라고 해도 ‘가능한 한 미루고 싶다’ ‘느리게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기분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은 결국 해야 하는 것이다. 우물쭈물하는 동안 회사는 점점 체력을 잃게 된다.”

본업이 축소된다든지 하는 심각한 위기를 겪는 한국 기업에 조언한다면.
“우리가 한국 기업에 조언할 만한 입장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일반론적으로 얘기하면, 그럴 때일수록 자신들이 가진 역량이 정확하게 어떤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정확히 파악해 보는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경영의 비밀 이라든지, 노하우가 있다면.
“세상에 비밀 같은 것은 없는 거다. ‘회사의 위기를 극복한 비결은 뭡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런 단 하나의 비결 같은 것은 정말 없다.”

지금까지의 경험 중 가장 좋았던 것, 가장 후회하는 것 하나씩 택한다면.
“가장 좋았던 것은 2000년의 위기를 함께 노력해 극복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게 가장 기쁘다. 후회하는 것은 없다. 직원에게 지나치게 화를 낸 다음에 하는 작은 후회는 있지만 일생에 크게 후회할 만한 것은 잘 모르겠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잠들기 전에 깊이 고민하는 것은 별로 없다. 귀가해 저녁 먹고, 욕조에서 몸을 풀고, 침대에 누우면 2~3분 만에 잠이 든다.”


고모리 시게타카 회장은 누구?

1939년 옛 만주 봉천(현 중국 선양) 출생. 1963년 도쿄대 경제학부 졸업 후 후지사진필름(현 후지필름) 입사. 주로 인쇄재료·기록미디어 부서 영업에서 근무했다. 1996~2000년 후지필름 유럽 사장, 2000년 후지필름 사장(COO), 2003년 CEO 겸 사장에 취임했다. 2012년부터 현재까지 CEO 겸 회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