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 고립된 물리학자와 화학자, 경제학자 앞에 파도를 타고 수프 캔 하나가 떠밀려왔다. 물리학자는 “돌멩이로 쳐서 캔을 따자”고 했고, 화학자는 “불을 지펴서 가열하자”고 했다. 경제학자는? “음, 여기 캔 따개가 있다고 가정(假定)해봅시다….” 그날 밤 경제학자는 수프를 먹었다고 ‘가정’하고 잠을 자야 했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새 학기 첫날, 교수가 “3편의 페이퍼를 제출받아 이번 학기 학점을 매긴다”고 말한다. 비슷한 수준의 3개 교실이지만, 마감 방식은 교실마다 다르다.

A교실은 완전한 자율과 선택을 택한다. 학기 마지막까지 알아서 내면 된다. B교실은 자율적 제한을 둔 방식이다. 학생들이 각자 3개의 페이퍼를 언제 낼지 서약서를 낸다. 단 서약서 마감일보다 늦게 내면 약간의 감점을 받는다. C교실은 완전한 간섭과 제한을 둔다. 세 페이퍼의 마감일은 각각 4주차, 8주차, 12주 차. 늦으면 감점이 뒤따른다.

세 교실의 평균 학점은 어떻게 나왔을까? 선택의 폭이 가장 넓었던 A교실 점수는 최악이었다. ‘완전한 간섭’으로 선택의 폭이 가장 좁았던 C교실 점수가 최고였다. B교실 학점은 중간이었다.

첫 번째 이야기는 1970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새뮤얼슨(Samuelson)의 유명한 유머다. 원만한 이론 전개를 위해, 분석하기 까다로운 영역은 ‘일단 이렇다고 치고…’ 식으로 ‘가정’하고 넘어가기 좋아하는 경제학의 특성을 꼬집은 것이다. 전통 경제학이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가정(假定)은 바로 경제 주체인 인간에 관한 것이다. 즉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라는 이름하에 경제학은 ‘극히 합리적으로 행동할 뿐 아니라, 이익을 위해 자신을 적절히 조절하고 단·장기적으로 두루 자신에게 불이익이 될 일은 결코 하지 않는, 신(神)과 같은 인물’이라고 인간을 간주해왔다.


“인간은 자주 합리성의 틀 벗어난다”

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결코 그렇지 않다. 경제학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연과학이 때로 ‘진공(眞空) 속의 실험’으로 유익한 이론을 발전시켰듯이, 인간의 합리성을 전제(前提)하고 현실에 활용할 경제학 이론을 진화시키려 했을 뿐이다. 경제학의 다른 가정들이 도전받는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의문 제기가 금기시됐던 성역(聖域)이 바로 ‘합리적 인간’의 전제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래도 인간이 대세적, 총체적으로는 합리적일 것’이라고 본 기대와 전제가 균열하면서 발생했다. 인간은 예상보다 훨씬 더 빈번하고, 더 현격하고, 더 일관적으로 합리성의 틀을 벗어난다는 목격과 분석이 쏟아진 것이다. 그래서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 인간의 합리성 이탈, 혹은 합리성 미흡을 체계적으로 연구해보자며 탄생한 접근이 바로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이다. 영국 경제학자 슈마허(Schumacher)는 이 상황을 “빼어난 구두 수선공이 되려면 이제 구두를 잘 만드는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며 발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비유했다. 여기서 ‘발’은 물론 인간을 뜻한다.

두 번째 스토리는 요사이 미국에서 각광받는 신예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Dan Ariely) 듀크대 교수가 동료 교수들과 함께 행한 실험 내용이다. 애리얼리 교수는 이 실험 결과를 근거로 인간의 이성이 경제학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가장 자율적이었던 A교실의 성과가 제일 저조했기 때문이다. 고전 경제학의 전제인 ‘자율성과 동기를 가진 이성적인 인간’과 다른 모습을 확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