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7월 19일 솜 전투에서 부상당한 영국군들. <사진 : 위키피디아>
1916년 7월 19일 솜 전투에서 부상당한 영국군들. <사진 : 위키피디아>

1916년 7월 1일, 1500여 문의 야포가 쉬지 않고 뿜어 낸 8일간의 포격이 그치자 30㎞에 이르는 전선에 도열한 영국군을 주축으로 한 75만의 연합군이 마침내 진지를 박차고 나와 공격을 시작했다.

작전을 총지휘한 영국군 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Douglas Haig)는 40만명으로 추정되는 독일군을 손쉽게 격멸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 드러난 모습은 실로 참혹했다. 전선을 돌파하기는커녕 작전을 주도한 영국군 1만9240명이 전사하고 3만5493명이 부상당했다. 영국, 아니 인류 역사상 최악의 참사가 벌어진 것이었다. 바로 제1차세계대전의 모든 격전들 중에서 최악으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솜 전투(Battle of the Somme)의 첫날 모습이었다.

자연재해, 핵폭탄처럼 하루 동안 있었던 인명 피해 규모가 더 큰 사례도 있지만 순수하게 군대가 교전을 벌여 입은 손실로는 역사상 최대였다. 기원전 216년에 있었던 칸나에 전투에서 8만명의 로마군이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신빙성을 따져 봤을 때 솜 전투 첫날의 모습은 가히 전무후무한 수준이라 할 만했다.

사거리가 짧고 불발탄이 많아 연합군의 사전 포격 효과가 예상보다 적었던 반면 견고하게 구축된 진지를 신속히 옮겨 다니며 이동 방어에 나선 독일군의 전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였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첫날의 무시무시한 희생이 끝이 아니라 시작을 알리는 작은 숫자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현장 무시한 지휘관의 독단이 원인

공식적으로 정전한 것이 아니고 이후에도 간헐적 교전이 계속 벌어졌지만 폭설이 내리면서 전선이 급속도로 소강상태에 빠진 11월 18일을 대개 솜 전투의 종전일로 본다. 이렇게 5개월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연합군은 15만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60만명이 피해를 입었다. 연합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저지한 독일의 사상자도 40만명에 이르렀다.

이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애초 목표로 했던 프랑스 바폼(Bapaume)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다. 최초 출발선에서 15㎞ 정도 전진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이것도 전력이 열세였던 독일이 전략적으로 지연 후퇴를 선택하면서 간신히 이룬 결과였다. 문제는 피해를 충분히 줄일 수 있었음에도 현장을 무시한 헤이그의 독단 때문에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는 점이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7월 1일 저녁에 참모들과 예하 부대장들은 너무 희생이 크니 이후 공격은 다른 방법을 택하자고 헤이그에게 건의했다. 하지만 헤이그는 독일도 비슷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계속 같은 방법으로 진격할 것을 명했다. 결국 두 달이 지난 후에 마지못해 생각을 바꿨지만 이미 엄청난 피해를 본 후였다.

이 작전을 위해 6개월 동안 준비를 했지만 헤이그는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계속돼 온 포격 후 보병이 열을 맞춰 일제히 돌격하는 고루한 전술을 그대로 답습했다. 놀랍게도 이 방식은 전열보병이 주축이었던 100년 전 나폴레옹 전쟁 당시와 바뀐 것이 거의 없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연합군뿐만 아니라 독일군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그렇게 소리 지르며 돌진한 병사들은 숨을 곳 없는 벌판에서 상대편에서 난사하는 기관총의 세례를 받았다는 점이었다. 100년 동안 무기의 발달 속도는 어마어마했지만 전쟁을 치르는 방법은 그대로였다. 결국 이런 모순은 엄청난 희생이 벌어진 결정적인 요소가 됐다.

1870년의 보불전쟁 정도를 제외하면 강대국 간의 정면충돌이 없었기에 전략, 전술, 작전 개발에 게을렀다. 문제는 1914년 제1차세계대전 발발 후 2년 동안 이런 방식으로 전쟁을 치르면서 고생을 했다면 뭔가 변화를 줬어야 했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헤이그는 고집스럽게 같은 방법을 고수하다가 사상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혹자는 당시 여건으로 볼 때 대안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솜 전투 개시 두 달 후인 9월부터 영국 포병이 보병의 진격 속도와 연동해 이동 포격을 실시하고 신무기인 전차를 투입해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피해를 줄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노력을 안 한 것이었다. 당연히 지휘관에게 비극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버라이즌의 자회사 오아츠가 운영 하고 있는 야후 사이트. <사진 : 오아츠>
버라이즌의 자회사 오아츠가 운영 하고 있는 야후 사이트. <사진 : 오아츠>

야후, 거대한 변화의 흐름 적응 못해 몰락

비즈니스 세계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변화하는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면 한순간에 몰락한다. 1990년대 IT 분야의 선구자이자 인터넷 검색의 개척자였던 야후는 2016년 미국 최대 통신사 버라이즌에 인수됐다. 현재 포털 서비스는 계속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야후가 창업 23년 만에 사라진 것이다. 그동안 회생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온라인 환경이 PC에서 스마트폰으로 전환하는 거대한 흐름에 제때 적응하지 못해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1998년 구글이 등장했을 때 ‘검색 엔진 정도는 하청으로 사용하면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 만큼 창업자 제리 양(Jerry Yang)은 야후가 모든 것을 개척했다는 성과에 도취돼 변화를 거부했다. 거기에 더해 포털 대신 페이스북처럼 모바일 플랫폼을 이용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장이 급격히 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결국 잘못을 깨달았을 때는 새로운 분야에 진입 자체가 어려웠을 만큼 모든 것이 늦었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싸웠기에 당연히 이 방법이 옳다고 고집한 헤이그와 중요했던 시기에 과거만 생각하며 연이어 실기한 제리 양은 같은 실수를 범했다. 가장 잘나갈 때 오히려 변화와 혁신을 시도해야 하는 이유다.


▒ 남도현
럭키금성상사 근무, 현 DHT에이전스 대표, 군사칼럼니스트, ‘무기의 탄생’ ‘발칙한 세계사’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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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 전투 (Battle of the Somme) 제1차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솜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독일군이 2회에 걸쳐 벌인 전투다. 첫 번째 격전 날인 1916년 7월 1일 영국 보병이 돌격전을 감행했는데, 역사상 최악의 참사가 발생했다. 하루 전사자가 1만9240명, 부상자는 3만5493명에 달했다.