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대장금이 이란에서 9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사례에서 보듯 한류는 콘텐츠 경쟁력을 무기로 아시아를 넘어 세계 속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 등 콘텐츠 경쟁력이 세계적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는 점도 국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가능성을 높여준다. 하지만 요즘 한류 열풍이 주춤하고 있다. 고객관계관리(CRM)를 전공하는 학자로서 한류(韓流)가 ‘한류(寒流)’로 바뀐 이유가 궁금했다.

이와 관련해 얼마 전 한 원로 연극배우의 공연을 본 뒤 평소 궁금했던 점을 물어본 적이 있다. “선생님의 공연이라면 수년간 빠지지 않고 오는 단골 고객들이 있을 텐데 그런 고객들이 누군지 아시느냐”는 질문에 그 배우는 한숨을 지으며 “실은 단골 고객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싶어도 누구에게 보내야 할지 몰라 답답하다”고 했다.

각종 콘서트나 오페라 공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공연 기획사가 고객 명단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표만 팔고 나면 그뿐, 누가 공연에 왔는지 고객 데이터가 전혀 관리되지 않는 것이다.

공연에 오는 고객 데이터의 상당수는 티켓링크나 맥스무비와 같은 인터넷 공연 예매사이트에 있을 것이다. 이런 정보를 나누어 활용하면 어떨까. 산업 간 연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CRM은 고객과의 파트너십

CRM이란 무엇인가. 고가의 컴퓨터 솔루션을 도입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기업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CRM을 ‘고객과 기업 간에 상호 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개발하고 유지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코끼리를 춤추게 하라’라는 책을 쓴 루이스 거스너 전 IBM 회장은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에 몰린 IBM에 부임하자마자 모든 임원들에게 회사로 출근하지 말고 고객사를 방문해 그동안 IBM이 고객사를 제대로 섬기지 못했던 점들을 파악해서 반성문부터 제출토록 했다.

CRM 실무 현장의 관점에서 고객을 분류하면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로 자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보편적인 의미의 고객이다. 2단계로 여기서 한발 나아가 기업이 고객 개개인의 신상과 구매 내역, 취향을 파악할 경우 이를 ‘식별 고객(identified customer)’이라고 부른다. 3단계로 기업의 수익에 공헌도가 높으며,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다른 사람에게 추천까지 하는 고객을 ‘핵심 고객(core customer)’이라고 한다.

요즘 많은 기업들이 식별 고객을 관리하고 있지만, 그 관리가 일회성이어서 핵심 고객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어느 기업 임원은 “우리는 1500만 명의 고객 DB를 갖고 있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몇 년만 지나면 이사를 간 고객 주소가 맞지 않아 데이터의 절반 정도는 쓸모없어질 것이다.

고객을 식별 고객으로 바꾸는 데 ‘고객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면, 식별 고객을 핵심 고객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고객을 위한 정보’가 필요하다. 과연 어떤 정보가 고객을 위한 정보이고 어떤 정보가 고객들이 받아보기 싫어하는 ‘스팸’일까.

오래전 개인연금에 가입한 한 생명보험회사에서는 내게 매달 한 번씩 ‘자동이체 보험료 입금 결과 안내’라는 이메일을 보내준다. 하지만 나는 항상 열어보지도 않고 그냥 지워버리곤 한다. 왜일까. 매달 오는 정보 중에 달라지는 것은 ‘보험 납입 횟수’라는 숫자 하나뿐이어서 관심이 가지 않는다.

반면 똑같이 매달 일정액을 불입하고 있는 한국교직원공제회에서 분기에 한 번씩 보내주는 이메일 뉴스레터는 내가 프린트까지 해서 보관할 정도다. 거기엔 가입일자와 부담원금, 부가금, 총급여금이라는 4가지 정보밖에 없지만, 내 입장에선 필수적인 정보가 들어있다. 부가금이란 내가 지금까지 교원연금으로 납부한 총액을 나타내며, 총급여금은 내가 오늘 당장 KAIST를 그만둘 경우 얼마 받을 수 있는지를 나타낸다. 그러니 궁금할 수밖에.

핵심 고객과의 관계를 확장해 단순한 거래 관계 이상의 끈끈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고객에 의한 정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인터넷 서점으로 유명한 아마존 사이트에 들어가 내 이름으로 로그인하면 첫 화면에 ‘오늘의 추천’이라는 제목의 정보가 뜬다. ‘마이 페어레이디’라는 DVD도 추천 리스트에 포함돼 있는데, 그건 내가 그동안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 DVD를 여러 차례 샀다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렇게 추천했을 것이다. 또 내가 어느 경영학 책을 샀다는 기록에 근거해 비슷한 분야의 경영학 신간을 소개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내가 거래를 위해 입력한 정보가 다시 나의 구매 편의를 위해 쓰이는 것이다.

국내 한 대형서점의 인터넷 사이트에 한번 들어가 보자. 여기서는 내 이름으로 로그인하기 전과 로그인한 후의 화면 구성이 똑같다. 그런 사이트는 고객에게 ‘책 사러 왔어? 그럼 메뉴도 있고 키워드 검색기능도 있으니 네가 알아서 잘 사’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원래 굴뚝기업이라 그런가 해서 다른 인터넷 전용 서점 사이트에 로그인해서 책을 한 권 구매해 보니 비누, 건전지, 껌 등 내가 산 책과는 전혀 무관한 생필품들이 추천 목록에 뜬다. 이런 것을 보면 기업 역량 측면에서 우리 기업들은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객 개인 정보 세심하게 관리해야

정리하자면 CRM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핵심 고객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핵심 고객의 니즈(Needs)를 파악하고, 그들에게 그런 니즈보다 훨씬 더 큰 가치(value)를 제공해야 한다. 니즈만큼만 제공하면 고객이 만족할 수는 있지만 감동하지는 않는다. 외식 체인점 놀부의 창업주인 오진권 ‘이야기가 있는 외식공간’ 대표가 가르쳐 주지 않던가? 손님이 음식값을 지불할 때 ‘오늘 내가 이겼다’라고 생각하면 그 음식점은 무조건 성공한다고.

여기에 덧붙여 고객과의 관계는 호혜적(互惠的)이어야 한다는 점에도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고객 정보가 있다고 해서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구매를 권유하는 방식은 고객에게 거부감만 줄 뿐이다. 이것은 CRM시스템을 도입한 회사들이 가장 흔히 저지르는 실수다. 고객과 회사가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고객관리 방식을 잘 설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고객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고객 정보가 있다고 해서 이를 남용하거나 소홀히 관리해서는 안 된다. 최근 빈번히 터지고 있는 대기업들의 고객 정보 유출 사고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